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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비가 기록한 전쟁, 비(碑)가 기억하지 못한 전쟁
전적비가 기록한 전쟁, 비(碑)가 기억하지 못한 전쟁
  •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DMZ연구팀
  • 승인 2018.04.0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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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9.현리전투전적비–현리전투위령비-38대교–리빙스턴교-매봉한석산전적비-백골병단전적비

인제로 가는 길

사방이 1,000m 이상의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인제(麟蹄)에선 어디를 가도 웅장한 산악 지형이 보인다. 산등성 너머의 번다함을 막아주고 뭇 생명이 살아가는 자연적 경계를 이루던 그 울타리는 소양강 지류 인근의 산골 마을들을 감싸 주었다. 그런데 해방 직후 ‘38선’이 그어지자 인제의 한적한 마을은 갑자기 첨예한 ‘접경지역’이 되었다.

인제에 살던 어느 학도병이 증언하길, 안방은 이북에 사랑방은 이남에 속했다고 한다. 낮에는 국군 눈치 보고 밤에는 북한군 눈치 보며 전쟁 전까지 숨죽인 채 살았는데, 어느 날 ‘난리’가 터졌다. 1년 후 함께 뛰어다니던 뒷산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쟁터가 되었고 동무들은 거기에 던져졌다. 그 든든하던 산봉우리들은 피아(彼我)가 수십만 명의 목숨을 바치고 수백만 발의 포탄을 날려서라도 확보해야 할 ‘고지’와 ‘진지’가 되었다. 그리고 휴전 이후 그 고지들의 능선은 다시, 긴 철책선이 되었다.

전쟁 전 북쪽 땅이었던 인제군의 북부는 그렇게 수복(收復)되었고 오늘날 인제군은 국내 군 단위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갖게 되었다. 산과 땅을 되찾긴 했는데 그것을 위해 영영 잃어버린 것들과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간 것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동부전선에서 군복무를 했던 사람이 아니라도, 인제의 산간(山間)이 자랑하는 육중한 초록 물결을 바라볼 때 감탄에 더해 탄식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저 푸르른 산의 풍경 어딘가는 처절한 격전지였고 그 속에서 남쪽 사람, 북쪽 사람, 중국 사람, 미국 사람 할 것 없이 새파란 젊음들이 쓰러졌으리라. 그리고 저 산의 나무들은 초토(焦土) 위에서 악을 쓰며 버텼던 뭇 생명들의 켜켜이 쌓인 흔적이라면, 산은 보이는 그대로의 산일 수가 없으리라.

한국전쟁 전적비를 찾아서

인제군 기린면 ‘현리(縣里)’. 이 평범한 마을 이름은 전국 여러 곳에 있지만, 인제에서 벌어진 전쟁을 떠올릴 때 꼭 등장하는 곳이다. 먼저 ‘현리전투전적비’가 서 있는 ‘오미재’로 차를 몰았다. ‘오마치’라고도 불렀던 이곳은 방태산을 크게 둘러싸는 주요 고갯길들 중 하나로 주변에 오미자가 많았다고 한다. 해발 500m의 시야가 탁 트인 이 언덕은 1951년 중국군 ‘제2차 춘계 공세’ 당시 국군 3군단의 방어 요충지이자 퇴로였다.

▲오미재 고개의 현리전투전적비   사진 제공=DMZ 연구팀
▲오미재 고개의 현리전투전적비 사진 제공=DMZ 연구팀

당시 중국군은 예상을 깨고 국군 5사단과 7사단 작전 지역 사이를 뚫고 밤새 엄청난 행군 속도로 일부 부대가 오미재와 5km 후방의 집결지였던 ‘침교’ 일대까지 확보하며 국군의 퇴로를 막았다. 속초와 원통을 잇는 긴 전선(戰線)에서부터 종심 50km를 돌파 당하자, 국군 3군단 예하 3·9사단의 병사들을 옥죈 것은 적의 총탄이 아니라 앞뒤로 갇혔다는 공포감이었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부대 진영은 와해되었다.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방태산 방향으로 산개했다. 인근의 내린천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북쪽으로 흐르는 하천인 것을 몰랐던 여러 무리의 병사들은 천변을 따라 후퇴하려고 하다가 북한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그 중 일부는 북한군으로 차출되어 전우에게 총을 겨누어야 했다. 67년 전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미재 정상부에 도착하니 한적한 길가에 넓적한 비석이 덩그러니 서 있다. “이 전투의 패배를 교훈으로 삼고 당시 이름 없이 몸 바친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고자” 인근 부대에서 세운 비(碑)이다. ‘전쟁의 경과·결과·자취 등을 기록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려는 목적에서’ 아군의 무훈(武勳)을 기념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적비라면 이 비석은 오늘날 무엇을 전하고 있을까.

1951년 5월 현리전투에 대한 기록 혹은 기억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7일간 계속된 중국군의 6번째이자 마지막 대규모 공세 중 일어났다. 북한군 5군단 예하 3개 사단과 중국군 9병단 예하 6개 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진지를 구축한 국군·미군 작전 지역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국군 3군단은 동해안에서 설악산 지구를 맡은 제1군단과 인제 서쪽과 양구 지구를 맡은 미군 제10군단 사이 작전 지역을 할당 받았다. 3군단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오미재에 부대를 파견하여 첫 번째 후퇴 집결지인 현리에 이어 필요할지도 모를 2차 퇴로를 미리 확보하려고 했지만, 미군 제10군단장 알몬드(Edward E. Almond)는 그곳은 자신들의 관할이라며 이를 거부했으며 추가 병력을 파견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뚫려 버린 오미재와 침교는 아군의 후방에서 그들을 겨누는 ‘칼’이 되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3군단은 현리에 모였지만 사단과 군단의 지휘부는 이 사태를 적극적으로 수습하지 못했고, 헬기를 다시 타고 군단사령부가 있는 70km 후방의 평창 하진부리로 돌아가는 군단장을 보며 병사들은 마지막 전의(戰意)마저 상실했다. 식량 없이 흩어진 병사들은 중장비와 중화기를 버리거나 숨기며 무작정 후퇴했으며, 포로로 잡힐 것을 두려워 해 스스로 계급장도 떼버리는 장교들 틈으로 소총과 실탄까지 버리는 병사들도 보였다. 중국군의 감시를 피해 인적이 드문 산 중턱을 돌아 걸으며 퇴각했던 병사들은 곳곳에 널린 시체를 보며 삶의 의지를 되새겼다. 겨우 며칠 만에 하진부리에 살아서 도착한 패잔병들은 자신들을 마치 ‘마라톤 골인 지점에 도착한 선수들처럼 박수로 맞이하는 지휘관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3군단은 패퇴한 부대를 재수습했지만 병력의 30%, 장비의 70%가 사라진 뒤였다.

당시 서른 살의 군단장 유재흥은 개전 당시 양주와 의정부 지역을 방어했던 7사단장으로서 사단이 궤멸되는 처참한 패배를 겪었지만 2군단장으로 승진했고, 연이은 패배로 2군단이 해체되는데 책임이 있었지만 또 다시 신임되어 3군단장을 맡은 상황이었다. 그는 여전히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던 탓에 늘 통역병을 대동했다고 전해진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천황폐하’를 보위하는 충직한 ‘황군’이 되기 위해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이 자신의 회고록에 남긴 유재흥 중장과의 대화, 즉 ‘병력과 장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대답은 지금도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런 내력을 가진 사람이 이후 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을 역임하고, 55년 후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전작권)’ 환수에 ‘결사반대’하는 예비역 장군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역사의 아이러니하다고 해야 할까.

한편, 전쟁 전 군부 내에 있던 남로당 조직을 모두 자백한 후 목숨을 부지한 채 퇴역했다가, 전쟁을 통해 다시 군인이 된 박정희 중령은 당시 최전방 9사단 참모장이었다. 5월 16일 전투가 시작되기 며칠 전 병가를 내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갔다고 하는 그는 정확히 10년 후, 육군 소장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한다. 당시 현리전투에서 전사·실종·포로가 된 장병은 19,000여 명이라고 한다. 당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던 조창호 소위는 1994년 43년 만에 극적으로 귀환하여 전사자 비석에 적힌 이름을 스스로 지웠다. 그리고 당시 지휘관들에게 ‘왜 그랬냐’고 묻고 싶다고 말했다. 돌에 새겨지고 책에 찍힌 역사는 단출한데 현리전투를 직접 겪고 자신의 경험을 소상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현리에서 시작된 한국전쟁의 제4막

‘현리전투’ 이후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흔히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오해되는 자신들의 특기, 즉 38선 인근까지 내려오며 효과적이었던 ‘대규모 기동포위전’이 더 이상 미군의 강한 화력과 물량공세를 뚫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1.4후퇴’를 겪은 유엔군도 1951년 봄부터는 현재의 휴전선 인근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처럼 현리전투는 이후의 전황이 38선 인근에서 교착 상태에 머무르게 되는 분기점이 되었다. 늦여름의 ‘인천상륙작전’이 한국전쟁 흐름에서 제2막의 서장이었고, 늦가을에 시작된 ‘중국군 개입’이 전쟁의 판도를 다시 바꾼 제3막의 전주곡이었다면, 현리전투는 지루한 정전회담과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반복되는 전쟁 후반부로 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현리전투는 환수되지 않는 전작권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나 국군의 불완전한 군사적 자율성을 설명할 때 꼭 등장하는 ‘치욕’으로 기억된다. 물론 그 패배는 지휘부의 무능과 무책임뿐만 아니라 허약한 국군을 파고든 중국군의 과감한 전술과 국군-미군의 일원화되지 않은 통제체계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25,000명 병력의 국군 3군단 자체가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국군의 독자적인 지휘권은 미8군에 완전히 귀속되어 ‘불가역적’인 것이 되었다.

▲현리전투위령비   사진 제공=DMZ 연구팀
▲현리전투위령비 사진 제공=DMZ 연구팀

오미재 고개를 내려와 상남면 하남리로 들어가면 ‘현리전투위령비’가 있다. 마을 뒤 언덕에 조성된 이것은 현리전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유일한 비이다. ‘오마치의 한(恨)’이라고 불리는 패전의 역사를 적대감을 최대한 증폭시키는 계기로 삼는 비문(碑文)의 주어는 늘 추상적인 군대인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고통과 시련의 역사가 부끄럽고 수치스럽다하여 숨기려 하기 보다는 이를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아 우리조국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어떤 적의 도발도 반드시 격퇴할 수 있는 군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합니다.” 이렇게 계속 다짐하며 북한에 비해 30배나 많은 국방비를 쓰면서도 여전히 우리 군은 ‘자주국방’을 실현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슨 영문일까?

언덕을 내려오며 불특정한 군인이 아닌 존재가 주체가 되는 위령비문을 쓸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비 뒷면엔 ‘적군섬멸’을 결의하는 ‘통한의 결의’가 조악한 문장과 글씨로 새겨져 있다. 산화한 전사들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위무하거나 전쟁 자체를 성찰하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제대로 애도 받지 못한 영령들은 역사의 무대에 다시 비극적으로 귀환할 것이다. 전후 65년이 지난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이름으로, 평화를 꿈꾸는 청소년의 이름으로, 그리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는 인류의 이름으로 학살된 민간인을 포함한 모든 전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그 영혼을 위로할 수는 없을까.

38대교와 리빙스턴교를 건너 

다시 31번 국도를 타고 북상하는 길에 웅장한 소양호의 풍경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잔물결에 부서지며 찬란하게 굴절되는 햇살은 언제나 사람의 기분을 풀어준다. 그런 풍경에 취해 있을 때쯤 소양강이 소양호와 만나는 지점에서 큰 현수교가 보인다.

▲인제38대교   사진 제공=DMZ 연구팀
▲인제38대교 사진 제공=DMZ 연구팀

‘인제38대교’의 반대편 끝엔 화단과 돌로 만든 ‘38’이라는 큰 숫자 위에 거대한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인제의 ‘랜드마크’를 이것으로 삼으려고 했을까. 수직으로 높게 뻗은 국기게양대와 수평으로 흘러가는 소양강이 대조를 이룬다. 돌이켜보면 굴곡진 한반도현대사의 고비마다 민중이 눈물을 흘리며 의지했던 태극기는 내려다보며 위압하는 태극기가 아니었다. 과연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유의미한 경계도 아니며 우리의 주체적 의지와는 상관없었던 ‘38’이라는 역사적 숫자에, 또한 그것이 가리키는 투철한 ‘안보’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인제의 지리, 풍광, 사람들에 감탄하며 고장 여기저기를 쏘다니던 어느 과객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생각이다.

“현 세대는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이지만, 우리의 역사에 분명히 존재하고 현존하는 상황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38선길’ 조형물의 비석에 새겨진 건립 취지문 중 한 구절이다. 그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역사 서술이 그러하듯이 한반도의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인제군청을 지나 북상하다 보면 인북천에 놓인 다리 하나가 또 눈에 띈다. 급히 길가에 차를 세울 만큼 특별한 풍경이 있거나 관광지도 아니지만 풍기는 분위기

▲복원된 리빙스턴교의 정면   사진 제공=DMZ 연구팀
▲복원된 리빙스턴교의 정면 사진 제공=DMZ 연구팀

가 범상치 않다. 옛 다리를 복원해 놓은 듯한 빨간 인도교와 잔뜩 긴장하며 주변을 경계하는 실물 크기의 미군 병사들 동상이 서 있다. ‘리빙스턴교’다.

1951년 6월 10일 리빙스턴 중령이 이끌던 미군 포병부대는 북한군의 맹공격을 받고 기린면으로 후퇴하다가 홍수가 나서 급류가 흐르던 인북천 앞에서 멈추게 된다. 강을 건널 방법이 없어 지체하던 중 적의 기습을 받은 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중상을 입은 리빙스턴 대위는 작은 다리만 있었어도 부하들이 죽지 않았을 거라며 ‘이곳에 다리를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1957년 2월, 그의 부인은 사재를 털어 합강리와 덕산리를 연결하는 길이 150m, 폭 3.6m의 목재 교량을 건설했다. ‘빨간 다리’로 불렸던 리빙스턴교의 원형은 오래 가지 못했지만 지역 주민들은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2015년 이 다리를 조형물과 함께 복원했다.
 
백골의 ‘맹세’와 전쟁고아를 위한 ‘약속’

인제군청을 지나 44번 국도와 31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매봉한석산전적비’가 있다. 1951년 5월 7일 동부전선에서는 ‘중국군 5차 공세’ 이후 ‘미주리 선’으로 명명된 춘천-인제-미시령-속초를 회복하기 위한 반격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당시 한석산(1,100m)은 인제의 중심부를 되찾기 위한 중요한 고지로 ‘매봉(1,066m)’은 북한군이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주요 봉우리였다. 9사단 30연대는 한석산을 공격하여 고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이루었는데, 비에는 “895명의 적을 사살하고 42명을 생포하고 무기를 노획한” 전공이 이 비를 건립한 이유라고 새겨져 있다. 참전용사들은 한석산을 점령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전우들과 함께 ‘대한민국 만세’를 목 놓아 부르던 ‘그 날의 감격’을 생생히 기억한다고 증언한다. 험준한 산악지대인 이곳에선 이따금씩 중국군, 북한군, 국군의 유해가 발견된다.

인제군과 고성군의 경계 인근 북면 용대3리 마을회관 옆에도 역시나 수직으로 뻗은 ‘백골병단전적비’가 날카롭게 서 있다. 이 비는 한국전쟁 최초의 유격대로 기록된 ‘백골병단’ 817명 대원들의 전과와 364명에 이르는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1990년에 조성되었다. 높이 16m의 흰색 비석으로 세워진 이 전적비는 정규군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색적인데, 옆에는 건립취지비, 형성비, 무명용사추모비가 함께 서 있다.

당시 채명신 중령이 이끄는 백골병단은 육군본부가 1.4후퇴 후 북한군에 대한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임시군번을 부여하고 급히 훈련시킨 보충대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학도병, 낙오병, 경찰에서부터 ‘애국자’로 기록된 다양한 민간인들이었지만 백골병단은 1월부터 3월말까지 인민군으로 위장하여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백골병단은 후퇴 중 설악산에서 보급로가 차단되어 아사나 동사로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고 겨우 귀환하게 된다. 그 후 2010년 6월 25일, 당시 급박한 전황과 열악한 사정으로 해산했던 생존자 26명은 계룡대 연병장에서 60년만에 ‘전역신고’를 했다. 한 때는 정식 군번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국가를 많이도 원망했던 노병들의 주름진 눈가가 젖어들었다.

▲백골병단전적비   사진 제공=DMZ 연구팀
▲백골병단전적비 사진 제공=DMZ 연구팀

‘서북청년단’이 주축이 되었던 제3사단의 부대 별칭이자 경례구호로도 들을 수 있는 ‘백골(白骨)’은 백골이 되어서라도 적을 격멸하겠다는 전투 의지를 담은 말이었다. 기밀정보 획득을 위한 유격전이라는 특별임무를 부여 받은 백골병단도 ‘반공’을 강조하기 위해 섬뜩한 해골 이미지를 상징으로 삼았다. 전적비 입구에 걸린 현수막의 붉은 글씨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더 선명하게 보였다. “경계하자 북괴의 남침야욕 강력히 응징하자!” 목적어를 공유하는 뒤엉킨 두 문장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당시 지휘관 채명신의 덕망과 관련된 일화 중 되새겨볼 만한 게 있다. 3월 18일 ‘필례마을’ 인근에서 백골병단은 북한군 간부 13명을 생포하고 ‘귀순’을 권유했다. 이에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 길원팔 중장은 그것을 거부하며 명예롭게 죽고 싶으니 두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청했다.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자기 부대를 따라다니는 10살짜리 전쟁고아를 양자로 거두어 달라는 것이었다. 채명신은 부탁을 모두 들어주리라 약속했고 권총에 실탄 하나를 넣어 건네고 방을 나왔다. 한 발의 총성 뒤로 그는 ‘빨갱이 아이’를 찾아 보호자를 자처했고, 미혼이었지만 전쟁 후 자신의 동생으로 입적했다. 채명신의 보살핌 속에서 훗날 그 동생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교수로 활동했다. 이것은 정전협정 ‘체결’ 시간과 ‘발효’ 시간 사이의 마지막까지도 처절하게 벌어졌다는 고지전이나 숱한 민간인 학살처럼 서글픈 이야기가 많은 한국전쟁사에서 흔치 않게 인간애가 느껴지는 ‘부탁’과 ‘약속’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쪽끼리 서로 죽이고 죽였던 전투들은 크고 작은 돌에 새겨졌다. 적혀진 기록은 묻혀있던 다른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새로운 기억은 굳어진 기록을 보완한다. 전국의 ‘독립운동’ 현충시설은 900여 개이고, ‘국가수호’ 현충시설은 1,100여 개인데 그 중 90% 이상이 군부대에서 관리하는 비탑 형태이다. 이러한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과 기억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준비해야 할까. 전쟁이 남긴 적대적 ‘분단체제’ 속에서 남북화해를 모색하고 한반도 통일의 미래를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구의 이름이며 어떤 가치일까. 우리는 기록된 전쟁을 다시 기억하는 것과 더불어 기록되지 못한 이면의 기억을 어떻게 함께 읽어나갈 수 있을까. 돌아오는 길에 가슴 한쪽이 쩌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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