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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1] “가르칠 때의 기준은 단 하나. 자유”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1] “가르칠 때의 기준은 단 하나. 자유”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10.1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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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의 교육사상
톨스토이는 이성적으로 자유를 옹호한 사상가였다.  사진=위키미디어

19세기 후반 아나키즘은 폭력적이었기에 톨스토이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누군가가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성적으로 자유를 옹호한 가장 위대한 아나키스트 사상가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바쿠닌과 같은 러시아 귀족 출신이었지만 폭력 혁명을 완전히 거부한 점에서 바쿠닌과 달랐던 톨스토이의 정치는 그의 도덕적 견해와도 연결되었으며, 매우 비정통적인 기독교에 근거했다. 정부의 허위성, 애국심의 부도덕성, 군국주의의 위험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그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많은 추종자들의 공동체를 낳았다. 그는 간디의 비폭력 철학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많은 아나키즘 평화주의자에게 계속 영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태어나 성장하는 동안에는 그가 가장 비타협적인 아나키스트가 될 가능성은 추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체벌 않는 아버지·경건한 이모·존중 받는 하인·행복했던 톨스토이

그는 1828년 툴라(Tula) 주의 야스나야 폴리아나(Yasnaya Polyana)에 있는 가문의 영지에서 다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백작은 1812년 나폴레옹에 대항한 전쟁의 참전용사였으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톨스토이의 어머니는 그가 두 살 때 죽고, 아버지는 아홉 살 때 죽었다. 그 뒤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 복지에 관심이 있는 경건하고 연로한 이모 밑에서 자랐으나 그의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귀족 출신이었다. 그의 집에는 11명의 가종교사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의 아버지는 체벌을 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에게 하인들에게도 예의를 갖추도록 가르쳤다. 집안의 밝은 분위기는 아이들의 유토피아 꿈을 고무했다. 질병도, 불행도, 분노도 없으며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꿈이었다. 톨스토이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집의 한 층에 11명의 가정교사가 살고 있었을 정도로 그의 집은 부유했다. 

1844년 동양어를 공부하기 위해 카잔 대학에 들어갔지만 중퇴했다. 대학 시절 그는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일기에 기록하는 평생의 습관을 시작했으나 반드시 실천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강한 도덕적 양심과 그 이상으로 강한 관능적 욕망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던 청년기를 뒤에 '야망과 허영심, 무엇보다 탐욕을 섬기는 거친 방탕'으로 묘사했지만, 이는 당시 젊은 러시아 귀족들의 공통된 측면이기도 했다.

뒤에 그는 강력하고 통제할 수 없는 관능적 욕망을 해방이 아니라 억압고자 했으나 청년기에는 반드시 그러했다고 보기 어렵다. 대학 중퇴 후 엄격한 독학을 하면서 자신의 영지에서 농부 역할도 했고, 그 뒤 몇 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향락에 젖다가 1851년 그의 형 니콜라이와 함께 북부 코카서스로 가서 포병 연대에 합류했다. 그는 카자크 북부 마을에 주둔하고 산악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는데 수류탄에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고,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치기도 했다.

도박과 여색에 젖었으면서 주변의 들판을 사랑하기도 한 그는 관습과 자발적인 합의에 따라 일을 조정하는 카자크 농민 공동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뒤에 그는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그곳에서 '토지 재산이 정부의 조직적인 폭력에 의해 보호되는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행복과 질서'를 목격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아나키즘에 이르지는 못하고 플라톤과 루소를 읽고 군주제와 귀족제에 봉사하겠다고 결심했다. 

크림의 참혹함을 보고 징집 거부를 촉선동하다

톨스토이가 여러 자전적 이야기와 그의 첫 소설 『유년기』를 저술하면서 문학 경력을 시작한 것은 코카서스에서였다. 뒤에 그는 “나는 군대에서 장군이 된 것이 아니라 문맹이 되었다.” 고 말했다. 1854년 크림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세바스토폴을 방어하는 포대를 지휘하고 엄청난 트라우마를 입었다. 그는 『세바스토폴 이야기』(1856)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묘사한 뒤 1856년에 군대를 떠났다. 

톨스토이는 크림전쟁에 참여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는 징집에서 정부 폭력의 최악의 표현 중 하나를 보았고 나중에 젊은이들에게 군대 복무를 거부하도록 촉구했다. 크림 반도에서 톨스토이는 또한 군대 사회의 유혹으로 인해 오랫동안 잊었던 인생의 초기 목표인 덕의 이상을 회복했다. 이제 그는 27살에 인류의 발전에 상응하는 새로운 종교를 세우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결심했다. 즉, 믿음과 신비주의가 제거된 실천적인 종교,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축복을 주는 그리스도의 종교이다.
수도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문학계를 돌았다. 1857년 그는 프랑스, ​​스위스, 독일에서 6개월을 보냈다. 파리에서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아나키즘으로 점진적으로 개종하는 계기가 된 공개 사형을 목격했다. 

“진실은 국가가 착취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시민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고안된 음모라는 것입니다. … 나는 구속력은 없지만 사람들을 앞으로 이끌고 조화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도덕법과 도덕과 종교의 법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나는 항상 행복을 가져다주는 예술의 법칙을 느낍니다. 그러나 정치의 법은 나에게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더 좋거나 더 나쁘게 볼 수는 없습니다. … 오늘부터 나는 절대 다시는 그런 일을 보러 가지 않을 것이며, 어떤 정부에도 봉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톨스토이는 여전히 사회주의가 기존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지만 국가의 폐지에는 동의했다. 그는 프루동이 『재산이란 무엇인가』(1844)에서 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 억압이며 질서와 아나키의 결합이 가장 높은 형태의 사회라는 믿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프루동의 일방적인 유물론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보편적 사랑에 대한 성숙한 개념을 모색했을 뿐만 아니라 ‘국적은 자유의 성장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장애물’이라고 확신했다. ‘법의 부재는 가능하지만 폭력에 대한 안전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그가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못한 것은 폭력 때문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크림 전쟁에서 대규모로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서도 보았다. 

그는 아무리 유익한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라도 피를 흘리는 것은 정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루동의 다음 명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그리고 여생 동안 그렇게 유지했다). ‘모든 정부는 동등하게 선과 악이 있다. 최고의 이상은 아나키 상태이다’ 

‘자유롭게 들어가고 나가라’

해외여행을 마친 톨스토이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영지와 농노의 상태를 개선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1859년에 소작농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그 학교에서 3~4년 동안 일했다. 처음에 그는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칠지 정확히 확신하지 못했다. 그의 도덕적, 종교적 견해는 아직 굳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배우게 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에 기반을 두고 교육의 역할은 학교가 아니라 삶에 의해 수행된다고 확신하면서 자발적 학습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개발했다. 그래서 모든 의무적인 방법을 없애고 학생들이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학교 입구에 붙인 ‘자유롭게 들어가고 나가라’라는 표어처럼 학교는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도록 허용하면서 불간섭을 실천했다. 

야스나야 폴리아나의 아이들. 사진=위키미디어

톨스토이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어느 정도의 무질서는 유용하고 질서의 필요성은 학생들로부터 와야 하고 본성에서 생겨난 것과 같은 자연법칙에만 복종할 때 그들은 성내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학생들은 가능한 한 분쟁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시험이나  보상과 처벌에 대한 명확한 체계도 없었다. 교육의 본질적인 임무는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 적게' 가르치고 '모든 사람은 형제이며 서로 평등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문화와 교육을 첨예하게 구분했다. 문화는 자유롭지만 교육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만드는 경향’이자 ‘억제된 문화’라고 보았다. 이러한 근거에서 톨스토이는 젊은이들의 필요에 따라 형성하는 경향이 있는 국가 교육에 일관되게 반대했다. ‘정부의 힘은 국민의 무지에 달려 있고,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교육에 맞서 싸울 것이다.’ 톨스토이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학생들의 도덕적 감수성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견해를 전파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1862년 1월에 <Yasnaya Polyana>라는 월간 리뷰를 창간했으며 이 리뷰는 12회 발행되었다. 첫째, 그는 대담하게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아닌지를 결정하려면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거나 적어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교훈을 피할 수 있는 전적인 권한이 있어야 한다. 가르칠 때의 기준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확립하게 하라: 즉 자유이다.!’

학교는 학생들의 특정한 필요에 맞게 조정되어야 한다는 그의 원칙에 따라, 톨스토이는 그의 학교가 타인에게는 가능한 최악의 예가 될 수 있음을 인정했다. 대부분의 현대 전문가들은 그를 ‘교육적 허무주의자’라고 비난하지만, 어린이의 필요에 기초한 그의 아나키즘적 접근은 고드윈의 통찰력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자유 학교’의 성장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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