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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사와 한국 현대사의 더 나은 소통을 위하여
냉전사와 한국 현대사의 더 나은 소통을 위하여
  • 우동현
  • 승인 2023.06.28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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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⑩ 끝

국제 냉전사 연구에서 한국·북한이 더 주요하게 다뤄지려면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까? 
국내 한국현대사학계의 성과를 영어권 학술장에 
더 많이 소개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냉전의 경험이 보여주듯, 가장 중요한 것은 재정적 지원이다. 
단순히 우리말로 쓰인 저작물에 대한 영역(英譯) 이상을 의미한다.

이번 연재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은 하나였다. ‘신냉전’을 사는 우리는 냉전기 한국인의 냉전 인식에서 어떤 역사적 통찰과 의미를 배울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영어권 학계의 냉전사 연구에서 한국·북한의 경험은 찾아보기 어렵다. 소련사, 중·소 갈등, 제2·제3세계의 역사 연구에서 코리아의 존재는 언제나 주변적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현대사의 존재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내 역사학계에서 한국현대사는 한반도를 주된 배경으로 1945년 이후의 시간대를 의미한다. 학문 분야로서의 한국현대사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뜨거운 열망 속에서 시작되어 30여 년 넘게 성장했다.

최근에는 정치사·외교사 연구를 넘어 경제사·사회사·문화사·미시사(생활사)·과학기술사·생태환경사 등 다양한 주제가 탐구되고 있다. 그간 한국현대사 연구는 양적 확대에 맞춰져 있었다. 이제 이를 질적 성장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2022년 나온 『한국 현대사 연구의 쟁점』은 그러한 노력의 중간결과물 중 하나이다.

이 책은 그동안 한국 현대사 연구를 큰 흐름에서 결산하는 저작이다.

한국현대사 연구 넓히는 신진 연구자들

신진 연구자들은 새로운 접근을 통해 한국현대사 연구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를테면, 이동원과 고태우는 각각 의학사생태환경사를 통해 한국현대사를 재해석한다. 양지혜는 일제 시기 흥남에 관한 탁월한 연구를 토대로 현대 한국에서 자본·환경·노동의 접합을 탐구한다.

권오수는 한국 석유사의 권위자로 저명한 국제 학술지 『Diplomatic History』에 논문을 냈다. 조수룡은 미지의 영역인 북한사에 환경사적인 접근을 처음 시도했다. 현재 박사학위논문을 작성 중인 정영오(디아스포라), 김성은(군사사), 이미나(핵 역사), 하재영(기술사), 이주영(기술사), 윤성민(자원사)의 연구는 냉전사와 한국현대사의 얽힘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쇄신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아쉽게도 미국 한국학계는 국내 한국현대사학계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 서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단순히 언어장벽의 문제나 2016년 미국 한국 사학계를 뒤흔든 엄청난 표절 스캔들의 여파라고만은 볼 수 없다.

미국에서 냉전사를 주도하는 지역학계(슬라브학, 라틴아메리카학, 동·남아시아학, 중동학, 아프리카학)는 해당 지역의 언어·문화·관습을 충실히 체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지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학술적 성과를 영어로 소개한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은 미국 한국학계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지구사적 접근은 아직 유효하다

오드 베스타가 시도한 지구사적 접근은 아직도 유효하다. ‘신냉전사’가 지역 자료에 대한 엄밀한 독해를 강조했다면, 베스타 이후의 연구는 제2·제3세계의 독특한 냉전 경험과 그 지구적 함의에 주목한다. 공산주의 중국에서 시장화의 기원을 추적하는 연구나 1980년대 신자유주의 혁명에 중국을 제외한 냉전 국가들의 굴복을 다루는 연구는 무척 활발하다. 

영어권 냉전사 연구자들은 정책 현안에도 뛰어난 논평을 내놓는다. 각각 미국·소련의 근대화 학지(學知)를 분석한 닐스 길만과 야코프 페이긴은 바이든 정부의 국가 주도 산업정책을 “설계자 경제”(Designer Economy)로 명명한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다.

국제 냉전사 연구에서 한국·북한이 더 주요하게 다뤄지려면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까? 우선은 국내 한국현대사학계의 성과를 영어권 학술장(場)에 더 많이 소개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냉전의 경험이 보여주듯, 가장 중요한 것은 재정적 지원이다. 단순히 우리말로 쓰인 저작물에 대한 영역(英譯) 이상을 의미한다.

영어권 학계에 더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현대 한국·북한 연구자들의 학술 영어 글쓰기 역량을 길러야 한다. 해외 연구자들과 소통의 접점도 늘려야 한다. 풍족한 연구 자원을 쓸 수 있고 더 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유능한 국내 대학원생의 미국 유학도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국내 학지의 영어권 학술장 진입·유통·인정이라는 중장기적 목표 아래 꾸준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유학 시절, 문화적 연성권력(soft power)의 기획에 재정적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필자의 학과는 한국학·중국학·일본학·언어학·불교학으로 이뤄졌다. 한국 언론에서 BTS로 대표되는 한류를 연일 보도했지만, 가장 인기 있는 학과 과목은 단연 일본어·일본사였다. 

어느 날, 일본학을 공부하던 한 중국인 선배에게서 한 일본 대기업 대표가 학과에 미화 25만 불(한화 약 330억 원)을 쾌척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일본 인문학의 글로벌화를 목표로, 대표와 친분이 있던 일본학 교수 한 명이 총괄했다. 이후 학과는 미국 내 일본학 중심지로서 위상이 더욱 굳어졌다. 그 소식을 전해준 선배도 졸업 후 곧바로 미국 대학에 취직했다. 

굴지의 대기업 입장에서 상기 액수가 아주 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돈으로 학과는 교수나 박사후연구원 등으로 인재를 영입할 수 있다. 그들은 영어권 학계에서 우수한 일본학 연구 성과를 내면서 관련 수업을 개설하고, 일본의 학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명문대 학생들이 동아시아 국가 중 유독 일본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냉전사 연구에서 한국·북한이 더욱 중요한 행위자로 다뤄지려면 언어장벽 초월은 물론, 영어권 학계에 더 많은 참여가 요구된다. 이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전문가가 바로 한국현대사 연구자 집단이다. 특히 필자를 포함한 냉전기 사회주의 전공자들은 비밀 해제된 자료 수집, 역사 서사 창출, 외국 학계와의 교류에 탁월한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기획을 현실화하는 작업에 이번 연재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을 발표했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핵역사·환경기술사·디지털역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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