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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상흔 가득한 '작은 한반도'에 평화의 길이 숨 쉬기 시작했다
전쟁 상흔 가득한 '작은 한반도'에 평화의 길이 숨 쉬기 시작했다
  • 교수신문
  • 승인 2018.02.08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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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4. 강원도 고성군(전쟁체험관-통일전망대-명파리-화진포-당포함전적비-합축교)

우리는 분단국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그 분단된‘작은 한반도’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고성이다.1945년 8·15 해방 당시 38선 이북에 속했던 고성군은 그 전역이북에 편입됐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군사분계선과 함께 고성군은‘작은 한반도’처럼 남과 북으로 나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최북단 중 하나인 고성을 찾는 이들에게 이곳이 주로 보여준 것은‘안보’였다. 그‘안보’는 전쟁의 상흔을 되새기고 망원경 속 저 너머를 손가락질하며 우리의‘적’을 각인시키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반공, 안보’마치 그것만이 우리의 길인 것처럼.

하지만 이제 이곳 고성에는 반공을 위한 안보와 공존 사이에‘평화’의 길이 숨 쉬고 있다. 마치 5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걷듯이, 전쟁기념관과 통일전망대 등 전쟁의 상흔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해 남북이 함께 만든 교량인 ‘합축교’까지,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엄혹한 시대에 고성에 살아 숨 쉬는‘평화’의 길을 걸어본다.

 

전쟁의 포화속으로‘, 6·25전쟁기념관’

고성군 최북단인 현내면에는 통일전망대가 있다. 출입신고서를 작성하고서야 입장이 가능한 통일전망대에는, 그 입구인 주차장부터 전쟁 관련 전시물들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주차장 왼쪽편에는 6·25전쟁체험전시관이 있다. 입구에 서서 바라본 ‘6·25’부분만 붉은 전시관 명패는 많은 피를 흘렸던 전쟁을 상기시켰다.
이곳을 찾는 대다수는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세대들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들에게 1세대들의 공포를 전이시키고 있는 듯 보였다. 체험관으로 들어서자마자 고막을 울리는 총탄 소리는 순식간에 이곳에 들어서는 이들을 전쟁의 공간으로 몰아넣었다. 좁은 복도를 따라 벽에 쭉 도배된 전쟁 당시의 흑백 사진들, 그리고 총과 군수용품들…. 마치 전쟁의 현장으로 들어와 있는 듯 했다. 휴전 이후 60여 년이 넘게 흘렀지만 지금도 이 전쟁은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 반공이데올로기의 촉수를 들이대고 있었다. 탈냉전과 함께 반공 또한 이제는 낡은 역사의 유물이 됐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현재적인 것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통일전망대, 분단을 조망하다

체험관을 나서 통일전망대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우리나라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국가임을 환기시키는 모습들을 볼수 있었다. 공군의 폭격과 함포사격이 난무했던 치열한 전투로 인해 366m이던 산의 높이가 351m로 변했다는 것을 기리는 351고지 전투 전적비, 전쟁에서 사용된 전투기 등 전쟁을 기억하는 것들뿐 아니라,‘ 대한민국 마지막 커피전문점’이라는 최북단임을 실감하게 해주는 커피숍까지. 이곳은 분단의 현장을 전쟁의 기억 속에서 재현하고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다의 모습이다. 하지만 남북 모두를 망라해 그저 바다를 봤을 때 보는 이의 눈을 시리게 만드는 그 푸르름은, 오히려‘아, 우리는 정말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구나’라고 하는 현실에 대한 가슴 아픈 고통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보이지 않는 경계 너머의 이북은, 군인의 설명에 의해서‘분단’의 철저한 대립성만을 주지시키는 존재로 상기됐다.
전망대에서 바다가 보이는 방향과 반대로 가자, 크게‘통일’이라는 글자가 조경돼 있는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저 북쪽 너머로는 철책선과 멀리 해금강까지 수려한 경관이 펼쳐져 있었다. 전쟁 이후 철책선과 그 너머 이북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있어서 낯설고 두려운‘적’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저 철책 너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 너머에도 그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있을 뿐이겠구나’하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져 가슴이 저미었다.
철책 너머 보이는 바닷가에는 연접한 호수도 보였다. ‘감호’라는 이름의 그 호수는‘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라 한다. 이 익숙한 동화가 이전에 함께 공유했던 기억으로부터 전해져 온 것처럼, 피 흘릴‘적’은 저 철책 너머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분단의 그림자가 내려앉은 최북단 마을, 명파리
7번국도로 동해대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농토의 80%가 아직도 민간인출입통제선 내에 포함돼 있는 남쪽의 최북단 마을에 다다른다. 바로 분단의 현실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명파리 마을이다. 명파리 마을은 한반도의 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분단으로인해 남북의 경계에 위치한 지역이 됐다. 동해의 맑은 물과 백사장을 낀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明波里’로 불리는 이곳은, 금강산 관광으로 한때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으나 관광이 중단된 이후 경기가 크게 위축돼 지금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마을을 걷고 있노라면 곳곳에 대추나무들이 보였다. 탐스럽게 대추가 열려있을 때 즈음, 인적이 드문 그 길가를 지나며 대추나무의 주인인 노파가 대추를 따 가라며 말을 건넨다. 쭉 늘어선 음식점들은 곳곳이 문을 닫았고, 영업을 하는 식당주인은 낯선 이들을 반긴다. 반갑게 시골 인심을 베푼다. 드문 인적에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았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사람 냄새를 풍겼다. 분단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썰렁함을 그렇게 메우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황량한 길가, 줄지어 늘어선 문을 닫은 식당 간판들, 누구도 따가지 않는 탐스런 대추나무들, 그리고 그곳을 채우는 인심좋은 사람들…. 명파리, 이 마을 전체가 분단의 그림자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었다. 명파리의 황량함이 분단을 실감하게 했다면, 다음으로 가 볼 화진포는 그 아름다움이 어느 곳보다도 분단을 실감하게 한다.

분단 주역들을 품은 석호, 화진포

그대로 7번 국도를 따라 금강산로를 지나 내려오면 바다가 땅의 품에 안긴 潟湖, 花津浦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석호인 이곳 화진포에는 그 아름다움의 偉名을 증명하듯이 한국전쟁 당시 남북의 수장이었던 이승만, 이기붕, 김일성의 별장이 있다. 화진포는 바라보는 누구에게나 아름다움을 선사했으나, 이곳 별장의 주인들에게는 그저 모래 둑에 갇힌 바닷물일 뿐이었는지, 그들은 이 아름다운 석호를 바라보며 마음의 둑을 쌓는 지배를 꿈꿨나 보다. 그래서 그들은 저 석호만큼 많은 피를 흘리는 무서운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큰 파문이 일게 한 석호의 물결은 그저 잔잔하기만 하다.

세 별장 중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이기붕 별장이다. 일제 강점기의 중반인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것을 1953년 휴전이후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했다. 다음으로 지어진 화진포의 성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세워졌다.중일전쟁을 준비하던 일제가 비행장을 지으려고 원산의 선교사들을 이리로 쫓아냈다. 히틀러를 피해 망명 온 독일인 베버(H.Weber)가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을 위해 2층짜리 성을 쌓은 것이 바로 화진포의 성이다. 38선이 그어지고 화진포는 북쪽에 포함됐고, 1948년 여름에는 김일성의 가족이 머물렀다. 그로 인해 김일성 별장으로 불린다. 아주 잠시 머물다간 김일성의 이름은 화진포의 성을 점령해 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휴전선이 다시 그어지자 화진포는 남쪽에 속하게 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 마지막으로 이승만 별장이 세워졌다. 시간이 흘러 별장의 주인들이 떠나고도, 이 세 별장은 여전히‘안보’라는 이름에 묶인 채 화진포를 분단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1998년, 금강산으로 가는 육로가 열려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던 그 때, 화진포에는 부랴부랴 안보전시관들이 세워졌고 김일성이 잠시 머물다 갔던 화진포의 성은‘김일성 별장’으로 의미 지어졌다. 북쪽으로의 길은 열었지만 마음은 열지 말라는 뜻일까? 그렇게 이곳은 여전히 저 너머 이북을 동포가 아닌 적이라고 되새기며‘분단’을 재생산하고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화진포는 그저 잔잔하면서 고요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이다.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고요하게 흐르는 시간을 담고 있는 저석호를 내려다보는 세 별장들은, 분단 주역들의 이름으로 여전히 고장 난 냉전의 시간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멈춰버린 분단의 시계는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며 존속하고 있다.

분단의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기억, 당포함전적비

7번국도로 화진포를 지나 더 내려오다 보면 당포함전적비를 만나게 된다. 일명 당포함 전몰장병 충혼탑인 이 비는 56함(당포함) 피격사건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1967년 1월 19일, 고성 거진 앞바다에서 어선의 조업 보호 임무를 수행 중이던 해군 56함이 북한군의 포격에 의해 격침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함정에 타고 있던 승무원 79명 가운데 39명이 전사했다. 더군다나 그 이듬해 어로한계선이 더 낮게 그어져 해방 이후 활발하던 명태잡이가 주춤해지고 거진항 또한 활기를 잃었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으나 분단은 여전히 삶에 피해를 주며 제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전쟁으로 흘린 피로도 모자라 분단은 전쟁의 망령이 돼 한반도에 피를 부르고 있다.

외진 도로를 따라 꽤나 올라가야 찾을 수 있는 이 전적비는 고성의 항구를 품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잊힌 듯 외로이 서 있었다. 그런 전적비 앞에 서 있노라니 씁쓸함이 온몸을 물들였다. ‘사람은 죽고, 피는 흘러가 이렇게 외진 곳에 전적비로만 남았구나.’그러나 상실에 대한 슬픔과 공포도, 수없는 되새김질을 통해 그저 사람들에게 무서울 정도의‘무덤덤함’으로만 남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씁쓸하게 만든다.

전쟁은 오직‘사람’의 소중한 삶과 무수한 생명들의 활기찬 일상을 파괴할 뿐이다. 거기에 사랑은 없고 오직 증오만이 있으며, 그 증오 속에는 삶을 잃은 사람들만이 있었다. 비록 너무 뒤늦은 깨달음일지라도, 이 깨달음은‘평화’로의 진일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평화’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낸다.

 

합축교, 이제는 분단을 건너다

당포함전적비를 뒤로하고 7번 국도를 그대로 쭉 내려가다 대대삼거리를 지나면 보이는 특이한 교량이 있다. 간성읍과 거진읍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바로 합축교이다. 합축교는 남과 북이 함께 만든 교량이다. 합축교는 1948년 6월 북한의 강원도 인민위원회가 건설하다가 한국전쟁으로 중단되고, 그 후 1960년에 국군공병대가 건설함으로써 완공됐다. 그렇게 12년 만에 다리는 하나로 이어졌지만, 남과 북에서 건설한 부분의 모습은 매우 다르다.

의도치 않게 남북합작으로 완공된 이 교량은 분단 이후 달라진 남북의 모습처럼 서로 다른 모습의 다리가 이어진 특이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 교량은 이제는 분단된 한반도도 이처럼 이어져 완연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구조물이 됐다. 때문에 원래 北川위에 세워져 北川橋라고 불렸던 다리의 이름은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아 지금은 합축교라 불리고 있다.

한반도는 전쟁을 과거로 지나보내지 못하고 과거에 사로잡힌 채 굳어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분단’을 재생산하는 의미가 아니라, 남과 북이 함께 한 역사에‘합작’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합축교’는 의도치 않은 남북의 합작으로, 간성읍과 거진읍을 지나기 위한 그 어느 길보다도 빠른 길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남북이 함께 만들어내는 한반도의 미래는 우리를 어떤 곳으로 안내할 것인가? 합축교를 건너며, 이제는 통일이라는 꿈을 꿔본다.

 

합축교 소개

合築橋는 남과 북이 반반씩 완공한 교량으로, 남북 간 건설공법의 차이를 볼 수 있는 구조물이자 분단을 넘어 화해의 시대를 희망하는 상징적인 유물로, 등록문화재 제143호이다. 합축교는 1948년 6월 북한의 강원도 인민위원회가 한국전쟁 이전에 남쪽의 교각 9개(사진의 오른쪽)를 건설했고, 휴전 후인 1960년 국군공병대가 북쪽의 8개(사진의 왼쪽)를 마저 건설함으로써 12년 만에 전체가 완공됐다. 사진을 참고하면 오른 쪽의 강원도 인민위원회가 건설한 교각 부분이 더욱 낡았고 상판을 하나 더 대고 있어 비교적 교각의 길이가 짧은 형태로, 건설공법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합축교는 강원도 고성군 杆城邑上里부터 巨津邑大垈里에 걸쳐있다. 당시 이곳은 38선 이북지역으로 동해안의 주요 관통로로 기능했으며, 북한은 일제 때부터 사용해 온 나무다리를 헐고 새로 시멘트 다리를 건설하려 했었다. 그러나 철근콘크리트 등 자재만 관급으로 공급했을 뿐 작업에는 주민들을 강제동원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리의 원래 이름은 북천교였지만 남북이 합쳐져야 한다는 뜻에서 지금은 합축교라 불리고 있다. 그러나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4차로 확장공사와 함께 새로운 북천교가 건설됐다. 새로운 북천교는 합축교 바로 옆에 총연장 216m, 교폭 16m, 통과하중 43t으로 1987년 9월 29일에 착공되어 1988년 12월 31일 완공됐다. 바로 옆에 새로 북천교를 만들면서 없어질 뻔한 것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지켜내 이름도 합축교로 바꿨고, 남북이 힘을 합쳤다 하여 합작교라고도 한다. 이와 비슷한 과정으로 제작된 교량으로, 철원에 승일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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