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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산 자는 죽은 자의 힘에 의해 지탱되고, 죽은 자는 산 자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최재목의 무덤기행] 산 자는 죽은 자의 힘에 의해 지탱되고, 죽은 자는 산 자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 최재목 영남대·철학과/시인
  • 승인 2018.11.0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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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_ “무덤에서 삶을 생각하다” 2-② 소록도 만령당(萬靈堂)을 찾다

내 ‘기억’ 속의 소록도는

나는 잠시 내 ‘기억’ 속의 소록도를 솔직하게 정리해보고 싶다. 자주 가보거나 깊이 연구하지 않고 채 그냥 듣고 배워오면서 무의식 속에 기억된 것들은 이런 것이다 : (1) 일제강점기의 한센병자들의 집단 격리수용, 탄압, 강제 노역, 죽음, 아픔, 슬픔, 연약함, 상처, (2) 한센인들에게 '할매 수녀'로 불리던 오스트리아인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의 40년간 희생 봉사 정신. (3) 연약한 상처 입은 어린 사슴 같은 섬. 

자, 그렇다면, 나는 이런 기억들을 어떻게 많은 특수한 기억을 가진 타자들, 아니 그런 기억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소록도라는 아름다운 자연을, 언제까지 저런 역사의 기억 속에다 말뚝처럼 묶어두고자 하는가? 이제 나의 공부는 여기부터이다. 

과거의 기억, 다행? 혹은 불행?

‘기억’과 ‘기록’은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무한한 내용 중에 어떤 것을, 왜,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가? 참 어려운 문제이다. 역사의 기록을 두고,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할 것인가가 늘 논쟁거리이다. 기억 가운데서 특히 ‘공동의 기억’ 관리에 이르면 마찬가지로 복잡해진다. 가족, 동네, 사회, 국가가 공동으로 가지는 역사의 기억은 ‘우리’라는 집단의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역사적 기억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에는 예민해야 한다. ‘우리’라는 공동체는, 기억을 근거로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를 이해하며 어떤 미래로 나아갈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억이란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 즉 ‘사람다움’의 핵심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리거나 의식을 잃은 식물인간이라면 기억할 수조차 없어 인간생활이 어렵다. 계속 망각하기 때문에 비역사적인 동물들처럼. 그러나 지겨우리만큼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인간들도 가끔 동물처럼 망각하며 과거를 싸악 지워버릴 때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 건강을 위하여 모두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다. 니체가 『반시대적 고찰』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그대 옆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지나가는 가축의 무리를 보라. 그들은 어제가 무엇이고 오늘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마구 먹어 대고, 한가롭게 쉬면서 소화시키고, 그리고 또다시 뛰어다닌다. 이처럼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마다, 그들의 유쾌와 불쾌, 즉 순간이라는 말뚝에 묶여서 산다. 그래서 그들은 우울도 권태도 느끼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인간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동물들 앞에서 자신이 인간임을 자랑하면서도, 동물의 행복에 부러운 듯한 시선을 던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동물처럼 권태도 없고 고통도 없이 살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는 동물처럼 살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에게 한번 이렇게 묻는다고 하자. 즉 “왜 그대는 그대의 행복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고, 그저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가?” 하고, 그러면 동물 역시 다음과 같이 대답하려 할 것이다. 즉 “그것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언제나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바로, 이 동물은 이 대답마저도 잊고서 입을 다물어 버릴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망각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늘 지나간 과거에 매달려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가 아무리 멀리, 아무리 빨리 달려가더라도, 그 쇠사슬은 언제나 함께 따라다닌다. … 그때 인간은 … 금방 잊어버리고 모든 순간마다 정말 죽어 버리고 안개와 어둠 속에 잠겨서 영원히 사라져 가는 동물을 부러워한다. 이처럼 동물은 비역사적으로 살아간다. …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개인이나 민족이나 문화의 건강에 대하여 똑같이 필요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제 2 편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반시대적 고찰』, 임수길 옮김, 청하, 1982, 109-111쪽

식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물들은 지속해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과거도 죽음도 원한도 번민도 없다. 역사와 제도, 문명을 창출할 수도 없다. 물론 멀쩡한 우리 인간들은 거꾸로 과거에 너무 집착한다. 그 잘못된 기억을 집단화하여 자기중심의 피해의식을 특수화하여, 폭력적 행동으로 분출해가기도 한다. 그래서 개인 혹은 집단의 특수한 기억이 타자 다수와 글로벌의 기억으로 공감되고, 소통하고, 지지받으려면, 휴머니즘-인권-평화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와 연결하는 ‘시선’, ‘방향’, ‘스토리텔링’에 눈 떠야 하리라.   

‘기억의 윤리’를 떠올리며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살아있는 자들은, 그들을 말해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을 갚는 길은 일단 그들을 기억해주고 기려주는 일이리라. 기억해주는 것이 하나의 윤리라는 것을 알아야 하리라. 

아비샤이 마갤릿(Avishai Margalit: 1939)은 『기억의 윤리』 (The Ethics of Memory)에서 아우슈비츠 대학살(홀로코스트) 이후의 윤리가 어떻게 가능할까를 캐묻는다. 흥미롭게도 그는 ‘종교’를 대체할 것으로서 ‘기억’을 거론한다.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있는 자의 기억에 의지하여, 그것을 계승해 가는 가운데 윤리가 생겨난다고 본다. 기억은 개인적인 것도 있고, 집단적인 것도 있으며, 좋은-기쁜 기억도 있고 나쁜-아픈 기억도 있다. 당연히 윤리와 연관 지을 것은 ‘집단적’/‘나쁜-아픈’ 기억이다. 이것을 그는 윤리 문제로 끌고 간다. 이 경우 윤리란 ‘짙은 인간관계’(the thick relationships)로서, ‘옅은 인간관계’(the thin relationships)인 도덕과 구별된다. 기억은 윤리 즉 ‘진한 인간관계’ 속에서 공유, 계승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짙은 인간관계’가 도덕이고, 윤리는 ‘옅은 인간관계’가 아니냐고 반론할 수도 있으리라. 마갤릿이 말하는 기억의 윤리란 일반론적으로도 풀이할 수 있겠지만, 논의의 심층에는 홀로코스트라는 기억이 어떻게 ‘유대민족 공동체의 기억’이 되고, 그들 윤리의 기초가 될 수 있겠냐는, 매우 구체적인 문제를 붙들고 있다. 참고로 그의 부모는 팔레스타인에 있었기에 화를 면했지만, 그의 친척들은 유럽에 있었기에 나치에게 모두 희생당했다 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로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썼다. 거기서 그녀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라고 아이히만을 표현했다. 나 자신도 일상 속에서 얼마나 크고 작은 악들을 그냥 무덤덤하게 넘겨버리고 있는가. 그 평범함에 젖어 생각하기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반성 속에서 나는 내 내면에 무언가로부터 큰 빚을 지고 살고 있음을 알았다.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기억해주지 않는, ‘아무 생각 없는’ 이런 평범함도 하나의 ‘악’임을, 그런 것에 대해 내가 무감각해졌음을, 그런 아무 생각 없음(=무사유)에 대해 나 스스로 폭로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억울한 죽음을 기억해주는 일이 하나의 윤리임을 말하고 싶어진 것이다. 

몇 년 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門) 인근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 들렀을 때, 눈에 들어온 2,711개의 사각의 콘크리트 조형물이 히틀러에 의해 죽어 간 수많은 유대인의 관이자 무덤이며, 침묵으로 시위하는 비석임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 무언의 아픔을 가슴 깊이, 지성적으로 기억해주는 일이 윤리임을,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사각의 콘크리트 조형물

생각해보면 이 순간 내가 읽고 있는 책, 생각하고 있는 개념들, 쳐다보는 있는 저 오래된 건물, 누리고 있는 문화와 제도 등등 죽은 자들 없이는 무엇 하나 가능한 것이 없었다. 먹으며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죽이고 있는 일이다. 산 자는 죽은 자의 힘에 의해 지탱되고, 죽은 자는 산 자에 의해 기억되고 있다. 이런 신비로운 사실을 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윤리 혹은 종교 세계에 참여하고 있음을 환기해본다.        

‘엉 엉 못 살고 죽은 생령(生靈)’의 땅으로 

이튿날 이침에도 줄곧 비는 퍼붓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소록도를 향한다. 여수에서 한 시간가량을 달려 고흥에 도착, 드디어 소록대교를 건넌다. 마음은 벌써 ‘구천을 맴도는 넋[靈]이 일만[萬]이라’는 ‘만령당’(萬靈堂)에 가 닿아있다.

소록도에서 본 소록대교
소록도에서 본 소록대교

최재목 영남대·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 석·박사를 했다. 양명학·동아시아철학사상 전공으로 한국양명학회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등이,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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