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심포지엄에서 가장 강렬했던 두 그림이 있다. 하나는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1751)이고, 다른 하나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의 「결혼」(1791∼1792)이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노년에 예술혼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고야의 「결혼」은 당대의 세태를 비판하고 노인에 대한 관점을 전복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장진성 서울대 교수(고고미술사학과)는 「노년의 거대한 예술적 실험: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발표했다. 정선은 그 당시 최고의 인기 화가였다. 그래서 그림 주문이 많았다. 정선은 수응화를 택했다. 제자를 동원해 대필을 시키기도 했다. 장 교수는 “수응화는 화가가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의 그림 요청에 부응해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대충 그린 그림, 즉 정성과 공력이 들어가지 않은 범용(凡庸)한 그림을 지칭한다”라고 설명했다. 정선은 수응화 제작으로도 바빴다. 정선은 시간이 모자라 붓을 두 자루 쥐고 그림을 그릴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회화에서 볼 수 없었던 긴 화면
그런데 정선은 그의 나이 76세에 「인왕제색도」로 역사에 남는 화가로 기록됐다. 장 교수는 “현존하는 정선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그림”이라며 “「인왕제색도」는 당시 76세의 노인이었던 정선이 이룩한 거대한 예술적 실험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인왕제색도」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눈앞에 성큼 다가온 거대한 인왕산의 위용, 묵면(墨面)으로 처리된 암벽의 육중한 괴량감(塊量感), 활기 넘치는 화면, 호방(豪放)한 필묵법(筆墨法)은 정선이 그림의 대가였음을 알려준다. 이 그림의 화면 구성은 정선의 다른 작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히 가로 138.2cm, 세로 79.2cm로 옆으로 긴 화면을 그가 사용한 것은 조선시대 회화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대담한 시도였다.” 정선은 인왕산을 클로즈업 해서 묘사했는데, 이 때문에 보는 사람들은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안개가 걷히는 인왕산의 장대한 모습에 시각적으로 압도당한다”라는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