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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와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공간으로서 ‘한반도’
제3세계와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공간으로서 ‘한반도’
  • 우동현
  • 승인 2023.03.01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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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② 지구적 관점에서 본 냉전사

좋은 냉전사 연구가 많이 축적되고 있지만, 단순한 ‘신냉전’ 담론이 대부분이다. 
냉전이 우리에게 매우 밀착된 주제라는 뜻이다. 
특히 북한과 중국의 존재는 끊임없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냉전을 환기한다. 

오드 아르네 베스타가 쓴 『냉전의 지구사』(The Global Cold War)는 21세기 서구 학계에서 나온 가장 영향력 있는 냉전사 연구이다. 이 책의 대표 번역자 옥창준 박사는 『냉전의 지구사』가 갖는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먼저, 노르웨이 출신 저자가 탁월한 언어 능력(영어·중국어·러시아어·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을 적극 구사하여, 다양한 데이터를 검토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냉전적 정보가 아닌, 관련 국가들이 생산한 방대한 양의 문서 자료를 검토해 냉전사를 지구적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원서의 부제처럼 이 책이 다른 냉전사 연구들보다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 책은 ‘자유의 제국’ 미국과 ‘정의의 제국’ 소련이 유럽의 ‘문명화 사명’을 이어받아 옛 식민세계에서 유럽이 물러나면서 등장한 ‘제3세계’에 개입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제3세계 엘리트들은 여기에 적극 부응하는 동시에 미국과 소련을 활용하고자 했다.

물론 제3세계의 실상은 강대국이 내건 개입의 명분인 ‘자유’나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냉전 초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졌고, 소련의 개입으로 등장한 에티오피아 혁명 정권, 그리고 소련의 제한적 지원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나아가 소련 정권)이 붕괴하는 과정은 제국과 제3세계 엘리트의 결착만으로는 세계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냉전사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냉전사와 한국사의 묘한 거리감

한국어권 독자들에게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아쉬움은 무엇일까? 옥창준 박사에 따르면, 『냉전의 지구사』는 동아시아의 위상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

한편 이러한 책의 특징은, 스스로를 ‘냉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 냉전을 별달리 고민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대한민국이 치른 냉전이 지구적으로 매우 특수한 경험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즉 이 책은 ‘제3세계’와 동아시아의 거리감, 나아가 냉전사와 한국사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거리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베스타는 후속작 『제국과 의로운 민족』(Empire and Righteous Nation)을 통해 중국의 제국과 한반도의 국가들이 상호작용해온 오랜 역사적 과정을 탐구한다. 제국의 안과 바깥 사이에 존재한 한반도에 대한 그의 통찰은 놀랍지만, 여전히 주변의 시각에 대한 서술은 미약하다.

일례로 『제국과 의로운 민족』은 ‘의로움’이 유교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해준 측면을 잘 포착하지만, 한반도인들이 ‘의로움’이라는 수사를 활용해 실제로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세세하게 살피지 못한다.

옥창준 박사는 베스타 저작이 던지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냉전사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 속에서 ‘한반도 냉전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관련 자료들이 남북한 체제 대결의 서사로 오염되어 있는, 이른바 ‘냉전적’ 데이터임을 고려할 때, 연구자들은 한반도 바깥에서 벌어진 냉전의 전개를 잘 알고, 이를 의식하면서 사료를 새롭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탈냉전기인 오늘날 더욱 의미를 갖는 문제로서 제3세계와 동아시아(한반도)의 관계를 치열하게 물어야 한다. 옥창준 박사는 이 부분에 대한 답을 한국인 연구자들이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본다.

남북한을 포괄해 한반도 냉전사 연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제3세계와 동아시아를 연결·매개하는 주체로서의 한반도이다. 자유 진영(제1세계) 내에서 남한의 위치, 사회주의권(제2세계)과 북한과의 관계, ‘제3세계’에서 벌어진 남북한의 경쟁 등은 모두 좋은 연구 주제가 될 수 있다. 

‘신냉전’ 기원 밝히는 한국 현대사의 과제

더하여 한국전쟁처럼 한반도에서 벌어진 사건이 지구적 냉전에 미친 영향 등은 여전히 탐구되어야 할 중요한 소재다. 즉 지구사의 관점에서 한국사의 소재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냉전사를 통해 한국사의 문제의식을 벼릴 수 있고, 한반도의 독특한 경험은 냉전사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

옥창준 박사는 좋은 냉전사 연구가 많이 축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소개보다는 단순히 ‘신냉전’ 담론이 범람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이러한 사실은 냉전이 우리에게 매우 밀착된 주제임을 보여준다. 특히 북한과 중국의 존재는 끊임없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냉전을 환기시켜준다.

베스타가 2005년 당시 세계의 기원으로서 1970년대를 주목했듯이, 한국의 냉전사 연구자들도 ‘신냉전’ 세계의 기원으로서 1970년대 미중 수교, 1990년대 북방정책과 북핵 위기의 기원 등을 폭넓게 연구하면서 냉전사와 한국현대사를 생산적으로 교차시켜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옥창준 박사는 2023년 3월부터 세계적인 한국학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부임해 냉전의 지구사적 관점을 의식하며 ‘한반도 국제관계사’를 연구하려고 한다.

남북한 및 제3세계 국가들의 상호 개입과 관여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한편, 오늘날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남방’ 외교정책을 복원하면서, 강대국 중심의 외교를 상대화할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을 복원하는 것이 그가 가진 목표이다.

우동현 객원기자 / 광주과학기술원 위촉연구원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이 게재됐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 핵역사, 환경기술사, 디지털역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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