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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화 사회, ‘젠더편향 뇌’ 낳는다
젠더화 사회, ‘젠더편향 뇌’ 낳는다
  • 김정규
  • 승인 2023.04.07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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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_『편견 없는 뇌』 지나 리폰 지음 | 김미선 옮김 | 다산사이언스 | 536쪽

안내 없어도 세상의 규칙 알아내는 뇌
가소성 이론으로 젠더 차이 해소·타파

연구자들이 에티오피아의 외딴 마을에 상자 한 무더기를 떨어뜨렸다. 그 상자들 안에는 약간의 게임과 응용프로그램, 노래가 탑재된 최신 노트북이 들어 있었다. 설명문은 전혀 없었다. 그 마을 아이들은 컴퓨터를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연구자들은 그 이후에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상자를 발견한 한 아이가 4분 만에 전원 스위치를 찾아 노트북을 켰고, 5일이 못 되어 마을 안의 모든 아이가 40개 이상의 응용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연구자들이 깔아 둔 노래를 따라 불렀다. 5개월이 되기 전에 아이들은 고장 난 노트북의 내장 카메라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 OS를 해킹했다.

인간의 뇌는 에티오피아의 이 마을 아이들과 닮아 있다. 안내 없이도 세상의 규칙을 알아내고, 응용프로그램을 학습하고, 애초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한계를 넘어선다. 주변 세상으로부터 정보를 빠르게 흡수하여 생존방안을 찾아내는 사회적 스펀지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런 훌륭한 뇌를 잘못 사용해온 뿌리 깊은 사례가 있다. 바로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진 뇌의 성차(性差), 젠더 차이의 문제다. 영국 애스턴브레인센터의 인지 신경과학자 지나 리폰은 『편견 없는 뇌』(The Gendered Brain)에서, 18세기에 태동한 뇌과학이 너무나 오랫동안 여성 차별·억압의 도구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여자는 … 인간 진화에서 가장 하등한 형태를 대변하며 … 문명화된 성인 남자보다는 어린이와 야만인에 더 가깝다(귀스타브 르봉, 1895).”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잘 발달된 남성의 뇌는 여성보다 크다고 하며 뇌의 크기나 용량을 계량하는 두개골학이 등장했다. 그리고 뇌의 돌출부 모양에 따라 호전성·다산성·조심성 등을 판별하는 골상학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여성의 보완적 본성이라는 개념이 나타나 “사적이고 배려심 많은 여자는, 공적이고 이성적인 남자를 돋보이게 하는 조연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까지 여성을 권력의 회랑에서 추방하기 위해 여성의 허약함과 취약함에 대한 연구결과가 끊임없이 발표됐다. 

 

20세기부터 뇌과학이 진일보했다. 지나 리폰은 뇌의 가소성 이론에 근거해 ‘뇌를 묶는 관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진=픽사베이

20세기에는 뇌과학 분야 기술이 진일보하면서 뇌파 측정, 양전자방출단층촬영,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등이 출현하여 뇌의 활동을 그래픽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서는 뇌의 가소성 이론이 등장하게 됐다. 지나 리폰은 위의 책에서, 우리의 뇌가 후천적 학습을 통해 계속 성장한다는 가소성 이론에 기반하여 성차, 젠더 차이를 해소하고, ‘뇌를 묶는 관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홍과 청색으로 구분되는 영아복 같은 성차별적 고정관념과, ‘남자답게’와 ‘여자답게’라는 교육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신의 특별한 선물인 인간의 뇌를 충분히 활용하여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폭력을 먼저 시작하는 측은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인간으로서 승인하지 않는 억압자들이지, 억압과 착취와 차별을 당하는 피억압자들이 아니다.” “억압자들이 보기에 불만을 품고,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고, 사악하고, 사납게 보이는 쪽은 언제나 그들의 폭력에 맞서는 피억압자이다.”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에 나오는 이 두 문장에서 ‘억압자’를 ‘남성’으로, ‘피억압자’를 ‘여성’으로 치환해 보자. 

다소 이분법적이고 직설적이긴 하지만, 뇌과학의 역사에서조차 이처럼 여성에 대한 억압이 지속적으로 자행돼 왔다는 것이 새삼스러워 제안해 본 것이다. 우리는 불평등이 체화되어 그것을 인식조차 못하는 비인간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사회질서를 지속하려는 ‘그’의 존재를 끊임없이 살피고, 구조적 해법을 찾기 위한 실천(praxis)이 절실하다.

 

 

 

김정규 
한국대학출판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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