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20 (목)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8] 쇠빗자루 든 레닌과 트로츠키, 적백내전 중 아니키즘을 제거하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18] 쇠빗자루 든 레닌과 트로츠키, 적백내전 중 아니키즘을 제거하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12.05 08: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세기 러시아의 아나키즘 운동
1920년 11월 10차 당대회에서 생디칼리슴과 반국가주의는 혁명에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선언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우크라이나에서 마흐노의 소비에트가 실패한 뒤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에 있는 노동자와 농민의 소비에트는 볼셰비키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인수되고 중앙 집중화되고 조직되었다. 1917년 12월 최고경제위원회가 공업을 직접 지휘하고 이듬해 5월 공업 전체가 법령에 의해 집산화되고 국유화되었다. 1918년 6월 공장평의회 대회에서 레닌은 선언했다. “당신은 국가의 기본 세포가 되어야 한다”라고. 평의회는 급속히 정부와 볼셰비키 당의 지시에 종속되었고, 노동조합은 주로 노동력을 규율하는 길들이기 기구로 변했다. 

1920년 11월 10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반대파를 '소부르주아적 아나키즘적 일탈'이라고 비난하고 그들의 '생디칼리슴'과 '반국가주의'는 혁명에 직접적인 위험이라고 선언했다. 노동시간에 소비에트 정부의 개별 대표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나 '작업 중 철칙, 단 한 사람, 소비에트 지도자의 의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요구되었다. 레닌이 알렉산드르 버크만(Alexander Berkman)에게 “자유는 발전을 요구하는 현 단계에서 허용되지 않는 사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레닌의 일당 국가와 중앙집중화된 경제에 대한 반대는 없어야 했다. 레닌의 메시지에서 크로포트킨은 1920년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가 일당독재에 지배되는 한, 노동자와 농민의 평의회는 의미를 상실하고 절대 군주제 시대에 영지 대표들이 수행했던 것과 동일한 수동적 역할에 그쳤다. 

크론슈타트 요새 봉기, 러시아 아나키스트의 마지막 몸부림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요새에서 페트로그라드 선원과 노동자의 봉기한 것은 아나키즘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선원들은 1917년 10월혁명의 선봉에 섰었고 그들은 여전히 ​​해군의 혁명적 전위로 여겨졌다. 반란은 주로 혁명을 쇄신하고 볼셰비키 독재와 전쟁 공산주의의 중앙 집중화에 직면하여 원래의 소비에트 사상을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1만6천 명의 선원, 노동자와 군인이 1921년 3월 1일에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반군은 볼셰비키 정부의 권력 찬탈을 비난했다. 그들은 소비에트의 비밀 투표에 의한 새로운 선거, 노동조합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들의 강령에는 '노동자와 농민, 아나키스트와 좌파 사회주의 정당에 대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에 대한 요구도 포함되었다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크론슈타트 반란을 '제3차 혁명'이라고 불렀다.

트로츠키는 무자비하게 반군을 진압했다. 트로츠키는 "쇠빗자루를 들고 소련 정부가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을 제거했다"라며 자랑했다. 사진=위키미디어

크론슈타트 반군이 혁명의 틀 내에서 일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했지만 볼셰비키 정부는 협상을 거부했다. 1월과 2월의 대규모 레닌그라드 파업 이후, 그들은 타협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1921년 3월 볼셰비키당의 10차 대회에서 반군들의 경제적 요구를 대부분 충족시키는 새로운 경제 정책이 채택되었지만 당은 반대파와의 합의를 거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론슈타트의 반군에 대한 최후통첩이 레닌과 트로츠키에 의해 내려졌다. 반란에는 아나키스트의 음모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선원들은 백군으로 취급되었다. 반군은 적군과 트로츠키의 명령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트로츠키는 '드디어 쇠빗자루를 들고 소련 정부가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을 제거했다'고 자랑했다. 

볼셰비키와 크론슈타트 선원 사이의 대결이 시작될 때 미국 아나키스트인 알렉산더 버크만과 엠마 골드만은 전쟁이나 학살이 아닌 혁명적인 해결책이 있을 수 있도록 중재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혁명에서 가장 헌신적인 전사들에 대한 군사 공격을 시작했다. 군사 학살 이후 나머지는 수용소 군도의 섬으로 추방되었다. 1921년 말 버크만은 러시아를 떠나면서 일기에 '혁명은 죽었다. 그 정신은 황무지에서 울부짖었다'라고 썼다. 

사라졌던 아나키즘, 소령 붕괴와 함께 새롭게 등장하다

스탈린의 숙청 동안 솔제니친은 굴라그 수용소에서 여러 명의 젊은 아나키스트들을 만났다. 솔제니친은 1973년에 쓴 『수용소군도』(The Gulag Archipelago)에서 당시 가장 많이 투옥된 자들은 사회주의 혁명가와 아나키스트들이었다고 썼다. 당시의 아나키스트들이 수용소에 끌려가는 장면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닥터 지바고』에도 나온다. 

크론슈타트 이후 볼셰비키가 사회 혁명의 주요 적이었음이 러시아 안팎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분명해졌다. 바쿠닌이 그토록 강력하게 예견한 결과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볼셰비키 혁명이 새로운 관료계급과 관리계급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국가자본주의의 한 형태로 전락했다는 것이었다. 

1925년 이후 소련은 어떤 아나키스트 활동도 허용하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의 생가 박물관은 폐쇄되기까지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1925년 이후 소련에서는 어떤 아나키스트 활동도 허용되지 않았다. 1938년 크로포트킨 생가 박물관은 상징적으로 폐쇄되었다. 1940년대와 50년대에 소수의 톨스토주의자가 수용소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흐루쇼프는 일부 우크라이나 마흐노주의자를 처리해야 했다. 1970년대 후반에 비밀 그룹이 저널(Perspektivy)에서 바쿠닌, 크로포트킨, 톨스토이, 콩방디트와 트로츠키, 마르쿠제 등의 글을 실어 배포했다. 그들은 소련에 반대하고 결사의 자유와 자결권을 지지했다. 국가에 대항해 무장 투쟁과 불법주의적 방법을 주장한 아나키스트 집단도 등장했다. 그러나 대부분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지도자들은 수용소에서 수년형을 선고받았다. 

고르바초프의 집권과 글라스노스트 시대 이후, 아나키즘이 갑자기 부활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라는 외침은 사라졌다. 1989-90년의 혁명에 이어, 공산주의 제국주의는 무너졌다. 1987년에는 국가가 아닌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통제하자고 주장하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들의 월간지(Obshchina)가 모스크바에서 나왔고, 1989년에는 주로 어린 학생과 교사들로 구성된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연맹(KAS)이 설립되었고 1990년에는 약 500명의 회원과 3천명의 지지자가 있었다. 그들은 아나키를 인간 자유의 최대 실현으로 보고 톨스토이와 간디가 개척한 비폭력 전통을 지지했다. 

이어 폭력적인 국가 전복을 요구하는 아나키즘 단체도 생겨났다. 분권화와 연방주의를 중심으로 한 아나키즘은 주변 공화국에서 부상하는 민족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방벽으로 제안되기도 했다. 199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노동절 퍼레이드 동안 “공산당을 체르노빌에서 살게 하라”와 “제국과 붉은 파시즘을 타도하라”는 플래카드와 함께 대규모 집단이 결국 지도부를 강단에서 떠나도록 강요했다. 

스탈린을 꿈꾸는 푸틴, 다시 아나키즘을 탄압하다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조직이 해산한 대신에 2002년 '자율행동'(Avtonomnoye deystviye, AD)이라는 새로운 아나키즘 조직이 생겨났다. "새로운 휴머니즘 문화, 사회적 자기 조직화, 그리고  군국주의와 자본주의와 성차별주의 및 파시즘에 대한 급진적 저항을 위한 전통과 기초를 만들기 위해" 직접 행동을 활용하는 ‘자율행동’은 러시아의 좌파 정당과 달리 기존 정치 체제를 정당화하지 않고 공적 정치권에 참여하는 좌파 운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의 다른 야당 운동, 특히 자유 야당이 러시아 선거를 준수하고 혁명적 행동 촉구 발표를 한 사건을 들어 야당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했다. 

‘자율행동’의 간부 알렉세이 가스카로프(1985년생)를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2011-2013년 푸틴 정권에 반대하는 러시아 시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21년에는 대통령직의 완전 폐지를 요구했고. 국가의 모든 법률을 통과시키는 집합적으로 선출된 기관, 시스템의 설립(자치활동은 러시아 연방의회를 합법적인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음), 모든 수준의 의회 및 자치 정부 기관에서 비밀 투표 금지(온라인으로 게시될 법률 및 투표용지에 투표한 대의원 명단도 포함), 유권자가 언제든지 선출된 공무원을 소환할 수 있는 새로운 절차 도입 등을 제안했다.

러시아의 한 반정부 활동가가 아자트 마프타코브의 사진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그리고 정치적 토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달성해야 할 두 가지 추가 목표로 범죄 조직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정치 경찰’의 완전한 해산과 관련법의 완전한 폐지를 제안했다. ‘자율행동’은 러시아 혁명 당시 대표를 구성원이 선출하고 선출된 소비에트, 그리고 크론슈타트에서 일어난 반 볼셰비키 봉기를 지원하며 그곳의 혁명가들을 소련의 진정한 힘의 지지자로 언급하기도 하고, 마흐노의 공화국과 스페인 내전 중의 코뮌 등을 자신들의 미래로 상정했다. 

2018년에는 아나키스트 대학생이 자살 폭탄 테러를 자행했으나, ’자율행동‘과 같은 아나키스트 단체는 테러에 반대한다느 입장을 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고 있다. 가령 2021년 초 27세의 수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아자트 미프타코프(Azat Miftakhov)는 가짜 재판을 거쳐 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밖에도 여러 아나키스트들이 박해를 받았다. 1920년대 초반에 볼셰비키에 의해 명백히 파괴된 아나키즘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잿더미에서 다시 떠올랐지만 푸틴은 스탈린을 다시 꿈꾸고 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