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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7] 마흐노, 검은 깃발 아래 ‘느슨한 정부’를 만들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7] 마흐노, 검은 깃발 아래 ‘느슨한 정부’를 만들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11.28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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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노의 삶
네스토르 이와노위치 마흐노는 우크라이나 아나키즘 혁명가로다

푸틴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형제이지만 우크라이나인이 서방에 ‘세뇌’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불쌍한’ 형제를 구제하기 위해 ‘명석한’ 러시아 군인을 파견한다며 2022년 전쟁을 일으켰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는 수백 년에 걸쳐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어 왔다. 앞에서 본 톨스토이가 아나키즘에 기울게 된 동기가 젊어서 카자크 족을 만난 것이었는데, 그때가 1851년이었으니 톨스토이는 고골리가 1835년에 쓴 『타라스 불바』를 읽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이 작품은 카자크 족장인 타라스 불바가 카자크의 적인 폴란드 여인을 사랑하는 그의 아들과의 갈등을 주제로 한다. 

그런데 지금 그 소설은 푸틴의 편인 것 같다. 왜냐하면 소설의 카자크는 지금의 러시아, 폴란드는 유럽연합과 미국을 뜻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폴란드는 13세기 이후 우크라이나를 분할 지배했다. 그 잔재로 우크라이나에는 친러파와 반러파가 여전히 대립한다.여러 면에서 현재의 갈등은 우크라이나의 가장 중요한 아나키스트 중 한 명이 관련된 이전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 

마흐노는 러시아와는 싸우고 서방은 적대했을 것

마흐노는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그 동맹국에 맞서고, 이어 반동적인 러시아 백군과 싸우고, 키예프에서 다시 과거의 동지였던 볼셰비키 적군과 싸웠다. 러시아 혁명 초기에 그는 혁명 세력의 ‘형제’로 여겨졌으나, 그가 모스크바 공산당의 통치를 거부하자 공산당은 그를 도적이라고 낙인찍고 그를 반유대주의자니 군국주의자니 하며 비난하며 그를 추방했다(지금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나치라고 비난한다). 그의 명성은 그가 죽은 후에도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고 일부는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우익은 그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로 바꾸려고 했다. 그의 고향에서는 그를 지역 영웅으로 선언하고 2009년에 마을 광장 중 한 곳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2019년 고향 시의회는 프랑스에 마흐노의 유골 반환을 요청했다. 

러시아 내전 당시 남겨진 사진들이다. 마흐노는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과 맛서 싸웠다. 사진=위키미디어

지금 마흐노가 살아있다면 그가 푸틴을 추방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군대와 함께 맹렬히 싸웠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서방의 중앙집권력적 권력에 대한 환상도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핵무기로 가득 차 있으며 강력한 국가를 중심으로 지구를 빠르게 파괴하는 엄청나게 부유한 기업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는 자본주의권에 당연히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1920년 전후의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들이 몰살된 반면 오로지 우크라이나에서만 아나키스트운동은 네스트어 마흐노의 지휘 아래 계속 이어졌다. 10월 혁명 이후 그는 주도적으로 약 650제곱킬로미터의 면적과 대략 700만 명이 있는 지역을 자치 지역으로 조직하고 공장을 점거하고 집단이 생산을 하게 했다. 모스크바의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직물과 곡물을 직접적으로 교환하는 협상하기까지 하면서 1년 이상 아나키스트들은 넓은 영토를 관리했는데, 이는 현대사에서 대규모로 활동한 몇 안 되는 아나키즘의 예 중 하나다. 

마흐노,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를 탈취하다

마흐노는 1889년 우크라이나 농촌에서 6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한 살도 안 되어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일곱 살부터 양치기로 살았고 이듬해 겨울에만 열리는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4년 뒤 자퇴하고 독일인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했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터지자 마흐노는 10대 소년으로 혁명에 뛰어들었다. 17세 때 주물공장에서 일하며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가 만든 20명 정도의 소규모 지하 무장조직에서 경찰서 습격 등의 테러활동을 하다가 1908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교도소에서 지낸 9년간 그는 아나키즘 이론과 역사, 문학, 수학을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간수에게 저항하여 아홉 번 가량 독방에 감금되고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1917년 3월, 정치범 3만 명의 일괄 석방으로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마흐노는 노동자와 농민의 자주관리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내부갈등과 우크라이나에 진주한 오스트리아군 때문에 1918년 4월경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볼가강을 거슬러 피난하다 6월경 모스크바로 간 마흐노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접촉했다. 그를 크렘린궁에서 영접한 볼셰비키 지도자는 아나키스트들의 '공허한 광신주의'에 대해 불평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의 3분의 1만이라도 마흐노와 같다면 공산주의자들은 생산자의 자유로운 조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흐노는 아나키스트들이 이상향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레닌은 아나키스트들의 '공허한 광신주의'에 대해 불평했다. 사진=위키미디어

9월에 그의 군대는 지역 수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탈취했다. 그리고 전쟁 상황에서도 사회혁명은 계속되어 '코뮌' 또는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최초로 설치된 코뮌에는 순교한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볼셰비키들에게 탄압받던 아나키스트들이 우크라이나로 피신오자 그들을 받아주고, 우크라이나어 신문을 발행하며 문화교육과 학교들도 만들었다. 또한 '동맹'이었던 볼셰비키들이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그들을 위해 식량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마흐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자유는 그들의 것이며 어떤 제한도 받지 않는다. 노동자와 농민 자신이 적절하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조직하며 삶의 모든 면에서 합의하는 것은 노동자와 농민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통치될 수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카자크의 변화, 볼셰키비를 놀래다

땅은 공동으로 경작되었고 사무는 코뮌이 선출한 임시 대표자가 관리했다. 각 코뮌은 고용된 노동력 없이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토지를 가졌다. 코뮌은 단지 한 지역의 농민들이 결정을 내리는 집행부일 뿐이었다. 생산자 그룹은 지역에서 조직되고, 지역 조직들은 연합되었다. 집회와 언론 출판의 자유가 선언되었다.

아나키즘 교육을 만들고 전통적인 법원 대신 법과 질서가 지역 사회의 살아있는 힘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며 경찰 전문가에게 맡겨져서는 안 된다고 제안되었다. 1919년 1월, 2월과 4월에 그들은 경제 및 군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일련의 농민, 노동자 및 반란 지역 대회를 개최하고 지역 군사 혁명 위원회를 선출하여 느슨한 정부를 형성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자유 아니면 죽음'과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라는 자수가 새겨진 아나키의 검은 깃발이 휘날렸다. 

아나키즘적 신념은 진실했지만, 그는 이론가가 아니었고 그의 운동에는 지식인이 부족했다.  그는 군사 지도자였지만, 카자크 농민의 거칠고 준비된 민주주의에서 그는 의식적으로 아나키즘 이론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군대는 아나키적이고 자발적인 기반으로 조직되었으며, 규율 규칙은 선출된 위원회에서 작성한 다음 당파의 총회에서 투표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의 혁명적 봉기 군대를 약 1만5천명의 군대로 확대하기 위해 징집에 해당하는 자발적 동원에 호소했다. 

깃발에 적인 문장은 "노동자들의 자유의 길을 가로막는 모두에게 죽음을"이다. 이 깃발의 소유주는 우크라이나 반군이다. 사진=위키미디어

마흐노 운동의 증가하는 영향력에 놀란 볼셰비키 정부는 1920년 그와 타협하려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마흐노 군대가 관리하는 지역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경제 및 자치를 위한 자유제도를 만들고, 이러한 기관은 자치적이며 소비에트 공화국의 통치 기관과의 협정에 의해 연방적으로 연결된다. 1919년 4월, 소련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3지역 평의회가 소집되었고 적군 대표단을 초청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볼셰비키 정부에게는 과도한 것이었다. 1920년 10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마흐노 군대가 하의 백군을 격파한 후, 볼셰비키는 그의 부대를 트로츠키의 최고 지휘 하에 적군에 흡수하도록 명령했다. 마흐노는 저항했고 그의 장교들은 합동 군사 평의회에 참석하는 동안 체포되어 1920년 11월에 총살되었다. 마흐노는 1921년 8월까지 절망적인 상황에 맞서 9개월 동안 더 싸웠으나 결국 망명길에 올랐다가 파리에서 가난과 음주로 사망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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