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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가 꿈꾼 ‘더 평등한 세상’,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다
제3세계가 꿈꾼 ‘더 평등한 세상’,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다
  • 우동현
  • 승인 2023.06.15 0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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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⑧ 제3세계 재평가2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제3세계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부상을 막을 역량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구호가 추구한 반식민주의적 국제주의는
대안적 세계질서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제3세계는 더 평등한 국제질서 상상에 참조해야 할 역사적 경험이었다.

‘제3세계’란 말은 1952년 처음 등장했지만, 이 단어가 지칭하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주변적’ 역사의 기원은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흥미롭게도, 현대사에서 제3세계가 가지는 주변성은 자본주의적 개발을 뛰어넘는 새롭고 정의로운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1884년, 독일 제국의 설계자이자 ‘철혈(鐵血) 재상’으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식민제국들, 오스만제국, 미국의 대표를 베를린으로 소집한다. 훗날 ‘베를린 회담’으로 알려진 자리에서 정치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효과적인 지배를 논의했다. 회담 결과, ‘아프리카 분할’로 알려진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이 촉발됐다. 학계에서는 이를 ‘신제국주의 시대’라고 칭한다.

영국 정치인 세실 로즈가 식민지인 카이로와 케이프타운을 통신선으로 연결한다는 의미가 담긴 삽화다. 그림=위키피디아
미국은 언제나 미주(Americas)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관리했다. 20세기 미국의 제국 경영사는 최근 떠오르는 연구 주제이다. 그림=구글

민족자결권, 식민지 이후의 전쟁
  
제3세계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 전부 식민지였거나 미국의 손아귀(라틴아메리카)에 놓여 있었다. 유럽 제국(일본 포함)은 중심부에서 나오는 여러 불만을 식민지를 통해 외부로 돌렸다. 제국 관료들은 식민지의 광활한 시장, 풍부한 자원, 값싼 노동력을 영구적으로 장악하려고 했다. 이를 거든 논리가 바로 ‘백인의 의무’, 즉 식민지를 현대화하여 유럽 제국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는 제3세계에 대한 불평등한 지배였다. 미국과 유럽이 식민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동안, 나치는 독일 민족의 ‘생활권’ 개념을 내세우며 중동부 유럽에 식민제국을 건설하고자 했고, 일본은 서양 식민열강에 맞서 아시아가 함께 저항하자는 이념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했다.

이러한 구도에 균열을 낸 것은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두 지도자는 전후 세계질서의 원칙으로 ‘민족자결권’에 동의했다. 식민지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터였다.

물론 역사학자 노경덕이 밝혔듯, 현실에서는 원칙보다 국익이 우선시됐다. 또 루즈벨트의 후임 미국 대통령들은 제3세계가 주권을 운용하기 위해선 계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1946년부터 다시 긴 투쟁이 시작되었고, 프랑스령 알제리에서는 1954년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제3세계, 대안적 세계질서의 기원

1950년대 중반, 제3세계 정치인들은 비슷한 역사적 경험(식민 지배)과 정치경제적 지향(경제 개발)을 바탕으로 세력 규합을 시작했다. 역사학자 신디 어윙에 따르면, 실론(現 스리랑카)·버마·인도·인도네시아·파키스탄의 지도자들은 1954년 콜롬보 국가(Colombo Powers)를 결성, 이듬해 인도네시아의 휴양 도시 반둥에서 열린 반둥회의를 주도했다.

반둥회의에 참여한 29개국 국민의 수를 합치면 당시 지구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5억 명에 달했다. 이들이 내건 기치는 반제·반식민국주의를 위한 연대였다. 연대의 목소리는 1961년의 비동맹운동, 1966년의 삼대륙 회담으로 이어졌다.

삼대륙 회담의 포스터.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이자 반제·반식민주의의 상징인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그림=위키피디아

최근 출간된 프린스턴대학의 역사학자인 기안 프라카시와 제레미 아델만이 엮은 『제3세계 만들기』(Inventing the Third World)는 냉전기 제3세계 문화사 연구의 최전선을 보여준다. 프라카시 교수는 남아시아, 아델만 교수는 라틴아메리카 전공자이다.

제3세계의 역사를 해방이라는 비전과 대안적 미래의 상상을 중심으로 살핀 『Inventing the Third World』 (2022). 

『제3세계 만들기』는 제1·제2세계가 경합을 벌이는 ‘빈 장소’로서의 제3세계가 아닌, 지역 관료·문인·활동가들이 제기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안적 세계질서의 기원을 다룬다. 최근 냉전사 연구가 제1세계·제2세계와 제3세계의 교환에서 제3세계의 주체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 책에 실린 12편의 글은 냉전사 연구에서 나아가 제3세계가 상상하고 실천한 좀 더 평등한 미래를 문화사적 측면에서 탐구한다.

값진 역사적 경험 ‘제3세계주의’

이 책은 연대를 통해 더 평등한 세계질서를 추구했던 열망을 제3세계주의라고 규정한다. 제3세계주의가 세계적으로 가장 큰 호응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내부의 균열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제3세계의 정치 지도자와 지식인들은 자국이 개발도상국으로 남아있는 이유로 불평등한 세계시장을 지목했다. 이러한 경제적 식민체제를 바꾸기 위해 그들이 내놓은 방안이 바로 1974년 UN이 선포한 신경제질서(NIEO)였다. NIEO의 핵심 메시지는 서독의 총리를 역임한 빌리 브란트가 펴낸 보고서에 잘 드러난다.

198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주도해 제출한 보고서 「North-South: A Programme for Survival」에 포함된 지도다. 인구 1인당 국내총생산 비율을 가지고 지구적 북반부와 남반부를 나눈 선은 보고서 작성자의 이름을 따 브란트 라인이라고도 한다. 이미지=위키피디아

물론 제3세계주의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압도적인 세계시장의 무게를 연대의 구호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당시 제3세계는 냉전의 핵심을 이념(동서 갈등)에서 경제(북남 갈등)로 보는 탁월한 이해 방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경제 개발과 무역을 수행하는 행위자는 엄연히 국민국가였고, 제3세계는 이러한 국제정치에 대한 대안적 규칙을 만들 수 없었다. 1980년대 지구적 부채위기가 불거지면서, 제3세계주의는 결국 꿈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3세계가 꿈꾼 더 평등한 세상을 향한 연대는 무가치했는가? 이 책의 종장을 작성한 역사학자이자 변호사인 새뮤얼 모인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제3세계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부상을 막을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이 구호가 추구한 반식민주의적 국제주의는 오늘날까지 대안적 세계질서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제3세계는 더 평등한 국제질서 상상에 반드시 참조해야 할 역사적 경험이었다.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을 발표했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핵역사·환경기술사·디지털역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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