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이 품은 목조건축의 아름다움
금강산이 품은 목조건축의 아름다움
  •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 승인 2017.12.2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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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5.간성향교 청간정 천학정 어명기가옥 왕곡마을

우리의 전통 목조건축, 한옥

날아갈 듯 날개처럼 펼쳐진 검은 기와지붕 아래 갈빗대마냥 가지런한 서까래, 나무색 그대로의 기둥과 마루, 황토벽 사이로 하얀 한지를 바른 촘촘한 살창,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과 신발을 올려둔 섬돌. 우리의 전통 목조건축 한옥이라는 말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략 이럴 것이다. 혹은 네모진 긴 돌들을 교차로 쌓아 올린 높은 기단과 계단, 굵고 붉은 기둥에 선명하게 대비되는 청록색 살창, 겹겹이 복잡하게 짜 올린 오색단청 화려한 공포(栱包), 커다랗게 펼쳐진 위엄서린 지붕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한옥은 여러 채의 건물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한 곳에 모여 있지만 모양은 제각각이다. 한 향교 안에서 명륜당과 대성전이 다르고, 한 가옥 안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다르다. 지역의 특색도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기도 한다. “여기는 왜 이런 창을 내었을까. 여기는 왜 겹처마를 올렸을까. 여기는 왜 툇마루를 두었을까?” 그래서 우리 한옥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 건물들의 모양이나 구조, 상대적 위치로부터 자연스레,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전쟁의 불길에 유난히 약했던 우리 목조 건축들도 그 중 하나이다. 강원도 고성의 왕곡마을과 어명기 가옥은 용케 그 화마를 견뎌 살아남은 소중한 전통 민가 건축이다. 복원과 관리에 매우 힘이 들어간 청간정은 선대로부터 동해의 절경을 만끽해 온 그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경치도 경치이지만 한껏 멋을 낸 큰 정자 건물 자체가 매우 볼 만하다. 정자 본래의 소박한 맛을 보고 싶다면 천학정이 있다. 마찬가지로 동해를 내려 보는 절벽에 세워져있는데, 좌우로 해송숲을 자랑처럼 두른 것이 일품이다. 그런가하면 간성향교의 이런 저런 재밌는 변칙들도 놓치기 아쉽다. 2층으로 올려지은 명륜당하며, 대성전보다 더 큰 대성문은 다른 향교들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례적인 독특함이다.

 

2층으로 올려지은 명륜당, 간성향교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국립지방교육기관이었는데, 특히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더욱 그 역할이 커졌다. 서울의 성균관이 그러한 것처럼, 향교에는 공자에 대한 종교적 제향(祭享)과 유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講學) 목적이 함께 있다. 그래서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함께 모여 공부하고 토론했던 명륜당(明倫堂)은 향교를 구성하는 두 중심건물이다. 일반적으로 제향공간에는 대성전 앞 좌우로 송조 6현과 동방 18현 등의 위패를 모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를 두고, 강학공간에는 명륜당 앞 좌우로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두는데, 내삼문으로 구분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편,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의 배치에 따라 향교의 구조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서울의 성균관처럼 대성전 등 제향공간을 앞에 두고 강학공간을 뒤에 둔 전묘후학(前廟後學), 반대로 강학공간을 앞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 그리고 이러한 전후의 일렬 배치로부터 벗어난 병렬이나 대각선 배치 등이 그것이다. 전체 향교(231)90%를 차지하는 전학후묘의 경우 대부분이 산자락의 야트막한 경사지에, 명륜당보다 대성전을 뒤에 두어 높이로 위계를 두었다. 반대로 대성전을 앞에 둔 전묘후학의 배치는 예외 없이 모두 평지인데, 이는 대성전을 명륜당보다 높이 여기는 유학적 위계가 배치에 반영된 것이다.

간성향교는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에 있다. 1420(세조2) 처음 지어져 수차례의 이건(移建)과 중건(重建)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지금의 위치는 인조 연간인 1640년에, 배치는 19세기 고종 연간인 1872년에서 1874년 사이에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56년 대성전과 동·서재가 재건되기 시작하여 명륜당과 동·서무가 재건되고, 최근까지 중건과 보수가 진행되었다. 고성군은 원래 간성군과 고성군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914년 합쳐지고 1919년 고성군으로 개칭되었지만, 전쟁으로 현재는 다시 갈라져 있다. 그래서 간성향교는 남쪽에, 고성향교는 북쪽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간성향교 명륜당

간성향교는 여러모로 독특하다. 우선 외삼문, 향교 전체의 영역을 구분하는 바깥문인 외삼문은 일반적인 솟을지붕이나 평지붕이 아닌 팔작지붕이 얹어져 있다. 팔작지붕은 중심건물에 올리는 가장 고급스러운 구조인데, 여기는 외삼문에 올려져있다. 그 뒤로 보이는 명륜당은 커다란 현판을 달고 있는데 팔작지붕이 아니다. 그렇다고 실용적이고 소박한 우진각지붕도 아닌, 다른 곳의 대성전마냥 양쪽에 붉은 풍판을 단 맞배지붕이다. 2층 건물이라 지붕에 무거운 느낌을 주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륜당의 1층은 통로의 역할이다. 산자락 조금 윗부분에 자리한 것도 그렇고, 2층 누각으로 올려 지은 것도 그렇고, 풍경을 감상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영남지방의 향교들이 누각형 정문을 사용하는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을 구분하는 내삼문의 이름은 대성문(大成門)’이다. ·외삼문에 현판을 달아둔 것도 특이하지만, 내삼문은 특히 그 크기와 형식이 사뭇 독특하다. 서울 성균관 명륜당을 보는 듯, 솟을지붕이라기보다 맞배지붕을 겹쳐 양쪽에 익사(翼舍)를 둔 것 같은 넓은 건물이다. 내삼문이 외삼문보다 큰 것은 물론 폭만 보아서는 대성전보다도 넓다. 아마도 내삼문 양쪽에 붙어 있는 또 다른 두 개의 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쪽을 창고처럼 쓰지 않았나 싶다. 향교가 어지간히 크지 않고서야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제기고(祭器庫)나 전사청(典祀廳)을 따로 두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혹시 간성향교에서는 이 내삼문의 양쪽은 이를 위한 실용적 변용인가 싶다.

내삼문을 지난 안쪽으로는 맞배지붕에 풍판, 정면의 퇴칸까지 갖춘 대성전이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동무와 서무의 건물도 훌륭하다. 대성전 정면의 세 돌계단 뒤로 가구식 기단이 보인다. 자연석을 다듬거나 장대석으로 만들어 쌓은 기단보다 훨씬 격식을 높인 방식이다. 대성전은 정면 5칸 구조인데, 양쪽의 들창까지 멋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다 음력 2월과 8월 초에 하는 석전제(釋奠祭)때는 활짝 열고 제례를 행한다. 앞쪽의 퇴칸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향교는 일종의 공립학교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특히 16세기를 지나가면서부터 조선의 정치·사상은 사림(士林)에 의해 좌우되었다. 사림이 발달해감에 따라 점차 사립학교인 서원의 수와 영향이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지방에 또한 늘어가던 것이 바로 정자이다.

 

동해의 절경을 내려 보던, 청간정과 천학정

정자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정자가 민간에 확산된 것은 16세기 사림(士林)의 세력 확대와 함께이다. 성리학에 몰두했던 조선시대 사림들은 학문의 연구, 심신의 수양, 정치의 실천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벼슬을 하지 않으면 학문을 연마했던 그들은, 또한 지역의 지주계급이자 지배세력이기도 했다. 서원과 정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들이 지역에서 학문과 심신을 닦는 곳이었다.

고성이 자랑하는 청간정(淸澗亭)은 동해를 내려 보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원래 ()’이라는 글자는 바닷물이 아니라 큰 냇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청간정은 원래 청간천(淸澗川) 옆에 있었다. 그래서 청간정(淸澗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현재는 옆에 있었다던 역참인 청간역(淸澗驛)은 사라지고 청간정만 남아 있다.

청간정

청간정은 2층 구조로 된 큰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이제야 팔작지붕을 만났다. 봉긋하게 올라간 양쪽 처마 아래로 울긋불긋 단청이 화려하다. 마루를 관통한 붉은 기둥 아래 우뚝우뚝 장초석이 위엄을 더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는 청간정이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곳은 사실 정면이 아니라 측면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저 멀리까지 동해의 수평선이 펼쳐지고 아래로는 갈매기 나는 소리와 물결이 부딪히는 모양이 대단하다.

청간정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1560(명종15)에 남아 있다. 1631(인조5) 편찬된 수성지(水城志)에는 바닷가로부터 고작 5, 6보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물이 앞 계단을 넘어 닿지 않으니 오히려 가관이며 헌방(軒房)에 누워 듣는 바람과 파도소리도 일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를 생각하면 기둥만 있고, 사방이 트여 있는 모양을 생각하게 되는데,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의 기후적 특성상 이렇게 사면을 틔워만 두면 일 년에 절반은 쓸모가 없을 것이다. 헌방은 이제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정자의 활용도가 예전 같지 않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청간정에 비하면 천학정은 소박하다 못해 아담하다. 정면 2, 측면 2칸이라고 하나 청간정에 비하면 기둥 사이의 거리가 좁은데다, 청간정의 높은 장초석이 주는 우람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정도 크기라면 간단하게 우진각으로 올릴 만도 한데 팔작지붕을 올린 것이 예사롭지 않다. 여기도 맞배지붕으로 내려오다 우진각으로 퍼지는 측면의 접합부에 있는 합각벽 아래 현판이 달려 있다. 그런데 길과 닿는 곳이 이곳뿐이니, 아마도 처음 지을 때부터 이곳을 정면으로 삼은 듯하다.

천학정

천학정은 조선시대 건축이 아니다. 일제치하였던 1931, 한치응, 최순문, 김성운 등이 함께 지었다고 전해진다. 교암리의 야트막한 절벽 위에 세워져 멀리 동해를 바라볼 수 있고, 가까이는 절벽에 늘어선 기암괴석들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위치다. 천학정 안에는 천학정을 지으며 쓴 기록이 현판에 남아있다. 그들은 이 현판에 학 울음 소리가 하늘에 들려 내가 학인지 학이 나인지 모르겠도다.’라는 감상을 남겼다. 좌우 주변으로 해송 숲이 울창하고 새 떼가 이리저리 날곤 하니 과연 정말 잘 지은 이름이다 싶다.

고성의 목조 건축을 돌아보는 이 길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은 역시 사람들이 살았던 민가들이다. 한국전쟁의 화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귀한 가옥들을 볼 수 있는, 어명기 가옥과 왕곡마을이다.

 

조상의 유업을 찬미하고 후세의 교육 목적에 보탬이 되고자 한 어명기 가옥

어명기 가옥은 16~17세기 처음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750(영조26)년 경 어태준이 복원하기 시작하여 1753(영조29) 완성했다고 한다. 이후 현 주인인 어명기의 조부인 어용수가 1860년대 구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동북부 민가의 전형적인 형태로, 정면 4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기와집이다. 6.25 전에는 북쪽에 속해 있었다. 그 후 전쟁 때에는 북한군의 인민위원회 사무실로도, 한국군의 제1군단 사령부 병원으로도 사용되었다. 다행히 전화를 크게 입지 않아 현재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어명기 가옥

가옥으로 가는 진입로는 살림채의 우측면을 감아돌며 들어가게끔 꾸며져 있다. 영동북부의 추운 겨울은 사랑채와 안채는 물론 외양간마저 한 건물 안으로 들여놓게 만들었다. 건물의 정면에서 보자면 오른쪽부터 사랑방, 윗방과 가운데 방, 안방이 있고,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외양간과 부엌이다. 방들을 다닥다닥 붙여 두고, 마루도 사랑방 옆 쪽마루 말고는 집안에 넣어 두어 추위를 견디기 좋게 해 두었다. 장대석을 3단으로 쌓은 훌륭한 기단도 눈이 많이 오는 기후와 무관치 않다. 외양간을 집안으로 들인 것에서 가축을 아끼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어명기 가옥은 4채로 구성되어 있다. 진입로로 들어서면 보이는 왼편의 작은 건물 둘은 디딜방아간과 화장실이다. 곳간은 따로 없다. 대신 어명기 가옥에는 지붕과 천장 사이를 창고처럼 쓰는 더그매를 모든 공간 위에 두었다. 더그매는 지붕에서 내려오는 한기를 막아주어 실내를 조금 더 포근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행랑채는 살림채 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따로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행랑채는 출입구 쪽에 배치하여 바깥공간과 안공간의 연결부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한옥은 안채가 제일 안쪽에 있고, 그 앞 동편으로 사랑채를, 문 근처에 행랑채를 두는 식으로 남녀의 자리와 반상의 위계를 드러냈다. 하지만 어명기 가옥에서는 행랑채가 사랑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남서향의 가옥방향을 보아도 행랑채의 방향이 출입의 방향은 아닌 듯하거니와, 공간도 거의 구분이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영동북부 양통집이 모여 있는 집성촌, 왕곡마을

영동북부의 전통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왕곡마을은 고성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전통공간이다. 왕곡마을은 양근 함씨(咸氏)와 강릉 최씨(崔氏)의 집성촌이다. 함씨는 고려 말 조선왕조의 역성혁명에 반대한 홍문관 박사 함부열(1371~1442)과 그의 손자인 함영근의 정착을 시작으로 삼고, 최씨는 희경공파 21세손 최응복(1504~1565)을 시작으로 삼는다. 왕곡마을 안 개울을 두고 윗마을(금성마을)에 먼저 함씨가 자리를 잡고, 이후 함씨와 통혼을 한 최씨가 아랫마을(왕곡마을)을 형성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모양이 되었다.

왕곡마을 전경
왕곡마을 전경

왕곡마을은 영동북부 가옥의 특징과 함께 집성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방, 사랑방, 부엌, 외양간까지 한 건물 안에 들여놓은 양통집은 추위를 견디기 위한 방책이었다. 담벼락을 뒤에만 두른 것 역시 담 그늘에 쌓인 눈이 얼지 않도록 남향의 앞을 아예 틔워놓은 것이다. 집성촌이기에 가능한 개방일 수도 있다. 대신 집 뒤편은 담장을 두어 여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한편, 눈이 집안으로 밀려들지 않도록 했다. 안채를 따로 두지 않았지만 여인들에 대한 배려는 소홀하지 않았다. 초가에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진흙과 기와로 켜켜이 올린 굴뚝 위에 엎어둔 항아리도 이채롭다.

왕곡마을은 다행히도 한국전쟁의 포화를 용케 견뎌냈다. 겹겹이 둘러싼 산세에 이곳까지 포격이 쏟아지지 않았던 덕분이라 한다. 하지만 온전히 지나가지는 못했다. 마을에서 만났던 한 할머니의 증언은 생생하다. 시집오신 이후 잠깐의 피난을 제외하면 계속 이곳에 사셨다는 할머니는, “돌아왔더니 부엌이 새카맣게 그을리고 좁은 마루들을 다 뜯어놨더라.”고 하셨다. 그나마 전쟁을 조심스레 지났다고 해도 피해가 전혀 없는 곳이라곤 찾을 수가 없으니, 다시 한 번 마음 한 켠이 아린다.

알고 보면 재미있는 것이 어디 우리 전통건축 뿐이겠냐 마는 그래도 또 알고 보면 새로 보이는 것이 또한 건축물이 아니겠는가. 요즘에야 한꺼번에 수십 채를 무더기로 지어 올리는 탓에 여길 가도 저길 가도 같은 모양, 이 때 가도 저 때 가도 같은 느낌이 다분하지만, 옛날에는 지역마다, 마을마다, 마을 안에서도, 심지어 한 공간 안에서도 각각이 특색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 특색은 저마다 이유를 품고 있었고, 이유는 곧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바로 그 까닭이었다. 이것이 전통 건축의 멋이요, 맛이라 한다면 과언일까.

 

한옥에 쓰인 지붕은 대체로 세 가지이다.
우선 책을 펼쳐 엎어둔 것 같은 맞배지붕은 가장 간단한 구조이지만 중후한 무게감이 있다. 맞배지붕에서 멋을 내는 부분은 측면의 박공이다. 박공은 맞배지붕의 자 곡선을 따라 덧대어 지붕 안쪽을 보호하는 용도이다. 사당 건물에서는 박공대신 넓고 붉은 풍판을 대었다. 신성성을 강조하고 나쁜 기운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맞배지붕은 대문에도 많이 쓰였다. 맞배지붕을 겹쳐 올려 둔 모양의 것도 있는데, 이를 솟을지붕이라 하며 권위를 더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측면에도 지붕면을 둔 사다리꼴 우진각지붕은 한결 실용적이다. 측면까지 처마가 나오기 때문에 맞배지붕에 비해 눈·비를 더 잘 막을 수 있다. 초가집이나 기와집을 가리지 않고 살림집에 널리 쓰였다. 공법이 많이 복잡하지 않을뿐더러 실용성은 우수했기 때문이다. 여러 채로 구성된 한옥에서 지붕은 격식이나 위계를 드러내는 방법 중 하나였는데, 민가의 안채나 향교의 동·서재 등에 많이 썼다. 궁궐문에도 우진각지붕을 쓴 경우가 더러 있다.
중요한 건물이나 격식을 차려 위상을 높여야 하는 건물들은 대체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맞배지붕처럼 내려오다 우진각지붕처럼 확 펼쳐지는 팔작지붕의 당당하고 우아한 선은, 말그대로 예술이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만나는 곳에 있는 삼각형의 합각벽의 꾸밈도 유심히 볼 부분이다. 팔작지붕은 궁궐이나 사찰, 향교, 대갓집에 널리 쓰였는데, 아무래도 이런 건물들이 문화재로 남는 경우가 많다보니, 한옥의 지붕이라 하면 으레 팔작지붕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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