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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9] 아메리카 정착민 영혼에는 아나키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9] 아메리카 정착민 영혼에는 아나키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12.1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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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허친슨
『주홍 글자』를 쓴 너새니얼 호손. 사진=위키미디어

미국의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의 여성인 앤 허친슨(Anne Hutchinson, 1591-1643)부터 설명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감회가 있다. 나는 그녀에 대한 언급을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주홍 글자』(The Scarlet Letter, 1850)에서 처음 보았다. 그 제1장은 감옥 문밖에 있는 찔레꽃 덤불에 대한 장황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그 덤불은 "성자라고 칭송되는 앤 허친슨이 감옥에 들어갈 때의 발자국 밑에서 피어났다"고 믿어졌다고 한다. 그것은 소설의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이 사회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은 실제 여성인 허친슨 사이의 연결이다. 허친슨은 1630년대에 북미 식민지를 여행하여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라고 믿었던 것을 실천하였으나 이단으로 재판받았다. 그 220년 후 허친슨은 소설 『주홍 글자』를 통해 다시 부각된 것이다. 

헤스터와 마찬가지로 허친슨은 지역 사회의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는 의지가 강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이다.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은 실제로 소설에서 묘사된 줄거리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프린은 허친슨을 모델로 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그밖에 여러 문학 작품이나 오페라가 허친슨의 생애, 특히 그 재판을 다루었다. 1987년 마이클 듀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허친슨을 사면하고 350년 전의 추방 명령을 철회했다.

미국 아나키즘의 선구자, 앤 허친슨

앤 허친슨은 17세기 여성이지만 미국 기독교 아나키스트의 선구자라고 할만하다. 미국에는 오랜 기독교 아나키즘의 전통이 있다. 유럽에서 벌어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에 건너온 초기 정착민들은 처음부터 어떤 형태의 정부에도 적대적이었으며 개인의 독립을 맹렬히 추구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1636~1638년의 뉴잉글랜드 논쟁에서 존 휠라이트(John Whieelwright, 1592~1679)는 모든 입법을 원칙적으로 비난했다. 

휠라이트의 친척인 앤 허친슨은 경건한 사람들이 더 이상 법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영혼 속에 사는 은총의 언약에 의해 순화된다고 주장했다.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1683)는 1636년에 강제적인 믿음은 '영혼의 강간'이며 각자는 '모든 것을 시도'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스와 같은 정착민(settler)이면서도 그와 적대한 윌리엄 해리스(William Harris, 1610~1681)는 사람들이 곧 “영주도 없고 주인도 없다”고 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저 윌리엄스는 종교에 대한 강제적인 믿음은 '영혼의 강간'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기독교 아나키즘은 개인주의 아나키즘과 유사하다. 즉 그 둘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기가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고 믿고, 정치적 권위나 공식적 종교법이나 교회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같지만, 기독교 아나키즘은 성령을 통한 개인적 신앙과 신과의 영적 연관을 인정하는 점에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과 다르다.

허친슨은 영국 링컨셔에서 성공회 목사이자 교사의 딸로 태어났다. 성공회는 가톨릭과 대립한 헨리8세에 의해 1534년에 세워졌고, 그 딸인 엘리자베스 1세는 성공회 교리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나 청교도(퓨리탄)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교회가 정화되어야 하고, 특히 가톨릭적인 의식이나 계층제를 없애야 한다고 믿었다. 허친슨의 아버지는 교회 비판과 성직자 교육 강화의 요구로 인해 세 번이나 감옥살이를 하고, 1605년 런던으로 이사한 뒤 1611년에 죽었다.  

허친슨은 1612년 고향 친구이자 부유한 상인인 윌리엄 허친슨(William Hutchinson)과 결혼했고 그들은 1634년 보스턴으로 가서 약초사이자 조산사로 활동했다. 당시 청교도들은 군주가 임명한 주교 대신, 교회의 장로를 직접 선출하고, 평신도 지도자와 두 명의 목사(교리를 담당하는 교사와 사람의 영혼을 담당하는 목사)를 두었다. 

식민지 총독의 명예에 그리고 남성에 도전한 허친슨

허친슨은 초기에는 청교도의 교리를 따랐으나, 점차 엄격한 종교법에 복종하는 것에 회의를 품고, 성령은 참된 신앙과 구제로 나아가는 인격 속에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개인과 하나님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제도화된 준수보다 개인적인 계시를 강조하고 선행을 수단으로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절대적인 의존을 강조했다.

삽화가 에드윈 오스틴 에빈이 그린 앤 허친슨이 재판을 받고 있는 그림. 사진=위키미디어 

허친슨은 영국 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 선행을 함으로써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했기 때문에 타락했다고 믿었다. 보스턴에 도착한 직후, 그녀는 자기 집에서 나날의 설교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전달할 교회 이후의 모임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현관에 모인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집의 창문을 열어야 했다. 역사가들은 그녀의 모임에 보스턴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참석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정통 교인들에게 중대한 도전으로 여겨진 그녀의 잠재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과 다양한 신학적 신념에 대한 긴장이 증가함에 따라 그녀는 이단 등의 범죄로 기소되었다. 1637년 11월 매사추세츠 주 법원의 재판에서 그녀는 식민지 총독의 명예를 훼손했으며 여성으로서 감히 남성을 가르쳤다는 혐의에 대해 자신을 변호했다. 그녀는 광범위한 성경 지식, 웅변, 지성으로 그녀를 고발한 사람들보다 더 능숙하게 토론했으나, 그녀가 직접적인 계시를 주장하면서 “법, 명령, 규칙, 칙령은 길을 밝히는 빛이 없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여 유죄 판결을 받고 식민지에서 추방되었다. 

이어 허친슨과 같은 급진파들을 억압하기 위한 법이 1637년에 제정되었고, 허친슨과 그 동료들은 이듬해 로드아일랜드의 포츠머스로 갔다. 허친슨과 마찬가지로 메리 다이어(Mary Dyer, 1611~1660)도 매사추세츠에서 추방되고. 청교도 정통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당했다. 1642년 남편이 죽은 뒤 허친슨은 가족과 함께 뉴욕시 외곽에 있는 네덜란드인 지역으로 이사했으나, 이듬해 원주민과의 전쟁으로 죽었다.  

허치슨을 존경했던 호손, 체제에 영합했던 호손

허친슨은 시민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의 상징으로 추앙되었고 20세기에는 페미니즘의 선구자로도 여겨진다. 『주홍 글자』에서 호손은 헤스터가 "종교의 창시자로서 앤 허친슨과 함께 역사상 우리에게 내려왔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헤스터의 독립성과 용기를 허친슨과 연결했다. 그러나 두 여성의 경험은 매우 달랐다. 허친슨은 지적 범죄로 기소되었지만 그녀의 적들조차도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았다. 

1926년 영화 <주홍 글씨> 광고. 사진=위키미디어

반면, 헤스터의 반란은 자신의 마음에 따라 불륜을 저지르고 딸의 양육권을 유지할 권리를 옹호하는 사적인 반란이다. 허친슨이 설교를 통해 그리고 재판에서 자기변호를 통해 반항을 드러낸 반면, 헤스터는 불륜 상대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말하지 않을 권리를 위해 싸웠다. 

자신의 처벌에 대한 헤스터의 반응은 여성적 복종의 모범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녀의 자급자족과 아이를 지키려는 결의에서 반항과 급진주의의 요소를 볼 수 있다. 그녀는 헌신적인 어머니이며 그녀의 숙련된 바느질은 적절하고 존경받을 수 있는 전통적인 여성 직업과 그녀를 일치시킨다. 그러나 딸의 복지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싱글 워킹맘이라는 그녀의 지위는 또한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딸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헤스터를 여성 자립의 모델로 만든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은둔과 독립심 덕분에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종종 불행한 삶을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뉴잉글랜드를 떠나 자신과 펄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요청할 때 페미니스트 경향을 표현하지만, 결국 그녀가 뉴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것은 독립과 개인적 해방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딤스데일과 이야기하는 동안 헤스터는 주홍글씨를 찢고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내리는데, 이는 사회가 그녀를 통제하려는 시도에 대한 거부를 상징한다. 주홍글씨는 그녀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형벌이지만, 그 시대의 존경받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모자를 썼을 것이므로 헤스터는 여성이 가부장적 통제를 받는 모든 방식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항적 행동에도 소설은 헤스터가 자발적으로 뉴잉글랜드로 돌아와서 계속 주홍글씨를 쓰고 있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페미니스트의 반항적 행위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헤스터는 허친슨보다 훨씬 보수적으로 보인다. 이는 그녀가 지역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다른 여성들을 계속 지원하면서 가부장제 아래에서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해방을 확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면서 헤스터는 여성의 선택의지와 평등에 대한 강력한 아이디어를 구현하지만, 결국은 지역사회와 타협한다. 여기서 호손은 체제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와 달리 체제에 영합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는 뒤에서 보는 올콧이나 에머슨이나 소로처럼 노예제에 반대하고 체제에 영합하지 않는 19세기 미국 아나키스트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미국은 개인의 기회가 사회적 지위, 인종, 성별 또는 기타 출생 환경이 아닌 야망과 능력에 의해서만 제한되는 자유의 장소로 개념화된다. 그러나 소설에 묘사된 청교도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고 도리어 유럽에서 익명성은 개인을 보호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예상치 못한 반전은 일반적으로 미국과 동일시되는 자유와 기회의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미국은 억압과 감금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아나키즘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로 여겨진 탓에 누구를 아나키스틀 부르는 것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다. 그리고 같은 사람에 대해 아나키스트로 볼 것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엄청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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