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4일「’관음충’의 발생학」(『철학연구 127집』, 2019) 논문에 대한 이충진 한성대 교수(철학)의 비평을 내보인 뒤로 <교수신문>은 윤지선 세종대 초빙교수(철학)의 반론, 이충진 교수의 재반론을 연달아 공개하며 논쟁을 이어왔다. 윤지선 교수가 다시 한번 반박 글을 보냈다. 반론권을 보장하고 투명한 논쟁의 장을 확보하기 위해 윤 교수의 글을 공개한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아울러 <교수신문>은 이와 관련한 학계의 또 다른 관점과 견해를 기다린다.
「‘관음충’의 발생학」 논쟁
① 이충진 기고 ‘윤지선 논문’ 논란, 철학연구회는 무엇을 놓쳤나
② 윤지선 반박 "'남혐'이 아니라 성착취 범죄 시스템 저지가 연구 목적이다"
③ 이충진 재반박 윤지선의 답변에 대한 답변, 학문과 사회적 금기에 대하여
④ 윤지선 재반박 “사과∙퇴출 요구는 반지성주의 파시즘… 저항하고 경고해야”
⑥ 이동규 학생 기고 「‘관음충’의 발생학」에 대한 반대자는 파시스트인가
⑦ 이충진 마지막 기고 "철학회의 안과 밖: 윤지선에 대한 두 번째 답변"

5개월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저는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두 용어가 각기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고찰할 수 있었습니다.
학자는 반지성주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논문 각주는 그 특성상 본문에서 논의된 한 개념에 대한 맥락과 설명들을 상세히 다 전개하는 것이 아닌 다소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기에, ‘보이루’와 관련된 각주에서 그 용어의 기원과 전파, 사용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는 독자들에게 이를 상세 설명하는 것이 명료하다고 판단하여 각주 수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수정된 각주는 “①’보이루’는 보겸+하이루의 인사말로 보겸이 만들었다 → ②이후 ‘보이루’는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여성혐오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를 밝히고 있으며, 이 논지의 논리적, 명시적 의미가 보겸에게 여성혐오적 표현의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용어 창시자와 그 용어 사용전파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용어의 의미의 변화를 구분하여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은 학문을 하는 철학자나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지적 태도입니다.
다만 이 각주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원색적으로 왜곡, 해석하며 ‘어쨌든 그래서 결국 보겸이 여성혐오 용어를 만들었다는 것 아니냐?’라는 반지성주의적 방식으로 이슈를 이어 나가는 일부 유튜버의 스피커에 의해, 대중들은 수정된 각주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뭐라고? 그 각주가 보겸을 여성혐오주의자로 몬다고? 사과하라’라는 주장에 선동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어 창시와 사용 사이 기본적 의미 차이조차 구분하지 않는 반지성주의적 선동을 일상적-경험적 의미로 포장하며 제시된 각주의 명시적 의미를 곡해하고, 각주에 대한 학회 차원의 사과에 근거로 드는 것은 결코 학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는 아닙니다. 학자라면 대중의 그러한 반지성적 선동과 곡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피해의 책임을 묻는다면 제 각주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대중에게 대량전파하며 보겸을 여성혐오주의자로 오인하게 하는 일부 유튜버에게 책임이 있지,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수정한 각주를 승인한 학회가 그 피해에 대해 대신 사과해야 할 그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법리적 판단이든 학술적 판단이든 제시된 텍스트의 내용에 한정하여 이에 대한 명료한 의미를 밝혀야 하는 것이지, 그 내용에 포함조차 되지 않는 왜곡된 해석을 한 제 3자의 책임을 원작자의 텍스트에 돌리는 것은 참으로 비합리적이고 반지성주의적입니다. 게다가 학회 차원의 사과의 조건이 성립된다는 근거로 학회 차원의 각주의 수정을 들고 있는데, 각주 수정은 논란에 대한 성실한 피드백이자 겸허한 상세설명이었을 뿐 학회의 오류를 증명하는 원인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5개월간 지속되고 있는 이 각주에 대한 사과 논쟁은 단순히 제 논문에 한정되는 사안이라기 보다는, 2021년 우리 사회에서 광풍처럼 불고 있는 남성혐오 찾기 물결현상과 맥락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업과 공공기관의 광고포스터를 비롯하여 모든 이미지와 여성 연예인에게서 남성혐오의 상징을 찾고 사과를 요구하여 받아내고자 하는 자들의 집단적 히스테리 증상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공식사과 수집을 일부 남성커뮤니티 집단에서는 그들의 쾌거로 기록, 수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남성혐오 논란 낙인’이라는 검열기제로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그 어떠한 논리적 근거나 합리적 판단과정 없이도 사과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일부 남성들의 권능감의 정동이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서 파시즘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미립자처럼 대중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는 이러한 폭력적 정동의 전염을 파시즘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2021년 한국 사회에서 ‘일부 남성집단에 의한 파시즘의 정동의 출현했다’라고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지성인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대중들의 반지성주의적 파시즘의 물결에 학회와 학자들이 휩쓸리며 그들의 파시즘적 정동에 전염되어나갈 것인가, 최전선에서 그 물결에 저항하고 엄중히 경고하며 우리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는가로, 그 역할과 태도가 나뉘겠지요.
디지털 성착취는 한국사회의 특성, 가해자 분석이 불편한가
디지털 성착취 시스템이 한국사회에서 일상화된 동시에 특화된 형태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이미 해외 유수의 미디어를 통해 한국의 불법촬영(spycam)의 현황 취재 기사들로 드러나고 있으며 다양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과 N번방 사건은 이를 입증하는 사례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의 고도로 발달된 온라인 기술지형 문화와 여성혐오 정서를 공유하는 대한민국 특유의 강력한 남성연대문화가 결합하면서, 여성의 성과 신체가 남성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유희와 오락, 강자성의 인증수단이 되어갔고 이는 불법촬영 범죄영상물이 우리 사회의 일상 안에 이토록 침습될 수 있었던 주요한 계기라고 봅니다.
특정 한국 남성 인터넷 이용자의 불법촬영물 접속-공유-생산-유통의 과정을 살펴보자면, ‘여성의 몸’을 거래하는 다각적 온⋅오프라인 플랫폼들(SNS, 인터넷 커뮤니티, 메신저)의 촘촘한 네트워크화와 더불어 정보 공유를 위한 남성 유저들 간의 상호참조와 상호연대의 놀이화, 그리고 수익창출을 위한 체계적인 직⋅간접적 협업과 손쉬운 유통산업경로를 기반으로 가동되고 있는 것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2021년 국제인권단체의 한국디지털 성범죄 보고서에서도 한국사회 특유의 심각한 디지털 성착취 현상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한국사회에서 수많은 아동, 여성피해자들을 양산하는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의 발생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남성이 아닌, 비-한국남성은 디지털 성착취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부터 입증해야만 한다는 엉뚱한 주장을 펼치며 한국사회에서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성착취 현상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거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한국남성 일반에 관한 논문이 아닌 디지털 성착취 현상이라는 특수한 사안과 관련된 한국남성 가해자들의 진화과정을 다루는 것이며 이에 대해 불편해하신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제 논문은 비-한국남성이 디지털 성착취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요지의 주장이 아니라, 왜 한국사회에서 어린 세대의 남성들이 디지털 성착취 시스템의 가해자로 발생, 진화하고 있는가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연구입니다. 철학은 특수한 현상에서 일련의 메커니즘과 상호관계들을 발견하고 이를 분석할 수 있는 역량의 학문이며, ‘특수한 현상을 연구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그 시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로부터 자신의 개념과 이론을 이끌어냈던 스피노자나 들뢰즈 등 사상가의 사례를 통해 명징하게 반박될 수 있습니다.

여성혐오 용어 비판은 사과하고, 디지털 성착취범 분석한 남성혐오 용어는 퇴출?
교수님은 사용되는 용어가 우리 사회 속 누구를 대상으로 표적하고 있는지에 따라 매우 상이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성혐오 용어인 ‘보이루’에 대해서는 이 용례를 각주에서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학회차원의 대대적 공식사과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일부 한국남성이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로 이행되는 과정을 곤충의 연속적 변이과정으로 유비해 사용한 ‘한남유충-한남충’에 대한 용어는 일부 집단에 대한 남성혐오 용어이기에 논문퇴출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시지요. 우리 사회 속 여성혐오 용어는 남성들의 기분을 건드리기에 이를 비판하는 학자와 그가 속한 학회는 공식사과를 해야 하지만, 디지털 성착취 시스템 분석을 위한 전략적 용어로 쓰인 한남충 용어는 남성을 타겟으로 하기에 논문을 퇴출시켜야 한다는 강력한 입장 잘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갖고 있는 혐오용어의 금지에 대한 학문적 신념이 일관되시려면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를 타겟팅한 용어에 대한 분노만큼, 여아와 젊은 여성들을 일상 속에서 놀이처럼 비하하는 여성혐오용어에 대한 분노도 같은 강도로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루의 창시와 전파 상의 차이를 거론한 각주에 대해 그것의 여성혐오적 용례의 맥락은 온전히 탈각하고 무시한 채, 제 3자에 의한 왜곡된 의미 전파의 책임을 여성혐오 용어를 비판한 학자에게 돌리며 학회차원의 공식사과를 종용하며 여성혐오 연구를 위축시키는 태도는 교수님의 혐오용어에 대한 성별 선택적 분노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N번방과 같은 디지털 성착취 시스템이라는 어마어마한 극한폭력의 구조를 파헤치고 폭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득권 집단의 은폐된 폭력의 심연을 타격하는 용어가 필요했고, 일반남성과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들의 발생학적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곤충발생학의 유비적 과정을 사용하며 ‘한남유충-한남충-관음충’의 용어를 전략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마치 백인들이 비백인인종들을 황인종, 흑인종으로 라벨링하며 사회적 차별의 근거로 썼을 때, 소수인종들이 다시 그들에게 홍인종이라는 용어로 반격함으로써 그들의 폭력적인 백인중심주의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키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거론된 전략적 분석용어들은 여성혐오 용어에 대한 소수자들의 반격의 용어이자 여성성착취 범죄에 대한 엄중한 중지 요구의 용어로 쓰여졌습니다.
또한 이 용어들은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들의 진화과정의 각 국면을 표기하는 용어이며 특정인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님을 밝히고자 합니다. 분석용어에 대한 반발로 제 논문 퇴출 주장 이전에, 무엇이 한국사회에서 이리도 디지털 성착취 시스템을 어린 세대에게 전파시켰고 다수의 아동, 여성피해자를 낳고 있는지, 이 견딜 수 없는 심층적 여성혐오 현상에 대해선 어떻게 학자로서 개입하고 관심을 갖고 계신지부터 밝혀주십시오. 기득권적 폭력구조를 타격하는 용어에 대한 분노보다는 심각한 범죄에 노출된 피기득권이 반격하는 용어가 유래한 시스템 자체에 분노할 줄 아는 이들이 많아야 이 사회는 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현상 분석 논문을 논문 바깥의 현안과 연결 지어 평가하는 것이 부당한가
몇몇 분석용어 논란으로 전체내용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를 벗어나, 제 연구주제와 목적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제 논문 서론 첫 줄을 꼼꼼히 읽으시면 됩니다: “본 논고는 불법촬영물이라는 특정 포획물을 기반으로 집단적으로 분포하는 ‘관음충’에 대한 철학적이며 형태발생학적인(morphogenetic) 고찰이 될 것이다. 형태발생학적 고찰이란 대한민국의 사회문화적 환경 안에서 디지털 성범죄 시스템을 추동시키는 ‘관음충’이라는 군집구성체(population)가 어떠한 조건과 성별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생장, 증식을 거듭하는가를 신물질주의적 관점에서 정밀히 추적함을 뜻한다.”
또한 교수님은 혐오용어의 해석은 학자나 논문 내재적인 것이 아닌, 외부 사회의 판단의 몫이지만, 논문에 대한 학문적 평가는 학문 외적인 사회적 맥락과 목적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상당히 상호모순적 주장을 동시에 펼치고 계십니다. 학자는 자신의 논문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외부집단의 그 어떠한 호도나 곡해에도 열려있으며 사과나 논문퇴출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 자신의 논문을 집필할 때는 사회적 맥락이나 목적으로부터 유리되어 논문을 내재적 내용만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이지요. 이 두 가지 상반된 비판기준은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지 모호할 따름입니다. 저는 제 논문 전체에서 버닝썬 스너프 필름 사건과 대중교통 불법촬영, 미성년 사촌여아 대상 불법촬영범죄들의 메커니즘을 분석사례로 정밀히 고찰하고 있는데 논문 외적인 사회현상의 맥락을 들고 와서 논문내용을 평가 받으려 하지 마시라니, 제 논문에 대한 철저한 오독과 경시를 하고 계신 것이 드러납니다. 학자는 철학자이든 사회학자이든 지금 여기, 이 사회의 가장 첨예한 문제와 현상에 대한 참여의식과 이론적 개입의 의무가 있으며 그것을 학문적으로 발전시킬 자유와 역량이 주어진다면 이를 연구주제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진리는 고전의 텍스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 이 시대의 비진리와 폭력들을 폭로하고 이에 저항함으로써 쟁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대적 진리를 찾고 계신 철학자로서, 여성혐오 용어 비판에 대한 사과종용과 남성가해자 집단을 타겟팅한 분석용어를 근거로 논문퇴출 압박을 행사하시는 것을 멈추어 주십시오.

윤지선 세종대 초빙교수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현대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천개의 고원' 용어분석론」, 「가부장제 의미경제 구조분석을 통한 인공 임신중절 담론 재고찰」, 「디지털 성범죄 시스템의 형이상학적 분쇄도」 등 논문을 쓰고 『철학자의 서재3』, 『탈코르셋 선언』 등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위원들은 침묵하는데, 정작 철학과 강사나 타 학문 영역의 교수, 학부생들이 비판하고 있는게 진리를 찾는다고 거들먹 거리던 화상들은 어디 갔는지 우습습니다.
윤지선씨. 당신이 기여한 것은 학계가 얼마나 썩었는지 대형 유튜버와 엮어서 널리 알렸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분들은 앞으로 평생 꼬리표 달고 사실 것 같네요. 세상 사는게 쉽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