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배꼽 楊口는 언제쯤 ‘금강산 가는 길’ 희망의 상징될까
한반도의 배꼽 楊口는 언제쯤 ‘금강산 가는 길’ 희망의 상징될까
  •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DMZ연구팀
  • 승인 2018.04.2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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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1. 국토정중앙휘모리탑-한반도섬-양구중앙시장-해시계-‘금강산 가는 길’ 표지석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를 지구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지하에는 현재는 델포이박물관으로 옮겨진 ‘대지의 배꼽’, 옴파로스(Omphalos)가 있었다. 여기서 배꼽은 중앙의 위치뿐만 아니라 생명, 자연, 상생을 상징한다. 물론 그리스인들만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잉카 제국의 마지막 수도인 쿠스코(Cuzco/Cusco) 또한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한다. 15~16세기에 살았던 잉카인들 역시 쿠스코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어쨌든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두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자긍심은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이 돌에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한반도의 중앙, 지금은 휴전선을 머리에 이고 있는 접경지역 강원도 楊口에도 그런 곳이 있다. 

한반도의 중심 찾기, 국토정중앙점 

대한민국에는 국토의 ‘중앙’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는 지역이 몇 곳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가 ‘남한’지역의 지리적 중심지라는 것은 2005년 한국지구과학학회를 통해 발표된 적이 있다. 이에 반해 강원도 양구군은 한반도의 ‘정중앙’, ‘배꼽’이라는 의미를 내세우고 있다. 흔히 휴전선으로 한반도의 허리가 잘렸다는 이야기를 한다. 양구가 스스로를 ‘한반도의 배꼽’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이곳에 한반도의 중앙위선과 중앙경선의 교차점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보이지 않는 선이 교차하는 그 곳은 국토 정중앙점이라 불린다. 정중앙점은 양구군 남면 도촌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양구군의 동남쪽, 인제군과 경계가 맞닿아 있는 소박한 길을 따라 가면 국토정중앙천문대를 지나 ‘한반도의 배꼽’을 만날 수 있다. 

양구 국토정중앙휘모리탑. 사진 제공=통일인문학연구단 답사팀
양구 국토정중앙휘모리탑. 사진 제공=통일인문학연구단 답사팀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국토 정중앙점에 휘모리탑이 서 있다. 탁 트인 경치는 아니지만 솔가지 사이로 완만한 산 능성이가 보이고 그 아래로 펼쳐진 논들이 휘모리탑과 어울려 소박하고 고요한 정취를 만들어낸다. 반면에 휘모리탑은 마치 이곳이 주변의 작은 바람을 하나로 빨아들여 한반도에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중심지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나선형을 이루고 있다. 또 휘모리탑을 지키는 사방의 호랑이상들은 이곳이 바로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을 가진 한반도의 국토 중심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국토 정중앙점은 동쪽으로는 울릉도 동단, 서쪽으로는 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 서단, 남쪽으로는 남제주군 마라도 남단, 북쪽으로는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 북단을 기준으로 측정됐다. 한반도 동서남북의 각 극점을 기준으로 정중앙이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양구는 남쪽에서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DMZ 접경지역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고 있지만, 실상 국토의 정중앙이 놓인 곳은 바로 남북을 가르는 분단선 근처인 것이다. 

DMZ-접경지역은 남과 북이 오갈 수 없는 삼엄한 경계 지대다. 그리고 막강한 화력을 상시 준비하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남북분단의 현실을 여실히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는 이렇게 분단된 채로, 70여 년의 시간을 살아왔다. 남과 북은 세대가 두 번 이상 교체되는 긴 시간을 서로 적대적으로 지내다보니 서로 ‘남’보다 못한 존재가 돼 버린 것 같지만, 여전히 ‘남’이 될 수 없는, 그래서 ‘남’처럼 서로 무관심해 질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남북분단이 만들어 낸 경계선은 일반적인 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국경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국경선은 신분 확인과 통행 허가 등의 정해진 절차를 거치면 왕래가 가능한 경계선이다. 그러나 남과 북은 일반적으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서로의 경계를 넘어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넘어갈 수 없는 저 편의 대지를 ‘우리의 국토’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어쩌면 정중앙점은 그 자체로 분단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것은 동시에 ‘대한민국’만의 지리적 중앙점에 대한 인식을 ‘한반도’의 지리적 중앙점으로 확장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분단의 지속이 아닌 미래 통일로 시야를 확장시켜주고 남북협력의 과제를 계속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양구 한반도섬. 사진 제공=통일인문학연구단 답사팀
양구 한반도섬. 사진 제공=통일인문학연구단 답사팀
양구 한반도섬 항공사진. 사진 출처=양구군청
양구 한반도섬 항공사진. 사진 출처=양구군청
양구 한반도섬 습지. 사진 제공=통일인문학연구단 답사팀
양구 한반도섬 습지. 사진 제공=통일인문학연구단 답사팀

통일 미래를 꿈꾸는 ‘한반도섬’

양구가 한반도의 중심임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또 다른 인공적인 공간은 바로 ‘한반도섬’이다. 양구읍에서 동면과 맞닿아 있는 고대리 일대로 가면 습지 한 가운데 인공으로 만들어진 섬인 한반도섬을 만날 수 있다. 한반도섬 주위는 그야말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곳이 없는 ‘인공’의 공간이다. 

한반도섬이 만들어진 곳엔 ‘파로호 인공습지’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을 무찌르고 오랑캐를 격멸했다는 의미를 담아 화천호에서 이름을 변경한 破虜湖는 화천댐을 조성하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였다.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쪽에서는 최북단에 위치한 인공호수인 파로호의 상류는 1980년대에 ‘평화의 댐’이 건설되면서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땅도 허허벌판으로 변했다. 그렇게 裸垈地가 돼버린 이곳을 인근 주민들이 무단경작하고 이로 인한 오염과 피해가 심해지면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공습지를 만들자는 방법이 논의되었고 조성된 습지에 추가로 만들어진 것이 이 한반도섬인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만들어진 습지 생태계는 ‘자연의 정화조’ 역할을 함으로써 어떤 생태계보다 뛰어난 생산성과 순환성을 가진다. 인공습지에서는 자연습지의 원래 역할을 모방해서 습지에 서식하는 식물 군락과 미생물들의 식생환경을 인공적으로 조성한다. 물속으로 들어오는 유기물질과 화학물질은 습지에서 살아가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면서 자연스럽게 물이 정화된다. 한반도섬이 위치한 파로호 인공습지는 양구서천과 한전천이 합류하는 하류부에 저류보를 통해 물이 들어오는 습지환경을 만들었다. 

한반도섬의 입구부터 본섬까지는 기다랗게 뻗어 있는 나무 데크 길이 있다. 데크를 따라 걷다보면 이곳에 조성된 다양한 습지 생태계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습지 전체에 언제나 물이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계절과 강우량에 따라 다른 생태환경을 관찰할 수 있다. 나무 데크가 끝나는 지점에는 한반도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산과 상징물들, 그리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양구가 한반도의 정중앙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싶은 의도일까. 자연생태의 복원과 수질 정화를 위해 기획된 공간이지만, 한반도섬에는 제주도뿐만 아니라 독도와 울릉도까지 조성돼 있고 팔도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각각 설치해 뒀다.  

하지만 이곳이 한반도 모양을 한 섬이라는 것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인공습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인근 산중턱 전망대로 올라가야만 한다. 짚라인 출발점이나 전망대에 올라서면 그 때서야 왜 이곳이 ‘한반도섬’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맑은 날 한반도섬을 보고서야 인공지형 구석구석이 한반도의 지도를 그대로 옮겨 놓기 위해 조성된 것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섬 안에는 ‘양구소한민국’이라는 글자를 새긴 커다란 표지석에서 잠시 멈췄다. ‘양구소한민국’은 한반도 남쪽만을 의미할 뿐이지 않은가. 이곳이 한반도섬이라면 차라리 ‘양구소한반도’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분단이 남긴 우리의 인식체계는 한반도 전체의 평화를 그리워하면서도 여전히 남쪽 국가 중심으로만 한반도를 이해한다. 한반도 본섬에 전시되어 있는 퇴역 무기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 역시 양구가 엄연한 ‘적대적 대립의 땅’이면서 동시에 이곳이 ‘통일된 한반도의 정중앙’이라는 이율배반 자체에 대해 생각해볼 것 같다.  

양구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양구는 첩첩산중 산골의 오지라는 것이 일반적인 이미지여서, 지난날 사람과 물자가 북적거리던 양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양구는 북한강의 시작점으로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때는 水運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중부 내륙에서 모인 특산품이 이곳에 집산되었고, 상품을 실은 배는 중간기착지인 양평에서 쉬었다가 마포에서 짐을 내리고, 다시 종착지인 김포로 나아갔다. 이 고장은 그렇게 물자가 모이고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는 곳이어서 자연히 오늘날 인구 2만5천명도 안 되는 양구보다 훨씬 많은 시장들이 형성됐다. 

또한 양구는 과거에도 청정 지역으로 이름나, 각종 특산물과 한약재들이 생산됐던 곳이다. 특히 조선 중종 때인 1530년에 『동국여지승람』을 증수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양구의 특산물로 방산면의 고령토로 만든 자기와 더불어 잣, 오미자, 인삼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 특산물은 북한강 물줄기를 내려와 남한강을 거쳐 서울의 용산으로 모였다. 양구시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세기 문헌인 『동국문헌비고』에 남아 있는데, 1770년쯤에 양구읍내 5일장이 처음 생겼으며 1920년대에는 시장이 7개나 들어섰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 담긴 양구의 모습과 오늘날 양구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장터에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곳이 지금은 강원도 지자체 중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곳이 되었다. 특산물도 과거와는 달라져 지금은 양구를 대표하는 것은 봄의 곰취와 더불어 무청에 영양분이 모이도록 개량된 무에서 얻은 겨울의 시래기가 됐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경북에서 유명하던 사과는 이제 양구에서도 생산되는 대표적인 과일이다. 수운의 중심지로서 활발했던 시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양구중앙시장 안에는 매월 5일과 10일에 여전히 장이 선다. 

좌판이 즐비하고 활기가 넘치는 재래시장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현재의 중앙시장은 2007년에 현대화 리모델링 사업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시장이다. 현대화 사업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5일장이 서지 않는 평시에는 입점한 상점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장은 한적하다. 수운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양구의 시장들은 분단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쇠락할 수밖에 없었을까. 다소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중앙시장의 차분한 저녁 무렵은 분단과 전쟁이 양구에 남긴 상처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여느 고장이나 그러하듯, 이곳에도 5일장이 서는 날이면 북적대는 인파 속에 생기 넘치는 삶의 모습들이 교차하리라. 5일장 날처럼 시끌벅적하지는 않지만 양구중앙시장의 차분한 풍경은 접경지역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정체성 속에서도 청정한 자연환경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오늘날 양구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 같다.  

양구 해시계. 사진 제공=통일인문학연구단 답사팀
양구 해시계. 사진 제공=통일인문학연구단 답사팀
양구 해시계(야간). 사진 출처=양구군청
양구 해시계(야간). 사진 출처=양구군청

기억에 남기 위한 고민, ‘해시계’

양구중앙시장 상점들 사이를 관통하는 ‘걷고 싶은 거리’ 가운데엔 이색적인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큰 해시계’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는 해시계가 그것이다. 이 해시계는 10여 톤의 청동으로 만든 받침다리가 지름 4m, 높이 2m의 반구를 떠받치고 있다. 이 조형물 역시 양구 주민들이 자신들의 고장을 ‘한반도의 배꼽’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했을 것이다. 신생아의 탯줄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흉터 부위를 이르는 ‘배꼽’은 신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으니, 태양의 양기를 가득 받아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는 한반도의 중심을 꿈꾸는 양구에게 미래지향적 상징이었으리라. 양구가 접경지역으로서 계속 외지고 낙후된 곳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딛고 비상하길 원하는 고장 사람들의 소망을 가벼이 여기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해시계를 올려다보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순금 3.75kg 들어간 해시계를 보자면, 한반도의 중앙에 대한 상징적 지위를 만들어가고 싶은 양구의 고민이 엿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함 뒤로 헛웃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보도하듯이 ‘예산 낭비’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거대한 해시계와 한적한 시장 길은 썩 어울리지 못하는 풍경이었다. 

양구를 지나 ‘금강산 가는 길’

양구가 ‘한반도의 배꼽’으로 상징화되기 이전에 원래 楊口라는 이름의 유래는 꽤 구체적인 이야기로 전해진다. 조선 선조 때 새로 부임한 강원도감사가 시찰차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감사는 양구 땅에 이르러 버드나무 잎이 흐드러지게 늘어서 있는 장관을 보게 돼다. 그가 ‘버드나무가 즐비한 입구’라고 부른 데에서 유래됐다는 양구는 그렇게 한양에서 동서를 가로질러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양구를 지나는 큰 도로 교차로에 우뚝 세워진 ‘금강산 가는 길 표지석’은 바로 이와 같은 인문지리적 특성을 보여준다.

오랜 역사 동안 절경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여러 예술 작품으로 기록된 ‘금강산 가는 길’은 DMZ 접경지역에 속한 강원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곳 양구의 금강산 가는 길 표지석은 7m가 넘는 크기의 화강암 자연석으로, 표지석에서부터 내금강 장안사까지의 거리가 52km임을 알리기 위해 1996년에 세워졌다. 

남북교류가 시작되면서 이뤄진 과거의 ‘금강산관광’ 사업은 남북의 상호이해와 협력을 위한 중요한 이정표였다. 한반도에서 가장 수려하기로 이름난 금강산은 분단 이후 남쪽에서 갈 수 없는 곳이 되면서 남북통합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곳이 됐다. 금강산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이 만나는 상징적 장소이기도 했고, 그리움과 통일에 대한 염원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이제 갖게 되었다. 그리스의 옴파로스도 지금 보면 볼품없이 생긴 돌덩이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세계의 배꼽’이라는 주체적 사유의 상징으로 이해한다. 금강산 가는 길 표지석도 언젠가는 ‘한반도의 배꼽’으로서 통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양구의 상징이 될지도 모른다. 

『동의보감』에서는 탯줄을 태아라는 생명의 근원으로 묘사했는데, 이것은 탯줄이 태아와 모체를 이어주며 태아에게 지속적으로 생명 에너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양구의 ‘楊’, 즉 버드나무가 탯줄처럼 봄의 생명성을 상징하듯이, ‘한반도의 배꼽’이라는 상징엔 분단과 전쟁이 남긴 상처를 딛고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를 회복해가려는 양구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염원은 국토정중앙점 휘모리탑에서 시작해 한반도섬과 중앙시장을 거치며 한반도의 배꼽이 될 양구의 미래로 이어지며, ‘금강산 가는 길’ 표지석에서 통일로 가는 길에 대한 상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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