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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성범죄는 일상에 침습된 범죄”…학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디지털 성범죄는 일상에 침습된 범죄”…학자들은 왜 침묵하는가
  • 윤지선
  • 승인 2022.01.04 08:5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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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충’의 발생학 불러온 2021년 논쟁의 지형도 분석
새로운 이론적 논의·물음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번 글은 필자의 논문에 제기된 반론에 응답하는 단순반론의 형식에 그치거나 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 2021년 필자의 논문사안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를 관통한 일련의 연쇄적이고 연관된 사태들을 메타해석하는 분석을 제시할 것이다. 이로써 개인학자와 학회에 사과를 종용하거나 비난을 일삼으며 논문퇴출을 명령하는 일방적인 심판관의 태도로부터 벗어나, 왜 2021년 1년 내내 학계, 기업, 언론, 미디어, 인터넷 커뮤니티, 정치계 전반에 걸쳐 동질적고도 유사한 양상의 공격의 물결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상호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해당 논문의 사안은 어떠한 사회적 맥락과 지형 안에 다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심도 있게 탐색해야 할 것을 요청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 글이 우리 학계가 비난과 마녀사냥, 두려움이라는 일방적 정동의 물결을 넘어서, 보다 새롭고 수준높은 이론적 논의와 폭압적 사회현상에 대한 철학적 물음들의 물꼬를 틔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점에서 반론을 제기하였던 특정학자들에 대한 비난이나 반박은 의도적으로 거론하지 않음을 밝힌다.

 

왜 ‘한남유충-한남충-관음충’의 용어를 사용했나

미러링: 구조적 상하대칭 반전의 패러독스가 보여주는 이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견딜 수 없는가? 

자, 필자는 2021년을 관통한 일련의 연쇄적 사태들을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1969)의 개념틀로 명철하게 분석, 통찰해보고자 한다. 왜 2021년이라는 한 해가 동질적 양상의 물결들(그 물결을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 전에)로 진동하고 정향지어졌는지 알아내려면, 우리는 우리 사회를 둘러싼 다각적 요소들(학계, 인터넷 커뮤니티, 디지털 플랫폼, 유튜버들, 언론, 기호, 기업, 정치계)이 어떠한 방식으로 배치되었고 어떠한 힘에 의해 추동되었는지 철저히 탐색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디지털 성착취 시스템이라는 문제가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현실화되는가(actualization)의 조건들을 탐색한 논문이 왜 ‘한남유충-한남충-관음충’의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지점으로부터 시작하겠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그는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거론하며 의미의 표면효과에 대해 거론한다. 필자는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는 위의 해당용어들이 일으키는 표면효과와 그 전략적 방법론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2015년 이후 전략적 방법론으로 거론되었던 ‘미러링(mirroring)’의 의미를 더욱 명료히 재정초하려한다. 

세상을 비추는 반사경인 거울(mirror)은 사실상 우리에게 실제현상을 좌우대칭 반전시켜 보여주고 있으며, 바로 이 지점에 착안하여 ‘미러링’이란 이 세상의 구조적 상단과 하단을 대칭적으로 반전시키는 효과를 생산하여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기존 통치 이데올로기의 폭압적 부조리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적 상단과 하단의 대칭반전이 야기하는 효과는 무엇인가?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거울을 관통하여 마주 본 세상이란 들뢰즈가 언급한 대로 깊이나 근저, 토대를 향한 수직강하의 여행이 아닌, 엄밀한 의미에서 현존하는 세상의 이 표면에서 저 표면으로 미끄러져가는(Logique du sens, 19쪽), 이쪽에서 저쪽 방향으로의 대칭반전, 즉 좌우대칭, 상하대칭 반전효과가 생성한 패러독스의 세상이다. 

 

「’관음충’의 발생학: 한국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의 추이에 대한 신물질주의적 분석」은 2019년 12월 『철학연구』 127호에 실렸다. 지난해 상반기부터 윤지선 박사 논문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이미지=교수신문 DB

‘한남유충-한남충-관음충’의 용어의 계열들은 많은 기자와 학자, 대중들이 그리도 두려워하고 노여워하는 기표와 기의가 정합적으로 일치하는, 남근이성중심주의의 세상의 근저와 핵심을 향한 수직강하의 용어라기보다는, 남근이성중심주의 세상의 부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폭로할 수 있는 상하대칭 반전의 전략적 용어이자 기존 이데올로기의 양식과 상식(common sens)의 방향을 동시에 교란하고 넘어서는 패러독스(LS, 92-93)의 세상을 우리들 눈 앞에 펼쳐주는 참으로 불편한 진실을 비추는 거울로 작동하는 장치이다. 

늘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장애인, 특정지역인, 외국인 등)을 향하던 멸칭의 용어와 폭압의 정서가 기본값으로 돌아가던 세상에서 감히 잠재적, 현실적 기득권층이 소위 ‘비하’와 ‘조롱’의 용어의 대상으로 비치는 상하대칭 반전이 일어나자 지난 2021년 한해동안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어났는가? 메갈리아 손가락 표지 찾기, 남혐의심 용어 발본색원하기 등의 운동은 끝을 모르는 공격심과 증오, 구토처럼 쏟아내는 집단비난의 연쇄적 물결을 형성하더니 남초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넘어 언론과 정치계, 학계를 가득 채우며 ‘남성혐오 의심표식’이 붙여진 모든 패러독스의 기호와 용어들을 남근이성중심주의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박멸하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약자들의 전략적 저항무기인 패러독스의 용어들은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기존 지배구조의 양식과 상식을 넘어서는 동시에 기표에 해당하는 기의로서의 대상을 반드시 정합적으로 수반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해당용어들의 상하대칭 반전의 미러링-패러독스는 기득권층이 그리도 두려워하는 능동공격의 양태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구조가 여태껏 얼마나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폭력적이고 혐오적으로 뒤틀려 있었는가를 스스로 반추하게 만드는 수동공격의 양태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사회의 기득권 남성들은 구조적 상하반전 거울의 패러독스를 견디고 이를 정시하며 스스로의 폭압성을 반추(reflect)하고 반성하는 대신 무엇을 택하였는가? 불편한 진실을 비추는 그 거울이 남성에게 너무도 폭압적이어서 한시도 견딜 수 없다고 아우성치며 그 거울을 깨부수고 패러독스를 저항의 무기로 삼은 이들을 색출해내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이 멋진 세상에서 과연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는 질적으로, 정량적으로 같은 특질의 것인가?

치안의 질서를 재각인하기의 전면전 vs. 폭압적 착취에 대한 저항의 용어 만들기의 게릴라전: 전투의 비대칭성 은폐하기 수법의 남성혐오 표식 낙인찍기

그렇다면 다시 묻고자 한다. 과연 백인-엘리트-자본주의-가부장제 사회에서 실천적, 인식론적 관점에서 노동자의 재벌혐오, 유색인종의 백인지배계층 혐오, 여성의 남성혐오는 실현가능한가? 지배계층의 억압과 권력남용, 착취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분노와 저항의 용어와 실천들은 지배계층에 대한 혐오로 단순화될 수 있는가? 랑시에르는 『불화』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의내린다. “치안이란 […] 신체들을 그것들의 가시성 혹은 비가시성을 분배하고, 각각의 부분에 어울리는 존재 양식들과 행동 양식들, 말하기 양식들을 조정하는 논리이다(랑시에르, 『불화』, 61쪽).”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불행히도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정치란 현재 우리 사회에는 부재한다!)는 이러한 기존 지배구조인 치안질서가 결정짓고 승인하는 피지배계층의 존재, 행동, 말하기 양식들에 대해 이의와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몫을 요구하고 존재하며 행동하고 말하는 양식을 고안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속 노동자들의 새로운 존재·행동양식으로서의 노동조합결성을 비롯하여 2021년 여성들의 새로운 존재방식으로서의 비혼선언,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전략적 미러링 용어 사용들은 기득권층이 결코 용인할 수 없는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치안질서를 심각히 교란하는 반역이자 혐오행위로 처단당하는 본보기로서 역사적, 정치적 제물이 되었다. 

 

미러링은 저항의 양식인 용어 만들기

미러링은 기득권층에 대한 혐오의 말하기 양식이 아닌, 기존의 복종적 말하기 양식을 전복시키고 재배치하는 동시에 지배계층의 폭압적 통치와 착취에 대한 피지배 계층의 저항의 양식으로서의 용어 만들기라 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며 고도로 정밀해진, 무수한 불법 디지털 카메라들은 ‘곤충의 눈처럼 수백 개의 홑눈이 겹쳐진 복안 구조를 띈 홀롭티시즘(holopticism)’의 변주라 할 수 있다. ‘미미한 개인들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을 통해 수천, 수만 개의 겹눈을 장착, 관망하고 즉각적으로 훑어볼 수 있게 되는 능력’이 홀롭티시즘이라면, 불법 촬영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 역시 이러한 복안구조의 재생산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법촬영 기기의 상용화와 다각적 온라인 파일 공유 플랫폼의 확산, 빅데이터 기술을 통해 이제 누구나가 수만 수억 개의 겹눈들을 공유·접속·가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여성의 모든 활동들을 관망할 수 있는 실질적 계기가 되었다(윤지선(2018), 292쪽).”

학교교장의 교내 여성화장실 불법카메라 촬영·설치, 동료남성경찰관의 동료여성화장실 불법카메라 촬영, 재벌 3세의 불법카메라 촬영범죄와 같은 연쇄적 사태들을 통해 우리는 혹은 그들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디지털 성범죄는 대한민국 지위고하, 세대를 막론한 포괄적이고 일상에 침습된 범죄로서, 논문을 통해 거론한 특수한 가해자집단을 표적한 분석용어(한남유충-한남충-관음충)들이 사실상 광범위한 불법촬영 가해 한국남성들의 여성혐오의 네트워크와 남근연대 전체의 여성 성착취 문화를 정조준하여 불편하게 비추는, 잘 직조된 상하반전 거울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이다. 

불법촬영범죄 가해자집단을 고도화된 수만 수천개의 디지털 기기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결집된 관음증적 복안을 공유한 채 여성의 성착취물이라는 먹이를 중심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모이고 흩어지고 몰려다니는 곤충 군집체로 유비적으로 설정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 폭압적 남성지배시스템 비판이 아닌, 남성집단 전체에 대한 혐오이자 구역질나는 반역인 셈이다. 

치안의 남근질서를 재각인하기 위한 언론-정치-학계 차원의 전면전 대 폭압적 착취에 대한 저항의 용어 만들기의 게릴라전을 벌이는 개인 여성주의자들 간의 전투는 동일한 자원과 힘을 배분한 겨루기인가? 남성혐오도 여성혐오도 다 싫다는 근엄한 말투로 시작하는 그들의 소위 표면적 ‘중립적’ 개입에는 논문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아동, 여성 대상 성착취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공감이나 분노도, 여성혐오 용어에 대한 인식도 전무한 채, 남성기득권과 여성피지배층 간의 전투의 힘의 비대칭성을 은폐하기 위한 수법으로 스스로를 남성혐오 표식 낙인찍기의 판정관으로서의 역할로 자처하는 양태가 지리멸렬하게 반복될 뿐이다. 

구조적 상하대칭 반전의 미러링이 두렵고 자신이 소속된 기득권층의 폭압성을 정시하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세상의 모든 저항의 작은 거울들을 찾아서 집단적으로 깨뜨리고 뭉개고 파괴하는 이들을 넘어 그들의 집단적 난장을 1년 이상 침묵하고 관전하는 학자들에게 요청하는 바이다. 왜 동질적 양상의 공격의 목소리만이 학계의 가시성의 권역 안에 들어오고 2021년 이토록 뜨겁고 비판가능한 논쟁의 지형도 내에 다른 생각을 지닌 학자들의 새롭고 통찰력있는 이론적 개입과 시대비판적 논의, 뜨거운 저항의 물음과 자기반성의 물꼬는 언제쯤 터질 수 있을지 많은 여성들과 여아들, 대중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부디 잊지말아 주길 바란다. 

 

윤지선
세종대 초빙교수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현대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천개의 고원' 용어분석론」, 「가부장제 의미경제 구조분석을 통한 인공 임신중절 담론 재고찰」, 「디지털 성범죄 시스템의 형이상학적 분쇄도」 등 논문을 쓰고 『철학자의 서재3』, 『탈코르셋 선언』 등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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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 2022-01-07 18:10:57
철학계 끼리끼리 KCI 해먹던 꿀통을 온 세상에 공개해 학계의 어두운 면을 정화한 다크나이트는 맞는 것 같음 ㅋㅋ

김인철 2022-01-07 18:05:47
심 사 평 공 개 하 세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