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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같은 존재 ‘편집자’, 노하우 공유 필요하다
그림자 같은 존재 ‘편집자’, 노하우 공유 필요하다
  • 김정규
  • 승인 2023.05.08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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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_『편집자의 시대』 가토 게이지 지음 | 임경택 옮김 | 사계절 | 296쪽

미스즈서방 편집자 가토 게이지 유고 산문집
20세기 후반 일본 인문 출판 융성기의 기록

가토 게이지(思言敬事)는 잊히지 않는 한 권의 책으로 1947년판 『소년아사히연감』(아사히신문사)를 꼽았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이 책을 볕이 잘 드는 마루 끝에 앉아서, 그야말로 배부른 상태에서 온종일 탐독했고, 저녁에 목욕하다가 코피가 터져 목욕물이 붉게 물드는 것을 아찔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가토는 1940년생이다. 책을 좋아했지만, 패전 직후의 일본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책이 거의 없어 열다섯 살 위의 형이 읽던 소년 잡지를 읽었다. 로맹 롤랑의 『장크리스토프』, 허버트 조지 웰스의 『세계 문화사』 등을 경쟁적으로 읽던 고교 시절을 지나 도쿄대에 진학한 가토는 1960년에 일어난 안보반대투쟁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권력과 폭력에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순간의 용감함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저항을 지속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고, 인류학·미술사·철학·역사학 등 여러 수업을 틈나는 대로 청강하며 교양을 쌓는 데 주력한다.

가토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취직한 출판사가 미스즈서방이다. 그는 이곳에서 1965년부터 35년간 근무하며 제2대 편집장을 역임한다. 미스즈서방 창립자 겸 초대 편집장이던 오비 도시토는 가토가 입사하자 함께 강독할 책을 하나 내밀었다. 다름 아닌 스탠리 언윈의 『출판개론-출판업에 대한 진실』이었다. 그 즈음 미스즈서방 대졸 신입사원 교육용 도서는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는 마사지다』 라는 영문 원서였다.

출판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46년에 창립한 이 출판사는 한나 아렌트, 카를 슈미트, 레비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등 서구 지성들의 저작을 번역 출간해 명성을 쌓았다. 번역서 목록을 프랑크푸르트국제도서전에 가지고 가서 해외 출판인들에게 보여주자 일본에 이런 꿈같은 출판사가 있느냐면서 모두 놀랐다고 한다.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의 세계 최초 외국어 번역서가 바로 1928년에 나온 일본어판이다. 20세기 후반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이 책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것은 당시 일본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가토 게이지가 마지막 교정을 보다가 2021년 타계하는 바람에 유고집이 되어 버린 『편집자의 시대』에는 실로 많은 책과 저자, 번역자, 편집자의 이름이 등장한다. 가토 게이지가 읽었거나 만났거나 친분이 있는 이름들이다. 이들 각각의 일화를 따라가다 보면 편집자와 저자, 번역가가 함께 지적 토양을 일구어가던 20세기 후반 일본 지식인 사회의 열기를 확인할 수 있다.

가토 게이지는 이 책의 초고를 출판사에 건네주고 나서도 새로 쓴 원고 두 꼭지의 오류 가능성 때문에 출판을 망설였다. 그런데 얼마 후 자신이 설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가 말하지 않으면 미묘하게 틀렸다 하더라도 이제 아무도 말할 사람이 없다”라고 결심해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편집자는 “모든 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이자,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 전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이있다. 두루 알면서 최소한 한 분야는 깊이가 있는, 도요타가 제시했던 T자형 인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편집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림자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이들의 회고록은 특별하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까지의 과정을 실제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회고록은 흔치 않다. 한국에서는 더욱 드물다.

꼭 출판 편집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오늘날 한국에는 세계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수많은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 내는 다양한 분야의 기획자나 프로듀서들이 있다. 이들의 경험은 두루 공유되어야 한다. K-컬처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지식과 권력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

 

편집자, 기획자, 프로듀서들의 노하우가 공유돼야 콘텐츠가 경쟁력을 갖춘다. 이미지=픽사베이

 

 

김정규
한국대학출판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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