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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동구’로 분류돼버린 공산주의 세계…제2세계는 다양하다
무심하게 ‘동구’로 분류돼버린 공산주의 세계…제2세계는 다양하다
  • 우동현
  • 승인 2023.05.12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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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⑥ 제2세계 재평가

제2세계는 냉전기 사회주의권을 지칭한다. 
그런데 알프레드 소비가 무심하게 ‘동구’로 분류해버린 
공산주의 세계는 결코 단일하지 않았다. 
유럽연합 내에서도 동유럽과 발트 국가들의 정치적 입장은 다양하다. 
북한과 베트남은 제3세계로 분류되기도 한다. 
지금도 제2세계의 현실은 매우 복잡하다.

역사학계에서 ‘제2세계’(Second World)는 냉전기 사회주의권을 지칭한다. 이 단어의 기원은 195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2년 8월, 인구학자 알프레드 소비가 저명한 뉴스 잡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세 개의 세계, 하나의 행성」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성직자·귀족·평민을 각각 제1·제2·제3 신분으로 나누던 혁명 이전의 구(舊)체제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글의 메시지는 간명했다. ‘제3신분’에 빗댄 ‘제3세계’가 서구(Occident) 자본주의와 동구(Orient) 공산주의의 무시·착취·경멸을 받으면서도 ‘무언가가 되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공산주의 세계는 단일하지 않았다

소비가 무심하게 ‘동구’로 분류해버린 공산주의 세계는 결코 단일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권위주의’로 묶이고, 유럽연합 내에서도 동유럽과 발트 국가들의 정치적 입장도 다양하다. 북한과 베트남도 제3세계로 분류된다. 요컨대, 제2세계의 현실은 매우 복잡하다.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을 주도한 헨리 키신저 같은 학자-관료는 제2세계가 이질적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대공산권 수출통제 위원회(코콤) 등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유럽의 기업들은 동유럽의 노동력과 자원을 이용하고 시장을 개척하려고 했다.

이에 적극 동조한 루마니아의 사례가 흥미롭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쿠레슈티는 모스크바와 거리를 두면서 서구 주도의 세계 시장에 참여하기 위해 계획경제를 조정하고 자국 노동력을 값싸게 유지했다.

1950년대 중반 북한에서 간행된 사회주의권 국가들 안내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베트남, 몽골, 불가리아, 알바니아, 폴란드, 헝가리의 국기가 보인다. 중국 안내서의 경우, 표지에 국기가 없다. 북한의 적극적인 제2세계 동일시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사진=우동현

주목받는 제2세계 문화·외교사

제2세계, 특히 동유럽의 개별 국가사 연구는 1990년대 ‘문서고 혁명’ 이후 탄력을 받아 2010년대 들어서면서 수많은 성과가 산출되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앵거맨의 관찰처럼,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바로 ‘제2세계의 제3세계’이다. 제2세계의 문화사·외교사는 냉전사의 가장 유망한 분야다. 

『Cold War Crossings』(2014)와 『Socialist Internationalism in the Cold War』(2016)는 제2세계와 제1·제3세계의 접촉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탐구한다. 여기에서 소개되는 폴란드 농부들의 소련 집단농장 방문이나 소련과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의 애매한 관계는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Soviet Internationalism After Stalin』(2015)는 1950년대 이후 전개된 소련-라틴아메리카의 관계사를 서술한다.

역사적 ‘일탈’로서의 동유럽 사회주의 실험

『Warsaw Pact Intervention in the Third World』(2018), 『Alternative Globalizations』(2020), 『Socialism Goes Global』(2021)은 제2·제3세계 사이의 다양한 교환의 양상을 살핀다. 이 저서들은 동유럽 국가의 이니셔티브에 주목한다. 핵심 메시지는 모스크바가 동유럽의 외교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1989년도 혁명들은 꽤 이른 시기부터 준비됐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동유럽의 사회주의 실험은 역사적 ‘일탈’이었고,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러시아와는 다른 ‘유럽’이라는 정치·문화적인 주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역사학자 아르테미 칼리노프스키의 『Laboratory of Socialist Development』(2018)는 소비에트 타지크의 사례를 통해 사회주의 개발 드라이브가 어떻게 지역에서 굴절·변용되었는지를 추적한다. 타지크는 전통을 청산하고 사회주의 근대가 실현되는 소련의 내부 식민지이자 냉전의 진열장이었다.

하지만 제2세계의 역사가 보여주듯, 두샨베(타지키스탄의 수도로 1929~1961년엔 스탈리나바드)와 모스크바의 관계도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 타지크의 지식인과 관료 등 현지 행위자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최대화하기 위해 전통과 문화 등의 요소를 근대화 프로젝트와 결합시키려고 했다. 

정치사 위주의 서술에서 벗어나 물질사·생활사처럼 제2세계의 미시사를 살피는 연구도 존재한다. 『Pleasures in Socialism』(2010)은 소련·동유럽의 일상을 사치품(디오르로 대변되는 명품, 샴페인, 자가용, 모피), 기호품(흡연, 음주), 여가생활(티브이 시청, 캠핑, 사냥), 애정 생활 등을 소재로 탐구한다.

『The Socialist Car』(2011)는 소련·동유럽의 자동차 생산·분배·소비, 도시 계획, 자동차로 인해 향상된 이동성이 불러온 문화사를 탐구한다. 인구 1인당 자동차 수가 소련보다 거의 10배나 많았던 동독에서는 차 주인들이 모여 부품과 기계 관련 지식을 공유하고, 공식적으로는 받기 불가능했던 수리를 서로 제공해주기도 했다.

남북한을 찾아 보기 힘든 제2세계 역사 연구

동유럽 국가사의 틀 안에서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재구성한 저작들도 주목된다. 소련-폴란드 관계사인 『Soviet Soft Power in Poland』(2015), 소련-체코슬로바키아 관계사인 『Empire of Friends』(2019), 불가리아의 문화 외교를 다룬 『The Cold War from the Margins』(2021), 헝가리의 냉전사를 재조망한 『Hungary's Cold War』(2022), 폴란드·동독의 문화사를 공론장 개념으로 재해석한 『Communism's Public Sphere』(2023) 등은 알바니아의 독특한 행보를 다룬 『From Stalin to Mao』(2017)와 함께 제2세계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와 같은 제2세계 관련 저작들 대부분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아울러 이러한 연구 지형에서 남북한은 찾아보기 힘들다. 냉전기 서·동독의 국내사에 북한 고아와 같은 제3세계의 존재를 결합시킨 역사학자 홍영선의 『Cold War Germany, the Third World, and the Global Humanitarian Regime』(2015) 같은 저작이 앞으로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을 발표했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핵역사·환경기술사·디지털역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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