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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역사를 재평가하는 새로운 눈 ‘장기 냉전 구조’
20세기 역사를 재평가하는 새로운 눈 ‘장기 냉전 구조’
  • 우동현
  • 승인 2023.03.30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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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④ 소련 재평가 국내 연구자

두 역사학자의 학술은 지구사, 장기사, 기술사 등 
냉전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유용한 렌즈를 제공한다. 
최근 냉전사 연구는 관습적 의미의 냉전(1945~1991) 구조와 
1920~1930년대 전간기와의 연속성에 주목한다.

지난 연재에서 경제(대외무역)에 주목하는 소련 재평가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아쉽게도, 소련에 대한 선입견은 냉전이 끝난 후에도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의 공세적 행보(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가 지목되는 만큼, 소련사에 대한 오해는 지속되고 있다. 한편 냉전사·소련사 연구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내에서 소련 재평가를 주도하고 있는 연구자는 누구일까?

소련사를 연구하는 한국인 역사학자

2022년 봄, 서울시 서초구에 있는 유럽인문아카데미에서는 소련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과 좌절’이라는 제목으로 10주간의 무료 기획특강이 열렸다. 소련의 70년 역사를 한국어 교재로 배울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였다. 흥미롭게도, 강연자는 소련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두 명의 한국인 역사학자였다.

노경덕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왼쪽)와 
김동혁 광주과기원 인문사회부전공 교수

서울대에서 서양사를 가르치고 있는 노경덕 교수는 국내 러시아사·냉전사 학계의 중추적인 학자이다. 서구 소련사 학계에서 (전체주의론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수정주의론’을 선도한 세계적인 사학자 쉴라 피츠패트릭의 지도 아래 시카고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2010)한 후 소련사, 냉전사, 현대 러시아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꾸준히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박사학위논문의 제목인 「스탈린의 싱크탱크」가 보여주듯, 노경덕 교수는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외교 노선을 뒷받침한 경제학자 집단 연구에 대한 세계적인 권위자이다. 그는 학위논문에서 1925년에 세워져 20년 넘게 기능한 소련의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IMKhMP),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 복무한 헝가리 출신 경제학자 예브게니 바르가를 비롯한 경제학자들의 연구와 담론을 재조명했다. 2018년에는 영어 저작을 펴내며 한국인 역사학자로는 선구적으로 서구 학계와 대등한 수준에서 연구를 이어 나가고 있다.

광주과학기술원에서 서양사를 가르치고 있는 김동혁 교수는 국내 러시아사·냉전사 학계를 견인하고 있는 학자이다. 1950년대 후반 소련 경제학계를 주도하며 1965년 소련 경제개혁을 추동한 집단인 이른바 ‘수리경제학파’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박사학위논문(2015)을 썼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소련의 경제건설에 기여한 대표적인 수리경제학자 바실리 넴치노프, 레오니드 칸토로비치, 빅토르 노보쥘로프의 삶과 활동, 주요 논쟁 등을 조명했다. 칸토로비치는 선형계획법 연구에서 기여를 인정받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1975)하기도 했다.

Stalin’s Economic Advisors (2018) 표지

소련 경제와 외교의 실체를 밝혀내다

두 역사학자는 공통적으로 방대한 양의 러시아 문서고 자료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소련 내 경제학의 부침과 정치사회적 파급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러한 접근은 소련 경제와 외교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를테면, IMKhMP를 이끈 바르가의 경제사상은 과잉생산을 강조한 루돌프 힐퍼딩, 과소소비에 주목한 로자 룩셈부르크 등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도, 경기순환(business cycle)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미국의 경제학자 웨슬리 미첼에게서도 지대한 영향을 받은 산물이었다.

1950년대에 부각된 수리경제학자 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서구 학계에서는 이들의 등장을 보그다노프나 부하린 등 1920년대를 풍미한 소련 혁명가들과의 관계에서 찾거나, 20세기 영·미권에서 부상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할 뿐이었다. 하지만 김동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수리경제학파’는 계획경제의 관리·운용이라는 소련의 국내적 맥락이 만든 ‘소련식’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었다.

독창적 소련 냉전사 해석

두 소련사 학자는 소련사 연구를 통해 독창적인 냉전사 해석을 전개한다. 소련의 ‘팽창욕’에 집착하는 기존의 서술과 달리, 노경덕 교수는 스탈린 외교의 수세적이고 실리 지향적인 성격을 증명했다. 그 궁극적 목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반소(反蘇) 연합 결성을 저지해서 그들과의 전면전을 피하는 것이었다.

관·학 관계도 새롭게 조망했다. 기존 서술이 정치에 대한 학문의 종속을 강조한 반면, 소련 학계는 집권당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일정 수준의 자율성을 확보했다. 바르가 집단은 스탈린 시대 내내 독자적인 전문지식과 연구를 바탕으로 국가에 대한 학문적 서비스를 이어 나갔다. 스탈린 사후의 수리경제학자들은 경제성장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며 학문적·제도적 권력을 얻었다.

두 역사학자의 학술은 지구사, 장기사, 기술사 등 냉전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유용한 렌즈를 제공한다. 최근 냉전사 연구는 관습적 의미의 냉전(1945~1991) 구조와 1920~1930년대 전간기(interwar period)와의 연속성에 주목한다. ‘장기 냉전 구조’를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노경덕 교수는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의 국제사적 의미외교 전략, 얄타회담을 재해석하는 연구를 수행했고, 김동혁 교수는 소련 경제의 실상제도 변동, 원자력 개발을 살폈다. 앞으로 이들의 연구가 기대된다.

다음 연재에서는 소련만큼이나 중요한 냉전사의 핵심 주제인 중·소 관계를 고찰하는 연구를 개괄할 것이다.

우동현 한국과학기술원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이 게재됐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 핵역사, 환경기술사, 디지털역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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