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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에 내린 새 볕,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찾는 민초의 삶과 예술
양구에 내린 새 볕,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찾는 민초의 삶과 예술
  •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DMZ연구팀
  • 승인 2018.05.14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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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2. 양구선사박물관-양구근현대사박물관-백자박물관-박수근미술관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 그 땅 한 가운데 양구. ‘DMZ 접경지대’, ‘최전방 군사지역’, ‘험하고 힘든 군복무지’로만 알려져 온 그곳에 냉전과 분단을 넘어 새 볕이 들고 있다. 양구 지도 이곳저곳을 채워 온 박물관과 미술관, 천문대, 한반도습지, 생태공원 등은 이제 양구의 얼굴이 되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양이 질을 만든다는 말은 양구가 그간 일구어 온 노력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2016년 기준 2만 2천 명, 시·군 단위로는 전국에서 6번째로 사람이 적은 곳이지만 끊임없이 전시관을 만들어왔다. 

양구선사박물관에는 파로호 수몰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들이 대거 전시돼 있다. 양구 선사박물관 맞은편에는 양구근현대사박물관이 함께 있는데, 2만 여점에 이르는 전시품 중 대부분이 개인 기증품이라는 것이 놀랍다. 방산면에 있는 백자박물관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백자문화에 양구가 얼마나 핵심적인 지역이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박수근미술관은 양구에서 태어나 진솔한 마음으로 서민의 삶을 그렸던 박수근 화백의 묘와 작품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건축학적으로도 아름답거니와 한국 현대 미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따로 둔 것 자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몰지역에서 건져낸 양구의 선사시대, 양구선사박물관

한반도는 예부터 살기 좋은 땅이었나 보다. 연천 전곡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구석기 유적들이 전국 200여 곳에 산재한다. 그 중 25%가 DMZ접경지역에 몰려있다. 양구 역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고 전시돼 있다. 하지만 선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구석기 유물들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사용된 지 수 만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주먹도끼에는 이 땅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양구 선사박물관 앞 재현 움집

양구군의 구석기 유물·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상무룡리와 고대리 부근에서 1987년 1월에 시작됐다. 1986년 12월, 화천 평화의 댐을 짓기 위해 파로호의 물을 뺀 곳에서 1930년대 생활상과 함께 구석기 시대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2년 반에 걸친 조사로 12만 년 전에서 2만 년 전까지 정도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먹도끼, 긁개, 찍개 등  6,4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발굴됐다. 

‘평화의 댐’ 건설은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북한의 위협을 거짓되게 부풀려 만들어 냈던 여러 일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모인 661억 원의 성금 중 639억 원을 부어 댐을 만들었지만,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것이라던 북한의 금강산댐은 첫 삽도 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감추어진 역사의 흔적이 땅 위로 드러난 계기가 됐다. 퇴수를 마친 파로호 수몰지역에서 예상도 못했던 구석기 유물·유적이 쏟아진 것이다.

파로호가 만들어진 것은 일제강점기의 끝 무렵인 1944년이다. 이 땅을 대륙 공격의 병참기지로 만들려 했던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해 화천댐과 화천수력발전소를 세웠다. 화천과 양구 일대 20여 개의 마을이 있던 38.88㎢의 땅이 파로호의 물 아래 잠긴 것은 이 때다. 그런데 그 때 물속에 잠겨 버린 역사의 현장을 다시 세상 밖으로 드러낸 계기가 다름 아닌 분단의 적대성을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한 군부독재의 권력욕이었다니. 

파로호에는 다시 물이 채워졌다. 옮겨진 유물들은 1997년 세워진 양구 선사박물관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 줄 사람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12만 년 동안 땅 속에 있던 것도 모자라 50년 더 물 속에 있었으니 지상의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까. 

양구 선사박물관 앞 옮겨둔 고인돌들

처음에는 異口 지금은 同聲,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양구 선사박물관 맞은편에는 2014년 문을 연 근현대사박물관이 있다. 약 720㎡ 규모의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은 약 24억 원을 들여 지은 양구군의 대표 전시시설 중 하나이다. 1만 4천여 점의 기증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2개의 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에 우표, 엽서, 북한화폐, 그림, 도자기, 영화포스터, 전단지, 잡지 창간호, 서적, 농기계, 소품 등의 전시품들이 가득 차 있다.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전시품1

양구가 근현대사박물관을 지으려 했던 배경은 2012년, 강원대 명예교수였던 박민일 교수가 자신의 소장품 약 1만여 점을 양구군에 기증하겠다고 하면서부터였다. 여기에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으로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던 명예 양구군민 송광호씨가 북한화폐 등을 더 기증해왔다. 그래서 한 때 ‘몇 사람의 기증품을 전시하자고 군립으로 박물관을 짓느냐’는 비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사실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에 처음 들어가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좋게 말하면 소박한데, 조선시대 백자 같은 것들이 있는가하면 우표나 영화포스터, 잡지, 엽서들이 있고, 또 한 편에는 농기계나 소품들도 있다. 간단하게 이름만 붙어 있는 것들도 있고, 이름도 아직 안 붙여 둔 것들도 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것도 있고,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도 있다. 나는 이게 무엇이지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는 “와 이거 여기서 보네”하는 탄성이 들린다. 

양구 근현대사박물관 전시품2

상세히 설명을 붙이고 보기 좋게 배치하는 것은 앞으로 계속 해 나갈 일들이다. 이제 더 이상 근현대사박물관에 대한 의심은 불필요해 보인다. 분명 처음에는 제기할 만한 문제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질적 변화를 가져올 양적 축적은 이뤄진 듯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기증을 해 온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보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취지에 공감하여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벌써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을 둘러보고 1000여 점에 이르는 소장품을 기증했다. 사람들의 기증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의 땀으로 캐고 빚은 백토와 백자, 양구 백자박물관

이제 양구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박물관, 백자박물관으로 가보자. 양구 선사박물관과 양구 근현대사박물관이 함께 있는 양구읍에서 서쪽으로 갈라진 길을 따라 굽은 능선을 넘어 올라오면, 백자문화의 중심 방산면과 백자박물관에 닿는다.

백자박물관 전경

백자박물관은 지상 2층으로 지어져 있으며, 전시 관람과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특히 전시실 뒤에 재현된 가마터는 예상보다 크고 인상적이다. 전시실에서는 발굴된 자기와 함께 현존하는 명장들의 작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는 물론 백자를 빚는 과정과 도구에 대해서도 상세히 볼 수 있다. 백미는 도자체험. 약간의 체험료를 내지만, 그 과정과 결과를 생각하면 전혀 아깝지 않다.

 

백자박물관 내부

백토와 백자는 양구가 가진 역사적 정체성의 한 면을 장식한다. 고려시대가 청자라면 조선시대는 백자. 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백토가 필요하고, 방산면에는 좋은 백토가 가득했다. 방산면이 백자와 백토의 주요 생산지였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1432년 만들어진 세종실록 지리지와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양구의 자기소에 대한 기록이 있고, 숙종실록영조실록, 속대전 등에서도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방산면에서만 40여 곳의 가마터가 발견됐는데, 이들은 1950년대까지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58년 창립한 방산성결교회자리에서 발견된 항아리에 ‘양구군방산면예배기념’이라고 새겨져 있었던 것이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그 시작은 언제일까. 1932년, 금강산 월출봉에서 방화선 공사를 하던 인부들은 돌로 만들어진 궤짝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이른바 ‘이성계 발원 사리 갖춤’이 튀어나왔다. 사리 갖춤 속 백자에 새겨진 글귀에 따르면 사리를 봉안한 발원 행사에 참여한 인원은 만 여 명, 때는 조선 개국 한 해 전인 1391년이다. 

하나 더 유심히 볼 것이 있다. ‘방산 자기장 沈龍’이라는 제작자의 낙인이다. 심용은 누구인가. 심용이라는 이름은 조선 개국공신 중 한 명인 전리랑장 심용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함께 발굴된 사리기에 기록된 박자청도 중랑장으로 개국공신으로 추서된 것을 보면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일 이러한 추정이 맞다면 그는 1388년 고려의 요동출정 당시 曺敏修의 휘하에서 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을 도왔던 沈德符의 아버지다. 또한 심덕부는 태조의 부마 沈淙과 세종의 국구 沈溫의 아버지이다. 

개국 한 해 전 이성계와 함께 한 사람으로서 사리구에 이름을 올린 심용과 그 3년 전 위화도 회군의 중추 중 한 명이었던 심덕부의 아버지 심용. 분명한 것은 심용이 방산면의 자기장으로, 1391년 이성계가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드린 佛事의 백자 사리구를 만들고 같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고려 말 이미 방산면에서 백자와 백토를 생산했고, 백자를 만들었던 자기장의 지위가 결코 낮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질의 백토 매장지라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 숙종 35년이었던 1709년, 양구의 백토채굴이 주민을 너무 괴롭히므로 생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말이 있었다. 게다가 북한강 수운기점까지 백토를 일일이 져 나르고, 운송에 드는 부대비용까지 주민들이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궁궐의 그릇제작을 담당하는 사옹원에서 양구백토를 고집했다는 기록이 있고, 영조 대에도 두 번이나 백성들을 달래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백토채굴로 인한 양구 주민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예술은 늘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 박수근미술관

백자박물관에 전시된 백자 조각에 함께 이겨진 땀이 보인다. 지금도 여전히 서민의 삶은 녹록치 않다. 권력에 치이고 자본에 치이면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우리를, 그래서 옛 표현에는 풀 ‘초’자를 붙여 民草라 했나보다. 투박하달까 소박하달까, 박수근 화백의 그림 속 우리는 딱 그런 모습이다. 양구 박물관과 미술관 탐방의 마지막은 한국의 고흐라 불렸던 박수근의 자취를 모은 박수근 미술관이다.

아내와 딸과 함께 있는 박수근 (사진 출처=박수근미술관)

누구나 한 번쯤, 투박하게 문댄 듯이 칠해진, 굵은 선으로 그려진 그의 그림을 본 적 있을 것이다. 그는 곧잘 한국의 반 고흐에 빗대어진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그의 삶이 그랬고, 그럼에도 지지 않고 그려대었던 그의 열정이 그랬고, 쌀 한 되 감자 몇 알에 팔았던 그림들이 그의 사후 비싼 값에 팔리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일본 유학생이 즐비했던 당시 박수근은, 국내파로서 혼자 공부한 그림으로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다. 그의 나이 18살 때였다. 어릴 때 그는 유복한 편이었다. 그러나 곧 어머니의 병과 죽음, 가난한 살림살이, 빚더미 속에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까지 겪으며 그의 힘든 삶이 시작됐다. 가난은 거의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와 그의 가족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의 두텁고 소박한 붓질 안에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의 선함을 믿었던 진실한 마음이 배어있다. 박수근 미술관 건물도 그러하다. 무릎을 걸쳐 앉아 멀리 바라보는 박수근 화백의 동상에서도 담담하고 애틋한 그의 성품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 그를 기려, 양구군은 박수근 미술관을 계획했다. 개관했던 2002년에는 진본 그림 한 장 없었다. 그러나 차츰 그를 기린 이들의 후원과 기증이 이어졌고, 현재는 200여 점의 작품과 자료들이 소장, 전시돼 있다. 규모도 커졌다. 이제는 박수근미술관, 현대미술관, 박수근파빌리온으로 구성된 세 개의 건물로 확장돼 관람객을 맞이한다. 세 건물은 배치와 구성도 훌륭하고, 연결도 잘 짜여있어서 전체가 또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2004년에는 경기도 포천의 동신교회 묘지에서 그의 묘도 옮겨왔다. 

양구에 드는 새 볕

한 때, 양구군을 찾던 관광객의 대부분은 이 땅의 비극적 전쟁과 분단의 현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을지전망대에 자욱한 안개가 걷히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움푹한 펀치볼이 한 눈에 보인다. 장관이다. 하지만 그 안에 쏟아졌던 많은 포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양구군이 자랑하는 천혜의 두타연을 비롯해 구석구석 세워져 있는 위령탑과 충혼탑과 전적비들은 그 때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격전이 벌어졌었는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이것은 분명 양구의, 아니 이 땅의 아픈 현대사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양구를, DMZ 접경지역 전체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양구에 새 볕이 들고 있다. 아니, DMZ 접경지역에는 새 볕이 내린지 이미 오래 됐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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