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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자혜라는 미소 머금은 제국의 의료제도 ‘자혜(慈惠)+병원’
[최재목의 무덤기행] 자혜라는 미소 머금은 제국의 의료제도 ‘자혜(慈惠)+병원’
  • 최재목 영남대·철학과/시인
  • 승인 2018.11.2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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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_ “무덤에서 삶을 생각하다” 2-③ 소록도 만령당(萬靈堂)을 찾다

검문소(檢問所), 모든 검문은 두렵다

소록도에 도착, 주차장을 찾는다. 들어서기 전에 검문소에서, “왜 왔느냐?”, “차는 몰고 들어갈 수 없으니,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 들어가라”고 한다. 그때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아, 이곳이 단속과 통제가 있는 곳임을. ‘검문소’란, 보통 ‘군・관(軍・官)’의 용어로, ‘범죄 수사나 치안 유지를 위하여 군인이나 경찰이 통행인을 막고 인적 사항을 묻거나 소지품 및 차량 따위를 검사하는 곳’이다. 과거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수시로 검문받은 기억이 있어, 검문이란 말에는 무조건 긴장하고 만다.
‘만령당’에 가고 싶다 하니, “그곳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기에 사전 허가 없이는 못 들어간다.”고 한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릴 거 같은 예감이 살짝 들었다. 어쨌거나 ‘왔으니 들어가 보자’ 하고, 비 그친 길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한하운의 ‘추석달’ 생각

가을이 다가온 숲 근처, 비를 털며 갈대가 서걱이는데, 추석을 앞두고 한하운의 시 ‘추석(秋夕) 달’이 떠오른다.

소록도 철조망의 이동
소록도 철조망의 이동

추석 달은 밝은데//갈대꽃 위에/돌아가신 어머님 환영(幻影)이 쓰러지고 쓰러지곤 한다.//추석 달은 밝은데//내 조상에/문둥이 장손은 차례(茶禮)도 없다.//추석 달/추석 달//어처구니없는 8월 한가위/밝은 달이다.(「추석(秋夕) 달」 전문)1) 
 

한하운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애상을 읊은 시이다. “어머님은 문둥이가 된 마지막까지 나를 옛날과 다름없이 사랑하여 주셨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경원(敬遠)하고 나의 주변에서 외면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어머님만은 나에게 있어서 전 인류의 마지막까지의 단 한 분이었다.” 2)  “우시면서 비바람 속에서 눈보라 속에서” 기도를 올리신3)  자신의 어머니에게 한하운은 시를 써서 바친다. 모든 어머니에게, 위대한 모성에 무조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갈대꽃 위로 쓰러지는 한가위 보름달의 환영에서, 그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얼굴을 만났다. 분명 그것은 시인 내면 깊은 곳으로 타박타박 눈물로 걸어 들면 떠오르던, 이 지상에는 계시지 않는 그의 어머니 즉 관세음보살이었으리라. 

푸른 관세음보살상
적조(寂照) 속 자비의 열반(涅槃)
‧ ‧ ‧
세세생생(世世生生)
귀의하여 살고 싶어라.(「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 일부)4)

 

제국의 미소 띤 얼굴 ‘자혜(慈惠)+병원’

국립소록도병원은, ‘소록도자혜원’(1916.2.24)→‘소록도갱생원’(1934)→‘중앙나요양소’(1949)→‘소록도갱생원’(1957)→‘국립나병원’(1968)→‘국립소록도병원’(1982) 식으로 개칭되어 왔다. 처음 만들어진 ‘소록도자혜원’은 총독부령으로 이루어진 19번째의 ‘자혜병원’이다.
‘자혜(慈惠)’라. 영어 charity의 번역어인데, 성서에서 말한 기독교적 사랑을 뜻한다. 위에서 베풀어져서 내려오는 사랑이다. 천황을 천주에다 오버랩 시켜 간편하게 대중에게 ‘은혜’를 알리는 전략으로서는 탁월한 것이었다. 이런 자혜와 병원이 결합하여 생겨난 ‘자혜+병원’은, 일제강점기인 1909년(융희 3년) 8월, 전주, 청주, 함흥 지방에 처음 세워지는 관립 병원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전국에 40여 곳으로 확대되어 광복 시까지 의료기관 역할을 한다. 일본에서는 어떤가. 1882년 8월 타카키 카네히로(高木兼寛)가 유지공립동경병원(有志共立東京病院)을 연 뒤, 1887년 4월 당시 황후(皇后)였던 쇼켄 황태후(昭憲皇太后)가 ‘자혜라는 이름을 내려’ 동경자혜의원(東京慈惠醫院)으로 개칭한다. 아울러 1898년 쿠마모토시에 자혜진료소(慈惠診療所)가 프랑스 출신 선교사 장 마리 콜 신부 등에 의해 설치된다. 이렇게 보면 자혜라는 말은 일본이 ‘근대+서구+기독교+의료’를 발 빠르게 번안하여 제국의 의료제도로 구현해 간 것이다. 이 버전은 일본 내지와 호응하며 식민지 조선에도 이식된다. ‘미녀’ 모습을 한 서구 문명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은, ‘야수=야만’의 아시아 지배를 가장 쉽고도 효율적으로 코드화 해내는 명분이었다. 질병에 대항하는 의료-위생의 가운을 입힌 ‘선한 이미지’를 한 검은 지배의 손길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황포돛배를 타고, ‘자혜’라는 따사로운 미소를 머금고서, 백조처럼 유유히 식민 공간을 이곳저곳 배회하게 된다. 

절대격리라는 비극을 희화화한 ‘수탄장(愁嘆場)’ 

국립소록도병원을 찾는 경우 처음 만나는 곳은 ‘탄식의 장소’ 수탄장(愁嘆場) 유적지이다. 그런데 ‘수탄장’이란 게 뭐며, ‘언제, 왜’ 이 말이 붙여진 것일까? 찾아봐도 별 뾰족한 기록이 없다.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에 따르면 이렇다: 1948년 4월 15일 김상태 광주의대 교수가 소록도갱생원 제8대 원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일제 치하 소록도갱생원에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서 ‘자신에게 익숙한 통제방식을 재생’시켰다. 광복 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소록도갱생원에도 환자들을 위한 제도적 개선들이 이뤄지고는 있었으나, 3년이 되지도 않은 짧은 시간에 제도들은 환원되고 통제 위주의 질서가 재확립되었던 것이다.5)  다시 말하면, “‘절대격리’의 상징이던 직원지대(職員地帶)와 병사지대(病舍地帶)를 무독지대(無毒地帶), 유독지대(有毒地帶)로 했던 구분을 부활시켜, 엄격한 경계선을 재확립하였다. 장안리를 경계로 남북으로 아카시아 나무를 심고 거기에 철조망을 쳤으며, 병사지대로 통하는 도로 입구에는 건물 2동을 지어 감시소와 면회실을 설치하였다. (…) 환자를 면회 온 방문객들은 절차를 마친 후 면회실에서 대기하고 해당 환자가 오면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면회를 해야 했다. 특히 직원지대 보육소에서 지내던 자녀들과 부모들의 면회도 자유롭게 이뤄지지 못했다. 부모와 자녀는 경계선 도로 양쪽 끝에 일렬로 서서 월 1회 면회를 해야 했다. 자녀는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맞는 위치에 선 채, 2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만지거나 안아볼 수 없었다.”6) 

수탄장유적 설명문
수탄장유적 설명문

병을 이유로 철조망까지 쳐서 혈육을 단절시켜버렸다니. 삼팔선 철책이나 형무소 담장 같은 ‘절대격리’의 방식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쓰라린 상처를 남긴다. 이러한 발상법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서기재의 「한센병을 둘러싼 제국의학의 근대사 - 일본어 미디어를 통해 본 대중관리의 전략 -」에서 밝히듯이, 일본이 자국 및 식민지 조선의 한센병 환자들을 절대격리하게 된 것은 ‘문명국가 건설의 과잉’에서 비롯된다. 1897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차 ‘국제나회의(國際癩會議)’ 이후, 베르겐의 제2차 회의, 스트라스부르의 제3차, 카이로의 제4차 회의에서 이루어진 국제적 논의는 ‘환자의 승낙에 의한 격리’나 ‘집 근처에서의 인도적 격리’, ‘합리적 퇴소의 보증’처럼 절대격리가 아니었다.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서 일탈한 것은 제3차 회의에서 일본(식민지 포함) 한센인이 10만 명을 넘는다는 보고 때문이다. 이 회의에 참가했던 ‘구라(救癩. 한센병을 구함)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쓰다 겐스케(光田健輔)가 ‘야만적이고 미개한 원주민에게 만연한 나병이 순결한 혈통의 일본인에게 많다는 보고는 서양 국가에 대한 굴욕적 사실이라는 개탄하며 한센인 격리를 주장’한 데 따른 것이다.7) 
 
절대격리의 구획과 동시에 철조망이 사용된 것은, 소록도갱생원 제8대 김상태 원장이 위의 ‘(일제강점기의) 절대격리 …… 구분을 부활시켜, 엄격한 경계선을 재확립하였다’는 기록을 참고한다면, 소록도자혜원 설립(1916.2.24) 당시로 추정된다. 『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에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일제강점기 소록도는 직원지대와 환자지대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직원지대를 「무독지대」, 환자지대를 「유독지대」로 칭한 경계선을 구획하였다. 남북으로 이어진 철조망을 쳤으며 …… 광복 이후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아 경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환자들을 엄격하게 다루었다.”8)
 같은 책에 소개된 지도를 보면, 철조망 설치는 1916년 자혜의원 설립 당시에는 섬의 안쪽에, 1933년 이후에는 중간쯤에, 1947년 이후에는 섬 바깥쪽으로 이동해왔음을 알 수 있다.9)[도판5-2]. 소록도 관계자는 그 철조망이 50, 60년대 이후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혈육이 접촉 불허 상태로 쳐다보면서 눈물을 펑펑 쏟던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탄식의 장소’라는 뜻으로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렀다고 한다. [도판5-1]
이쯤에서, 나는 기존의 기록과 기억을 약간 수정해 두고 싶다. ‘수탄’은 ‘근심하고[愁] 탄식함[嘆]’인데, ‘장’은 ‘장소’가 아니라 ‘장면(혹은 국면)’의 뜻이다. 왜냐하면 수탄장은 일본어의 ‘슈탄바’(しゅうたんば) - ‘수탄장’(愁歎場)이라 쓰기도 함 - 에서 온 것으로, 우리 문화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낯선 용어이다. 일본의 전통극 죠루리(浄瑠璃)나 가부키(歌舞伎)에서, 부모와 자식, 부부 등의 생이별, 사별 같은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비극적인 장면을 말하는 용어이다. 이런 일본 전통 연극용어가 ‘언제?, 왜?’ 한센병 환자 가족들의 비극적 면회 장면에 차용된 것일까. ‘장(場)’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어인데, ‘장면’의 뜻이어야 할 것이 슬쩍 ‘장소’로 바뀌면서, 일본 전통 연극 용어라는 신분은 은폐돼버렸다. 가부키 용어로서 우리에게 보편화한 ‘18번’(十八番. 쥬하치방)처럼, 수탄장이 소록도 이미지 가운데 18번쯤으로 희화화(戱畵化)되는 씁쓸함을 차마 지울 수가 없다. 여하튼 내가 상기시키고 싶은 것은 ‘언제, 누가, 왜’ 그렇게 불렸겠느냐는 점이다. 이 물음은 감사하게도 서기재의 값진 연구 「한센병을 둘러싼 제국의학의 근대사 - 일본어 미디어를 통해 본 대중관리의 전략 -」을 읽고서,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관련 내용을, 서기재의 연구에 의거하여, 아래에서 좀 더 간추려 정리해두고자 한다. (다음 호로 이어짐)


1) 한하운, 『전집』, 71쪽
2) 한하운, 「추석(秋夕)달」, 『전집』, 680쪽.
3) 한하운, 「추석(秋夕)달」, 『전집』, 680쪽.
4) 한하운, 『전집』, 94쪽
5) 정근식 책임편집,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역사편) (국립소록도병원, 2017), 157쪽. 아울러 정근식 책임편집, 『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국립소록도병원, 2017), 86쪽 참조.
6) 정근식 책임편집, 위의 책, 156-7쪽(인용문은 필자가 일부 문장을 수정, 보완하였음).
7) 서기재, 「한센병을 둘러싼 제국의학의 근대사 - 일본어 미디어를 통해 본 대중관리의 전략 -」, 『의사학』 제26권 제3호 (대한의사학회, 2017.12), 420-4쪽 참조.
8) 정근식 책임편집, 『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국립소록도병원, 2017), 37쪽.
9) 정근식 책임편집, 위의 책, 37쪽.

 

최재목 영남대·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 석·박사를 했다. 양명학·동아시아철학사상 전공으로 한국양명학회와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등이,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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