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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 양명학, 동방학, 퇴계학…전공 벽 넘는 종횡무진의 글쓰기 동력은 ‘호기심’
불교학, 양명학, 동방학, 퇴계학…전공 벽 넘는 종횡무진의 글쓰기 동력은 ‘호기심’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3.05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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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 10권의 저서 잇따라 내놓은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과)

學人, 연구자에게 저서는 그것이 어떤 형식이든 값지게 마련이다. 신년부터 잇따라 저서를 내놓고 있는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과)에게 ‘저서’는 어떤 의미일까. 시인이자 양명학 연구자인 그가 최근 선보인 책들은 그의 사색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인문에세이에서부터 불교학, 양명학, 한국철학일반까지 다양하고 다채롭다. 그는 어떻게 이런 지적 스펙트럼을 빚어낼 수 있는 걸까.

일단 그가 최근까지 선보인 책들의 목록은 이렇다. 『상처의 형식과 시학: 최재목 시·문화 평론』, 『터벅터벅의 형식』(인문에세이), 『길 위의 인문학 : ‘희(希)’의 상실, 고전과 낭만의 상처』(인문에세이), 『방법·은유·기획의 사상사』(한국철학일반), 『양명학의 새로운 지평: 숨은 얼굴 드러난 얼굴』(양명학), 『상상의 불교학: 릴케에서 탄허까지』(불교학),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 강화의 지성』(양명학). 

여기에 조만간 세 권의 책(퇴계학, 한국문화(에세이), 동방학)이 덧붙여질 예정이다. 이들 저서는 모두 ‘지식과 교양’이란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다. 이메일로 그를 만났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에세이의 본령은, 지상의 생명 현상을 설명하고 논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하다고 묘사하고 서사하려는 정신입니다."
"에세이의 본령은, 지상의 생명 현상을 설명하고 논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하다고 묘사하고 서사하려는 정신입니다."

△ 앞으로 덧붙여질 세 권은 어떤 책인지요.
“예, 세 권입니다. 먼저, 『근현대기 퇴계 초상의 탄생: 이미지로서의 퇴계학』입니다. 이 책은 근현대기 출현한 퇴계의 초상들을 통하여 이 시기가 만들어낸 퇴계의 이미지로 퇴계학을 재검토해보려는 시도입니다. 다음으로, 『한국문화의 현상학: 언덕의 시학』입니다. 그동안 제가 구상하고 펼쳐냈던 한국문화의 현상에 대한 논의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제가 새로 구상한 ‘언덕’에 대한 시학(=미학)을 정리한 에세이도 포함돼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범부 김정설: 동방학의 탄생』입니다. 이 책은 근현대기 재야사상가, 이데올로그로서 한때 박정희의 멘토였기도 했던(이 점 때문에 오해도 있어왔다) 범부 김정설이, 1966년 사망하기 전까지 펼쳐냈던 사상 가운데, ‘동(東)’, ‘동학’, ‘동방학’의 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모두 몇 년간 고민했던 주제들입니다.”       

△ 이번 출간 목록을 보면, 저자의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에서부터 철학 방법론까지 다양한 지적 모색이 돋보이는데요, 논문쓰기에도 벅찰텐데 어떻게 이런 저서 출간을 기획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저술과 논문은 분리돼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논문을 많이 쓰는 편입니다만, 논문만으로는 학계 내의 전문 독자나 재야의 일반 독자들과도 도저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시기적으로 점 점 흩어진 논문들을 정리하여 저술의 형태로 내야겠다 생각을 한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해부터는, 이제까지 써 왔던 글들을 정리(처분)해야겠다는 생각을 문득하게 됐습니다. 뭔가 과거의 논문 투의 머리 아픈 글들을 좀 정리하고서,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과는 다른, 보다 자유로운 에세이 식의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차츰 내 자신의 번잡한 생각들을 줄여가면서, 지적인 행보를 보다 명료하게 분류하고 정리하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작업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겠다는 각오라고나 할까요. 이제 슬슬 대학이라는 제도를 벗어나 홀로서기 연습을 시작한 것이지요.”  

△ ‘최재목’하면 ‘인문에세이’를 표방한 글쓰기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에세이를 여타의 지적 글쓰기와 함께 병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는지요. 선생님께서 추구하는 에세이의 본령은 무엇입니까.
“인류의 지성사에서 보면, 오랄리티(말, 구술문화) 전통과 리테라시(언어, 문자문화) 전통이 있습니다. 전자는 변화·생성·유동하는 세계의 리얼한 현장성(역사성)을 지향하기에 ‘동적’인 특징을 갖고, 후자는 고정·안정·불변의 관념적·논리적·실체적·표준적인 비현장성(비역사성)을 지향하기에 ‘정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에세이는 오랄리티의 전통을, 논문은 리테라시의 전통을 따르고 존중합니다. 그래서 파롤과 랑그의 대비처럼, 말하기(소리)중심과 읽기(뜻)중심의 대비처럼, 에세이는 전자의 감성언어 쪽을, 논문은 후자의 이성언어 쪽을 붙들고, 파고듭니다. 그렇다보니 에세이는 논문보다 대중과 소통하기가 쉽고 논문이 지향하는 이성언어 작업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미묘한 은유적 표현이나 이미지, 감성도 적절하게 녹여 낼 수 있는 장점을 갖습니다. 
다행히 저는 시를 써왔기 때문에, 시적 직관, 감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차츰 논문의 지적, 논리적 형식을 좀 느슨하게 에세이 쪽으로 끌고 가는 연습도 돼 있었어요. 처음에는 젊은 날에는 논문과 에세이 혹은 시적 작업들이 상극이거나 불화를 낳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화해롭게 잘 어울리고, 자연스레 대화를 하는 편입니다. 에세이의 본령은, 지상의 생명 현상을 설명하고 논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하다고 묘사하고 서사하려는 정신입니다. 예컨대 『장자』나 몽테뉴의 『에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에세이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나 형용동사로서, 살아있는 생명의 진실을 유동적으로 그림 그리듯 형용하여 워딩해내려는 시도라고 봅니다.”

△ 『방법·은유·기획의 사상사』에서 저자의 지적 관심 폭을 설명한 대목이 눈에 뛰더군요. 일찍부터 선생님께서 학제적인 영역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왔다는 고백입니다. 실제 앞서 든 목록의 책들은 하나의 전공 영역에 묶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 눈을 돌리게 게 된 계기가 뭔지, 장단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는 전공, 전공하며 기죽이려드는 식자들의 작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이 달리고 입장이 곤란하면, ‘전공이 뭡니까’라고 식으로 학문의 신분증이나 자격증을 내밀어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한 영역을 내가 전매특허 냈기에 당신은 ‘손대면 안 돼!’라는 무언의 불만(정확하게 말하면 ‘불안’) 표시에 불과합니다. 애당초 학문에는 무슨 국경처럼 그런 명확한 본질적 영역표시가 없습니다. 방편적 편의적으로 구분해놓은, 은유적 경계선에 불과합니다. 모든 영역들 사이에는, 아니 그 내부에서조차도, 어느 쪽도 아니거나, 어느 쪽이라 해도 좋은 것이 허다합니다. 저는 제가 주로 연구해온 양명학 분야도 그렇습니다. ‘그것만 해서는 그것도 모른다’고 하는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와 닿습니다. 한 가지 사안을 넓게, 깊게 탐색하다 보면 호기심이 여러 방향으로 향하고 결론이 잘 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빙빙 돌아서 다른 것들이 서로 만나는 수도 있고요. 
다만 어떤 특정 영역은 특수한 내용과 형식을 갖고 있기에 오랫동안 탐색, 숙고할 부분도 많습니다만, 심지어 이런 영역조차도 이미 학제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너무 많이 벌려놓다 보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욕도 많이 얻어먹고, 미움도 참 많이 받습니다. 각오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이 도대체 뭐를 하고 있는지, 오리무중에 헤매는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주제파악을 제대로 할 필요가 있지요. 제가 요즘 너무 많은 갈래진 길속에서 길을 잃을까 걱정돼서,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일단 비우고, 치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길이 쉽게 보이는 것도 아니겠지만요. 
한 가지 덧붙인다면, 나 자신이 개척한 다양한 영역은 나의 호기심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차츰 이런 호기심이,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생겨서, 줄어들고 있습니다만,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번 끝까지 밀고나가고 싶습니다. 나의 작업이 어떤 영역을 새롭게 생성해낼 것인지 나 스스로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 아시다시피 지금 한국 학계와 대학은 ‘논문쓰기’가 강박처럼 제도화돼 있습니다. 이 말은, 학자들이 모노그라프라는 좀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지적 시도에 나서는 것을 가로막는 환경이 완강하다는 뜻입니다. 한꺼번에 책을 묶어내려면 단순히 논문을 솎아내는 것으론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이번 책들은 솔직히 순수 저서 집필이라 하기는 힘듭니다. 저서를 집필하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대학이라는 제도는 그렇게 교수들을 놔두지 않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거나 아예 다른 일들을 다 치우고 장기전에 돌입하면 새로운 시도의 저술 등에 몰두할 수 있지만, 거의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의 고민도 이 대목에 와 있습니다. 현재 교수직을 갖고 있는 한은 논문에 기반해 단행본 저술로 다듬어 가는 길을 택하는 것이 일종의 타협안이라 봅니다. 이번 저술들은 현재 대학의 실정을 반영한 것이라 봐도 좋겠습니다.  
여하튼 일관된 체계의 저술을 위해서는 차츰 다른 욕심들을 버리고 하나의 주제에 올인 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제가 저질러놓은 작업들을 정리하기에도 솔직히 벅찹니다. 올해 연말까지, 일단 정리 작업을 대략 끝내고, 지금과는 영 다른 작업으로 갈아타야합니다(그런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끝나면, 현재 진해중인 작업들이 일관된 체계의 저술로서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글쓰기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우선, 제 전공이 양명학·동아시아철학사상·문화비교인데요, 그동안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라는 일본어판 책이 대만판으로, 다시 한국어 번역판으로 간행됐습니다만, 이 책의 수정·보완판이 중국에서 올해 5월경 간행됩니다. 방학동안 수정보완 작업을 하느라 많이 바빴습니다. 이어서, 현재 『양명학입문』을, 2년째 쓰고 있는데, 이것이 조만간 완결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전에 추진했던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의 후속 작업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는 전근대 시기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양명학을 다룬 것으로, 양명학을 비교사상사라는 시점에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고찰한, 최초의 거시적 방법의 책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동아시아 근세양명학』인 셈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동아시아 근대 양명학』, 『동아시아 현대 양명학』을 완성해갈 생각입니다. 『동아시아 근대 양명학』은 어느 정도 추진이 되고 있습니다만, 완성까지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 사이에 『한국근대양명학의 탄생』부터 미리 간행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고전해석서, 에세이집, 번역서, 시화집 등이 올해부터 차차 간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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