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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5] 구 체제는, 그 폭력에 참가하지 않았을 때 파괴된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5] 구 체제는, 그 폭력에 참가하지 않았을 때 파괴된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11.11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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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과 톨스토이
레오 톨스토이. 사진=위키미디어
레오 톨스토이. 사진=위키미디어

러시아에서 1905년 혁명의 실패는 톨스토이의 견해를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혁명을 기뻐하지만 혁명을 만들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혁명을 파괴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슬퍼집니다. 구 체제의 폭력은 폭력에 참가하지 않는 것에 의해서만 파괴될 것이며, 현재 자행되고 있는 새롭고 어리석은 폭력 행위에 의해서는 전혀 파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땅에서 일하는 인민, 실제 인민, 수억 농민들이 폭력에 수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이 모든 경박하고 시끄럽고 짜증나고 민감한 군중을 무해하고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 한 우리는 반드시 군사 독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러시아의 사회운동』(1905)이라는 글에서 그는 좋은 사회가 독재를 입헌 정부로 대체함으로써 생길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생각을 거부하고, 서양의 의회 체제에는 자유가 결여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의의』(1906)에서는 인민이 토지에 남아 있어야 하고, 서구의 산업 문명을 피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를 되풀이했다.

강압적인 정부를 종식시키는 유일한 효과적인 방법은 저항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상은 어떤 조직적인 운동으로도 실현될 수 없고, 개개인의 도덕적 자기계발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당연하게도 레닌은 자본주의 착취와 정부 폭력에 대한 톨스토이의 비판을 칭찬하면서도 톨스토이의 종교 옹호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부패한 것 중 하나'를 보았다. 그는 톨스토이의 악에 대한 저항이 '첫 번째 혁명 운동을 패배시킨 가장 심각한 원인'이라고 선언했다.

조지 버나드 쇼. 사진=위키미디어
조지 버나드 쇼. 사진=위키미디어

또 다른 찬양자인 버나드 쇼(Bernard Shaw)도 톨스토이의 사회와 도덕 철학의 특정 측면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그는 '인류의 지적 의식'을 구축하고 있는 5인의 목록에 그를 포함시켰지만, 우리가 톨스토이주의를 받아들인다 해도 서로의 자선으로 영원히 살 수는 없다고 썼다. 

“우리는 삶을 단순화하고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물질적 생활조차도 그것의 생산과 그 분배의 산업적 문제를 수반할 것이고 아나키즘을 무시할 것이다…산업계의 아나키즘은 가능한 한 오늘날 우리가 가진 문명을 정확히 생산하고 있으며 … 톨스토이의 공동체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문명을 없애는 것이다.”

페이비언(Fabian) 사회주의자로서, 쇼는 젊은 시절의 아나키즘적 공감을 버리고 임금 체계를 폐지하려는 크로포트킨의 공산주의보다 벤저민 터커(Benjamin Tucker)가 옹호한 자유방임 경제학과 '산업의 아나키즘'을 동일시했다(이는 <Liberty>에 쇼가 기고한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톨스토이가 간디에게

노년에 톨스토이는 그의 의로움이 짜증나고 그의 설교가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내와 가족과 가정에서 점점 더 많은 문제를 겪었다. 공개석상에서 그는 정의와 평화의 대의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1908년에 지주의 집에 대한 공격으로 20명의 농민을 처형한 내용의 기사를 읽은 후 그는 그의 유명한 글인 사형에 반대하는 『나는 침묵할 수 없다』를 썼다. 그는 혁명적 범죄가 끔찍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합법화된 폭력의 범죄성과 어리석음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정부가 사형집행이 러시아 국민의 보편적인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범죄에 무의식적으로 참여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느꼈다. 

생전에 간디는 톨스토이를 존경했고 톨스토이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는 신보다 사람에게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공유한 억압받는 두호보르(Dukhobor)를 캐나다로 이주하는 것을 포함해 많은 대의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항상 사회 개혁가들에게 조언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죽기 직전에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읽고 감동한 간디에게 톨스토이는 “사랑, 즉. 화합을 향한 인간 영혼의 노력과 그 노력의 결과인 활동은 인간 생명의 최고법이자 유일한 법이다”라고 썼다.

폭력과 양립할 수 없기에 그는 “강제적인 우리의 모든 세금, 사법 및 경찰 기관, 무엇보다도 군대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군대는 폐지되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의 실패가 무엇이든, 톨스토이는 그가 말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순결에 대한 그의 위대한 이상은 자신의 침대에서 반복적으로 패배했다. 그의 열정의 사나운 것이 그의 이성의 고요함을 지배했다. 

간소한 복장으로 하인들의 대접을 거부하고 장화 수선을 하고 자기 땅에서 농부처럼 생활하며 채식을 한 그는 자신의 재산을 아내에게 넘기고 마지막 책에 대한 저작권을 양도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그의 국제적 명성을 높여주었지만 그의 새로운 방향을 이해할 수 없는 그의 가족과의 문제만 증가시켰다. 오로지 막내딸만 그에게 공감했다. 상황이 너무 나빠서 톨스토이는 마침내 수도원에 가서 살기로 결정했다.

그는 1910년 겨울, 82세의 나이로 의사와 막내딸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 긴 기차 여행 중에 그는 갑자기 병에 걸려 아스타포보(Astapovo)의 작은 철도 교차로에서 사망했다. 그의 소원에 따라 그는 소년 시절 그와 그의 형제가 세상의 악을 치료할 녹색 막대기가 발견될 것이라고 믿었던 이전 영지의 숲에 묻혔다.

“비폭력 국가가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톨스토이와 크로포트킨, 엠마 골드만을 비롯한 아나키스트의 책을 읽고 자기 방식으로 살고자 2년 만에 대학을 그만두고 급진 사회주의 운동이 투신했다. 사진=위키미디어

톨스토야 공동체는 유럽 전역에 설립되었으며, 그의 후기 작품은 미국에서 점점 권위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으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개인의 생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공감을 얻었으며, 그의 신념은 도로시 데이와 암몬 헤나시(Ammon Hennacy) 등 <가톨릭 노동자>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 그는 주로 자신의 나라에서 문학 예술가로 추앙받았다. 당국은 그의 사회 철학을 무시하거나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한 아나키스트가 고향에 버린 재산은 하루에 5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국립 박물관이 되었다. 

군국주의, 애국심 및 정부에 대한 그의 전복적 견해는 1958년 소련에서 90권으로 출판된 그의 글의 거의 확정판에서 추려낼 수 있다. 도덕적, 사회적 사상가로서 톨스토이의 가장 큰 간접적 영향은 아마도 인도에 있었을 것이다. 간디는 톨스토이의 무저항 교리를 영국 제국의 존재를 몰아내기 위한 캠페인에서 매우 효과적인 무기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간디는 톨스토이를 넘어 집단행동을 발전시키고 대중 불복종 캠페인을 조직했다.

그는 “이상적으로는 비폭력 국가가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이상을 향한 발걸음으로 제한된 정부와 일종의 간접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수용했다. 인도 독립 이후 인도에서 비노바 바베(Vinoba Bhave)의 지도 아래 발전한 사르보다야(Sarvodaya) 운동은 톨스토주의의 원칙에 더 가까워졌다.

민권운동
흑인 시민과 민권 운동가들이 테네시에서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서방에서 톨스토이의 메시지, 특히 더 실용적인 적용을 준 간디가 중재한 것은 그들의 통치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핑계로 핵 절멸의 위협을 사용한 초강대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 운동에서 비옥한 기반을 찾았다. 톨스토이는 평화주의 전통과 아나키즘 전통 사이의 화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임이 입증되었다.

그의 비폭력 직접행동과 시민불복종 전술은 60년대에 잠시동안 평화로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로 점점 더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폭력은 정부의 폭력을 폐지하는 데 사용될 수 없으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톨스토이의 핵심 통찰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러시아 귀족이 19세기에 바쿠닌, 크로포트킨, 톨스토이에서 세 명의 가장 위대한 아나키스트 사상가를 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차르 정권의 폭정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고, 반대로 정부의 흔적도 없는 무질서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농민 공동체의 고무적인 예를 목격할 수 있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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