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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선 논문이 촉발한 논쟁...한국 철학계에 남긴 교훈과 과제
윤지선 논문이 촉발한 논쟁...한국 철학계에 남긴 교훈과 과제
  • 최성호
  • 승인 2021.12.20 10: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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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선 박사의 반론에 대한 최성호 교수 재반론

논문에서 중요한 건 논거의 적절성과 논증의 타당성

진정한 학자는 논문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수용해야

윤지선 박사가 <교수신문>에 기고한 「“학술검토, 중립적 관점에서 해당 내용을 근거로 해야”」(제1093호, 2021년 12월 6일자>에 대해 최성호 경희대 교수(철학과)가 재반론을 보내왔다. 학술적 논쟁의 장을 마련하고 건전하고 타당한 담론이 오고갈 수 있도록 재반론을 게재한다. 

윤 박사는 “단 한 줄의 논문 인용구나 논거 반박이 제시되어 있지 않고 ‘저질, 잡문, 학문적 수준결여’라는 원색적이고 증오로 가득찬 기고자의 주관적 감정 표현들만이 난무합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최성호 교수는 「윤지선 논문, 연구윤리 이상없다?…진짜 문제는 ‘철학연구회’이다」(제1089호, 2021년 11월 8일자))를 통해 가톨릭대 연구진실성위원회가 내린 ‘연구부정행위없음(수정 후 논문)’를 지적했다. 교육부의 연구부정 개념이 협소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최 교수는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준이 아니라고 비판하며, 철학연구회의 심사 절차를 강력히 비판했다. 

철학연구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철학연구』의 표지.

저는 지난 기고문에서 윤지선 박사 논문 논란과 관련하여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은 윤지선 박사가 아니라 철학연구회라고 못박았습니다. 이번 기고문에서는 먼저 제가 그렇게 철학연구회에 책임을 물은 이유를 조금 더 상술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의 기고문에 대한 윤지선 박사의 비판에 답하겠습니다.  

 

철학연구회, 무엇이 문제인가

저는 사실 윤지선 박사 논문 논란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 철학계의 학술지 심사 및 편집 관행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제가 소속되어 있는 학회에 그와 관련하여 꾸준히 문제 제기를 했지만 아쉽게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톨릭대 판결문을 검토해 달라는 김보겸 씨의 부탁을 받고 오랜 고민 끝에 그 부탁을 수락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 철학계의 학술지 심사 및 편집에 대하여 평소 제가 가지고 있던 이런 문제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연구회가 이번 윤지선 박사 논문 논란과 관련하여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저의 주장에 대하여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철학연구회의 학술지 심사나 편집 관행이 여타의 철학(혹은 인문학) 학술지의 심사나 편집 관행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그렇다면 당신은 『철학연구』뿐 아니라 국내의 인문학 학술지 전반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요?”라고 질문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저의 답변은 “그렇다”입니다. 철학연구회의 학술지 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나아가 그것이 철학연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계 전반의 문제라는 것이 저의 인식입니다. 이제 그 이유를 찬찬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주제를 진지하게 검토하려면 먼저 한국어로 학문에 임하는 공동체의 규모가 아주 작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이제는 국제학술어로 정착된) 영어로 학문에 임하는 연구자들의 규모와 비교할 때 한국어 학문공동체의 규모는 너무나 작습니다 – 이렇게 학문 공동체의 규모가 작다 보니 국내의 학술지들은 대개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갖지 못하고 있고, 그런 이유로 학술지가 논문 발표자에게 게재료를 받는 기형적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학문공동체의 규모가 작은 것이 당연한 것이 전세계에서 한국어 언중의 규모 자체가 작기 때문입니다. 학문공동체의 규모가 작은 것이 왜 문제냐 하면 특정 세부 전공 분야로 들어갈 때 연구자의 풀(pool) 자체가 굉장히 협소해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프랑스 철학 전통에서 페미니즘 철학을 전공하는 학자라 하면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소수일 것입니다. 철학의 다른 세부 전공도 비슷합니다. 연구인력이 가뜩이나 부족한 인문학 분야에서 상황이 특히 심각한데, 세부전공의 연구자 풀이 워낙 소규모이다 보니 학술지의 논문 심사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를 안고 있습니다. 

 

연구자 풀 부족하고 학연·지연 등으로 익명심사 자체가 유명무실

현재 한국에서 발행되는 대부분의 학술지는 투고 논문이 제출되는 경우 그 투고 논문의 주제와 관련된 세부전공자들 위주로 구성된 3인의 익명심사자로부터 심사의견을 받고, 그 심사의견이 투고 논문의 학술지 게재 여부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부전공 연구자의 풀이 넓으면 이런 시스템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큰 문제가 없이 작동할 수 있는데 세부전공 연구자의 풀이 매우 작은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그것은 다양한 문제를 초래할 소지를 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투고 논문에 대한 익명심사를 맡게 될 세부전공 연구자들이 모두 한 다리만 건너도 학연이나 지연, 혹은 인맥이나 학맥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투고자의 이름을 가리고 익명심사를 한다고 하지만 투고자가 누구인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경우 역시 많습니다. 특히 윤지선 박사 논문의 경우처럼 이미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글을 학술지에 투고하는 경우 투고자가 누구인지는 세부전공자들 사이에서 이미 다 알려진 상태인지라 익명심사 자체가 유명무실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심사자의 투고 논문 심사가 논문 자체의 창의성이나 완성도에 의해서 결정되기보다 심사자와 투고자 사이의 인간 관계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다른 문제가 발생할 여지도 있습니다. 세부전공의 연구자 규모가 작다 보니 그들의 학문 수준이 전반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일 때, 혹은 그들이 특정한 정파적 입장을 공유하며 학문을 자신들의 정파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논문심사가 왜곡될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국내 학계의 고질적인 병폐...편집위원(장)은 권위와 책임 부족

문제는 현재 한국의 대다수 철학 학술지, 혹은 넓게는 인문학 학술지의 심사 및 편집 시스템에서 혹시라도 3인의 익명심사자에 의한 논문 심사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왜곡되고 변질될 때 그것을 바로 잡을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내 학계의 고질적인 병폐가 등장합니다. 그 병폐는 편집위원장, 혹은 편집위원이라는 직함을 학자들이 돌아가면서 쓰는 감투쯤으로 여기는 국내 학계의 풍조입니다. 학술지 편집진이 논문 심사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전술한 바의 왜곡을 바로잡아야 할 터인데, 현재 한국의 대다수 인문학계에서 학술지 편집위원장 혹은 편집위원이라는 직함은 어떠한 권위도, 전문성도, 권한도, 책임도 없는 행정직에 가깝습니다. 빈 껍데기의 허수아비 직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술지 운영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경력관리차원에서 편집위원장이나 편집위원 타이틀을 얻으려는 이들도 가끔 눈에 띕니다. 

권위, 전문성, 권한, 책임이 없다 보니 학술지를 통하여 양질의 논문이 발표되는지 저질의 논문이 발표되는지에 대하여 편집진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철학 연구』에 투고되었을 때 편집위원장을 포함하여 편집진 중 어느 누구도 그 논문을 제대로 한 번 정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단언합니다. 현재 학술지 운영 시스템 하에서 편집진이 굳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투고 논문을 정독할 이유가 하등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투고 논문의 평가는 오롯이 편집진이 선정한 세부전공 심사자 3인의 몫이 됩니다. 편집진이 투고 논문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그 게재여부에 대하여 3인의 세부전공 심사자의 판단을 무턱대고 따르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 한국 학계의 학술지 심사 및 편집 관행에서 세부전공자들의 심사 왜곡을 차단할 방법이 없습니다. 윤지선 박사의 논문과 같은 저질 텍스트가 『철학연구』를 통하여 버젓이 출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국내 학계의 관행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철학연구』를 통해 저질 논문이 발표된 것이 분명한데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질 텍스트가 학술지를 통해서 별다른 스크리닝 없이 발표될 때 그것이 한국 학계, 한층 넓게는 한국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칠지는 자명합니다. 윤지선 박사의 논문이 그 해악을 생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자명합니다. 학술지 편집진의 권위나 전문성을 키우고, 그러한 권위나 전문성에 맞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학술지 편집진이 세부전공 심사자들과 서로 견제와 균형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고, 혹시라도 심사자들이 왜곡된 심사의견을 낼 경우 편집진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권한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지선 박사의 논문 같은 저질 텍스트는 편집진 선에서 게재불가판정(desk reject)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학술지 편집진이 세부전공 심사자의 판정을 견제하고 보완할 수 있는 권한과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편집진의 역량이나 전문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편집진의 역량이나 전문성이 학계에서 널리 공인될 때 그 때 비로소 그러한 권한과 권위가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학계, 적어도 철학계는 학술지 편집진의 전문성이나 역량을 키우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편집위원장의 임기에 대한 규정만 봐도 그렇습니다. 철학연구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역대 임원진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데, 편집위원장이 2년마다 매번 새로운 사람으로 변경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 이 점은 타 학술지들의 경우에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2년이라는 기간은 새롭게 선임된 편집위원장이 학술지 운영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고 전문성을 쌓고 나름의 노하우를 습득하여 학술지 편집인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에는 턱없이 짧은 기간입니다. 경력관리 차원의 감투를 쓰는 기간으로 2년의 기간은 최적이지만 진정 우수한 학술지를 운영할 전문성, 역량, 노하우, 권위를 쌓기에 2년은 너무나 짧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편집진의 편집 역량이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하여 임기를 늘려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했지만 아쉽게도 큰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국제 철학계의 저명 학술지 중 『Mind』라는 학술지가 있습니다. 그 학술지의 역사에서 역대 편집위원장의 임기가 대부분 10년 이상입니다. 그 학술지를 통해 기념비적 논문들이 많이 발표되었던 20세기 초에는 G. E. Moore와 Gilbert Ryle이라는 당대의 거장들이 각각 25년 가까이 편집위원장을 맡으며 학술지의 권위를 책임졌습니다. 물론 이러한 해외의 사례를 그대로 한국에서 실행하기는 힘들 수도 있고, 세부적인 사항에 대하여 많은 토론과 숙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편집위원장이나 편집위원이 아무런 전문성도 권한도 없는 2년짜리 행정직으로 전락한 현재 국내의 학계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학계가 편집진의 전문성이나 권한에 대하여 고민하거나 성찰하지 않고 지금까지의 관행에 안주하는 복지부동의 자세로 일관한다면 제2, 제3의 윤지선 논문 사건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윤지선 박사 논문 논란을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보다 철학계를 포함하여 학계 전반이 학술지를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윤지선 박사님의 기고문에 답하며

지난 번 제 교수신문 기고문에 대한 윤지선 박사님의 답신 잘 보았습니다. 윤지선 박사님의 답신에 대해서 제가 굳이 또 답변할 필요가 있는지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사안이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 학계 전반의 고질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는 만큼 부족하나마 답변드리겠습니다.  

지난번 기고문에서 저는 윤지선 박사님의 논문을 ‘잡문’, ‘저질 텍스트’, ‘함량 미달 논문’ 등으로 평가했는데, 그런 저의 평가로 인해 윤 박사님의 마음이 많이 상하셨을 듯합니다. 최근 김보겸 씨와 송사에도 휘말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윤 박사님께서 참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인간적으로 안타깝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시고 훌륭한 페미니스트 철학자로 다시 일어서시기를 기원합니다. 의례적인 말이 아닙니다. 진심을 담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윤지선 박사님의 논문 「‘관음충’의 발생학」을 여러 번 읽기는 했지만 솔직히 제가 그 논문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씀 드리지는 못할 듯합니다. 논문의 큰 논지(현재 한국 사회에 남성중심적 성문화가 만연해 있고, 그런 성문화가 어린 남자 아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 논지를 펴기 위해서 윤지선 박사님이 동원하신 현란한 어휘나 수사는 상당히 낯설고 난해했습니다. 윤지선 박사님은 그것이 저의 무지함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비교적 평이한 논지를 전개하기 위하여 억지스러운 철학이론을 도입하고, 나아가 장황하고 현학적인 어휘나 수사를 불필요하게 남용하신다는 느낌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지난 번 기고문을 준비하며 저는 윤 박사님의 논문을 평가한 다른 학자분들(김우재 교수님, 이충진 교수님, 이준효 박사님 등)의 글 역시 접했습니다. 그 분들의 글을 꼼꼼히 읽고 제가 내린 결론은 윤 박사님의 논문에 대한 그 학자분들의 평가가 공정하고 또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윤 박사님 논문에 대한 저의 판단, 그리고 그 학자분들의 평가 등을 종합하여 저는 윤 박사님의 논문이 엉터리 저질 논문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윤 박사님의 논문이 엉터리 저질 논문이라는 저의 판단이 아무런 근거 없이 오직 선입견이나 편견에서 비롯한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 많은 학자들이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굳이 나서서 윤 박사님의 논문을 야박하게 평가하는지 궁금하시다면, 그런 야박한 평가가 부당하다고 느끼신다면, 그런 평가를 내리는 분들의 글들을 다시 한번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관음충’의 발생학: 한국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의 추이에 대한 신물질주의적 분석」은 2019년 12월 『철학연구』 127호에 실렸다. 올해 상반기부터 윤지선 박사 논문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이미지=교수신문 DB

그런데 윤 박사님의 지난 <교수신문> 기고문을 읽으며 저는 상당히 난처한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한데, 저는 윤 박사님의 기고문을 읽으며 과연 윤 박사님께서 학자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읽기와 쓰기 능력을 제대로 갖추었는지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들뢰즈도 중요하고, 과타리도 중요하고, 데란다도 중요하지만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읽기와 쓰기입니다. 읽기와 쓰기는 학문의 기본 중의 기본인데 윤 박사님의 지난 기고문은 그 부분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어 보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윤 박사님의 지난 기고문을 보면서 윤 박사님께서 비교적 평이한 저의 기고문조차 오독하는 것을 보고, 사실과 다르거나 터무니 없는 주장을 너무 쉽게 제기하시는 것을 보고 적잖게 놀랐습니다. 너무 많아서 여기서 다 다루기조차 힘들 지경입니다. 대표적인 것만 몇 개 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윤 박사님: “해당 기고문에는 ...‘저질, 잡문, 학문적 수준결여’라는 원색적이고 증오로 가득찬 기고자의 주관적 감정 표현들만이 난무합니다”; “근간에서 느껴지는 증오와 경멸의 정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생산적인 학술적 논쟁이나 논리적 반박마저 전무한, 오로지 폄하와 호도의 표현 일색으로 한 연구자를 끝까지 공격하는 집요함의 원천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스스로를 되돌아 보시길 바랍니다.”

제 기고문에 대한 명백한 오독이자 왜곡입니다. 분명 저는 지난 기고문에서 윤 박사님의 논문을 평가하며 ‘저질’, ‘잡문’, ‘함량 미달’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윤 박사님의 논문은 진정 저질 잡문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윤 박사님을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윤 박사님을 집요하게 공격할 뜻도 전혀 없습니다. 제가 왜 윤 박사님을 증오합니까? 제가 왜 윤 박사님을 공격합니까? 형편 없는 과제물을 제출한 학생에게 낮은 평가 점수를 준다는 것이 그 학생을 증오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학생을 공격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과제물을 과제물 자체로 평가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윤 박사님을 증오하지도 않고 윤 박사님을 공격할 의도도 전혀 없이 윤 박사님의 논문을 그것 자체로 평가했습니다. 

혹시 ‘저질’이나 ‘잡문’과 같은 용어들 때문에 제가 윤 박사님을 증오한다고 오해하실 수도 있을 듯한데, 그것들은 윤지선이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윤 박사님의 논문에 대한 저의 부정적 평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논문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 때문이라고, 자기 자신을 인격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윤 박사님의 태도는 결코 건강한 학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논문이나 주장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인격에 대한 증오나 공격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진정한 학자라 할 수 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비록 제가 윤 박사님의 논문, 그리고 그 논문이 사회적 논란이 된 이후 윤 박사님이 보여준 태도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이지만, 그럼에도 저는 아직 윤지선이라는 한 개인에 대해서는 동료 철학자로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의 고충을 학자로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로 삼으시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층 훌륭한 철학자로 거듭나시기를 진심으로 희망하고 있습니다. 의례적으로 드리는 말씀도 아니고 비꼬려고 드리는 말씀도 아닙니다. 윤지선 개인을 위해서도 그렇고, 또 한국의 철학계를 위해서도 그렇고 진심으로 그렇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2. 윤 박사님: “최성호 교수는 논문 필자와 법적 공방으로 얽혀있는 이해관계자 김보겸 씨의 직접적 요청을 받고 해당 칼럼을 작성하며 논문 검토자로서의 중립적 관점을 스스로가 전혀 개의치 않음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 검토 의뢰자의 개인적 읍소에 기대어 편향된 관점으로 논문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제 기고문에 대한 오독이고 왜곡입니다. 윤 박사님. 김보겸 씨가 제게 읍소를 했다고 쓰셨는데,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아셨는지요? 저는 지난 기고문에서 김보겸 씨가 제게 가톨릭대 결정문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고만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부탁과 읍소는 명백히 다른 것입니다. 읍소하지 않으면서 부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김보겸 씨가 제게 읍소했다고 쓰셨는데, 윤 박사님, 그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지요? 아무 근거 없이 그런 말씀하신 거라면 그것은 허위사실 유포입니다. 실상 김보겸 씨는 제가 가톨릭대 결정문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을 뿐 읍소하지는 않았습니다. 본인이 직접 확인도 하지 않은 사안에 대하여 함부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 학자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김보겸 씨 부탁으로 가톨릭대 결정문을 평가한 만큼 제가 “논문 검토자로서의 중립적 관점을 스스로가 전혀 개의치” 않고 지난 기고문을 작성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런 식을 말씀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김보겸 씨가 저의 의견을 부탁했다는 이유만으로 제가 김보겸 씨에게 유리한 의견을 제시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다시 한번 허위 사실을 유포하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설사 김보겸 씨가 아니라 윤 박사님이 가톨릭대 판결문을 검토해 달라고 제게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윤 박사님 논문에 대한 저의 평가는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저에게 부탁했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 윤 박사님의 논문 그리고 가톨릭대의 판결문만 보고 지난 기고문을 작성했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시는 것이 곤궁해지니 자꾸 허위 사실을 만들어내시는데 그것 아주 잘못된 행태입니다. 시정하시기 바랍니다. 

3. 윤 박사님: “그것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불고 있는, 소위 ‘남혐표지’로 의심되는 그 모든 것을 삭제시키고 사과시키고 마녀사냥하는, 반여성주의 물결의 광풍의 정동과 맞닿아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디지털 성착취 범죄 가해자 발생시스템이라는 가장 심각한 여성혐오 현상을 분석한 논문을 남성혐오 논문으로 낙인찍는 행위가 앞으로 여성학이나 여성혐오분석 연구자들에게 어떠한 효과를 양산할 지를 진지하게 고찰해보십시오”; “일상화된 여성혐오의 놀이화, 디지털 성착취 가해자의 조기화 현상과 사회적 묵인과정을 고발, 분석하는 제 논문을 한국남성기득권 사회가 이리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여성혐오는 없다’는 굳건한 믿음의 남성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심각하게 교란시키기 때문이겠죠”

여기서 윤 박사님은 전가의 보도처럼 또다시 여성혐오/남성혐오 구도를 이용하여 자신의 저질 텍스트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윤 박사님 논문에 대한 저의 평가는 남성기득권, 반여성주의, 여성혐오 등과 하등 무관합니다. 저의 평가 기준은 핵심 논제의 신빙성, 논의의 일관성과 명료성, 논거의 적절성, 논증의 타당성 등이고, 그 기준에 따라 윤 박사님의 논문은 함량 미달이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위에서 윤 박사님은 본인의 글에 대한 저의 평가가 앞으로 여성학 연구자들에게 어떠한 효과를 양산할지를 진지하게 고찰해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윤 박사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셨으니 제가 지금부터 고찰해 보겠습니다. 제가 지난 기고문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 역시 윤 박사님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철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세기 서구의 페미니즘 운동과 페미니즘 이론이 성취한 정치적, 사회적, 학문적 성과를 우리 사회가 건설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최근 한국의 젊은 남성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반여성주의적 흐름을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 디지털 성착취 범죄와 같은 잔혹한 범죄가 횡행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범죄는 그것대로 뿌리를 뽑아야 하고, 또 필요하다면 그러한 범죄의 사회구조적인 원인을 추적하는 연구도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연구도 기본적으로 학술 연구인 만큼 학문의 기본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윤지선 박사님의 논문처럼 학술적으로도 함량 미달일 뿐만 아니라 연구윤리적인 측면에서도 비난 받을 소지가 많은 글들이 자꾸 발표된다면 그것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반여성주의 흐름에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엉터리 저질 논문을 양산하며 남성혐오/여성혐오를 부추기는 윤 박사님 같은 분이 한국 여성학계의 발전, 그리고 성평등에 대한 건전한 공론장의 형성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윤지선 박사님의 기고문에 보이는 몇 가지 중대한 오류를 지적하였습니다. 그 이외도 오류가 많지만 지면관계상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저의 피드백이 윤지선 박사님의 기초적인 읽기와 쓰기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쉽게도 저에게 여러 다른 업무가 산적해 있는 관계로 윤지선 박사님의 글에 대하여 더 이상의 피드백을 드리기는 힘들 듯합니다.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최성호

경희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과학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 전임강사, 캐나다 퀸스대 철학과 조교수를 역임했다.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그럼 군대 다녀온 나는 비양심적이란 말이냐』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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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배 2021-12-22 20:13:06
젊잖게 이야기를 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고집만 부리는 사람을 학계에서 동료로 인정하기 어렵지요.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것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터인데 이상하게도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일부 사람들은 남을 설득할 능력이 부실합니다. 특히 어디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마치 헛소리를 해도 권위가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인지 되도안한 주장을 반복합니다. 저런 부실한 독해력으로 무슨 연구를 하겠다는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예전에 여성운동을 한다는 어느 분과 대화를 하면서 정말 무슨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윤교수의 반론을 보면 딱 그 느낌을 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