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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나무와 살다 나무에 묻히다
[최재목의 무덤기행] 나무와 살다 나무에 묻히다
  • 최재목 영남대·철학과/시인
  • 승인 2018.09.1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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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 “무덤에서 삶을 생각하다” 1-① 천리포수목원의 민병갈(칼 페리스 밀러)

연재를 시작하며
이번 호부터 최재목 영남대 교수(철학과)의 <무덤기행 “무덤에서 삶을 생각하다”>를 월 1회 연재한다.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화가이기도 한 필자는 그동안 철학과 문학을 비롯한 전 장르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온 몸으로 표현하고 온 몸으로 사색하는 삶을 이야기해 왔다.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필자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거나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무덤을 찾아가면서 전문가도, 일반인도 의미 있게 읽어볼 수 있는 죽음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펼친다. 그들의 무덤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왜 그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일까? 이번 기행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되묻고 그래서 무덤에서 삶의 의미를 건져 올리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무’(無)의 ‘덤’ 

무덤은 한 인간의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싸악 묻고 지워버린다. 망자는 살아서 꾸민 삶의 공간과 결별하고, 새로 꾸며진 죽음의 공간에서 살아간다. 무덤은 고요와 침묵, 무언으로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 대신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렇게 망자는 산 자들에게 자신을 다시 쓰고 말하도록 닦달하는 것이다. 

무덤은 낡은 것들을 부정하고, 낯익었던 일들을 괄호로 묶어 지난 시공간과 결별, 부정하는 동시에 또 다른 차원에서 망자를 만나 긍정하도록 한다. 살아서 미처 살피지 못했거나 느끼지 못했던 그 사람의 삶은 다른 차원에서 의미가 살아나고 스토리텔링 된다. 이처럼 무덤은 ‘은폐-소거의 공간’인 동시에 ‘천명(闡明)-창조의 공간’이다. 그렇다. 죽은 자에게는 잊지 않고 기억을 해주게 하는 ‘추억과 기억의 장치’이고, 산 자에게는 죽은 자를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전망과 성찰의 장치’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불러 모으고, 산 자가 죽은 자를 호출하는 우리의 전통 무덤 형식은 반원의 봉분=‘곡선’, 수직의 비석=‘직선’으로 이루어진다. 봉분 위로는 하늘이 원형을, 아래로는 관이 사각형을 보여준다. 땅[地]이라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우리 전통의 토장(土葬)은 수장(水葬)?화장(火葬)?수상장(樹上葬)?조장(鳥葬) 등과 달리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시간(←원형=천원)+공간(←사각형=지방)을 추상적 형태로 껴안고 있다. 물론 이런 기하학적 묘의 기획은 산 자들의 몫이나, 아름다운 산천에 상처를 만들고 심지어는 보기 싫은 흠집이 되기도 한다. 화장하여 수목장으로 만드는 추세가 자연스레 자리 잡는 것은 친환경적이며 바람직하다고 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를 스토리텔링 하는 자는 산 자이다. 무덤은 그 사람이 차마 못 다한 삶의 이야기를 산 자를 통하여 마저 다 털어놓고, 얘기하며, 완성케 하는 공간이다. 누구나 편히 볼 수 있는 ‘그 사람의’ 공개된-추상적 의미의 공간이다. 이래서 무덤은 살아있는 자들이 망자를 항상 만날 수 있도록 기획한, 공공적 예술 공간이나 놀이 공간이라 해도 좋다. 어릴 적 나는 뒷동산 묘지의 잔디에서 얼마나 많이 뛰어놀며 즐거워했던가. 봉분을 뛰어넘고, 비석에 올라타고 매달리며…. 

무덤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무’(無)에서 건져 올린 ‘덤’이다. 자,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의 덤’에서 삶의 의미를 얻어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찾아가는 무덤, 진정한 스승        

삶은 지상 위에서 번잡하고-시끄럽고-바쁜 구체적-상대적 공간에 머물러 있다. 죽음 이후에 등장하는 무덤은 그런 상대적 공간을 벗어나, 고요-영원-절대의 공간으로 바뀐다. 이것은 다시 시간이 지나면 단순한 이미지로, 기록으로, 기억으로, 인상적인 선명한 실루엣만 남기며 추상화(抽象化) 된다. 추상화되면 추상화(抽象畵)처럼 ‘휙 스쳐 지나가는’ 진실만을 부호나 기호처럼 살려둔다. 그것은 살아있던 자들의 에스프리만 간추려놓은 ‘종요’(宗要)이다. 죽은 뒤에 아우라를 되새김질 하는, 또 다른 추상적 공간이 ‘상대적→절대적’ 공간 다음으로, 무덤에서 생성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공간의 ‘상대적→절대적→추상적’ 과정이 무덤에 있다. 우리는 어차피 그 길을 찾아가고 있다. 모두 다 제 발로, 뚜벅 뚜벅 걸어서. 『금강경』에서 세존이 수보리에게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구제해 줬다 생각하겠지만 (ㅠㅠ미안혀) 사실은 단 한 사람도 내가 구제해준 적이 없거든!” 이런 고백처럼, 누구나 아무런 다른 도움 없이, 스스로 터벅터벅 그 종점(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죽음 앞에 무릎을 꿇는다. 무덤, 그 스승 앞에. 노신은 『무덤』(墳)이라는 에세이집의 후기에 이렇게 썼다. 

중국에는 대개 청년들의 ‘선배’와 ‘스승’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러나 나는 아니며, 나도 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하나의 종점, 그것이 바로 무덤이라는 것만은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이므로 누가 안내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달려있다. 그 길은 물론 하나일 수 없는데, 비록 지금도 가끔 찾고 있지만 나는 정말 어느 길이 좋은지 알지 못하고 있다.…나를 편애하는 독자들에게 주는 선물은 ‘무소유’(無所有)보다 더 좋은 것이 없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생각해 본다.* 이 글은 대구시 달서문화재단의 『문화만개』여름호(vol.07, 2018.7)에 매수 제한으로 축약하여 실었던 것을, 교수신문의 기획 연재에 맞추기 위해 재단 측의 양해를 얻어 다시 보완하여 싣는 것임을 밝혀둔다. 
                                                                            - 魯迅, 『무덤』(墳), 홍석표 옮김, (그린비, 2011), 437쪽.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종점, 무덤은 가만히 둬도 누구다 다 거기로 간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방향이다. 문제는 ‘어떻게 가는가’이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스스로 알고서 찾아가야 하니, 노신은 쿨하게 말한다. 자신의 글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무소유’ 뿐, 빈손으로 그 길을 알아서 찾아가라고 권한다. 

천리포수목원의 민병갈 무덤을 찾다

천리포수목원 풍경

스승인 무덤, 거기까지 가는 길을 미리 훤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다. 삶을 바쳐 나무를 심었던, 귀화 미국인 민병갈(미국명: 칼 페리스 밀러)이다. 그는 나무와 결혼했다. 평생 나무만을 자식처럼 키웠다. 

나무는 한 곳에 어리석게 곧게 서서, 평생을 지낸다. 스스로 옮겨 다니지도 못한다. 그 자리에서 치열하게 산다. 말 그대로 우직(愚直)하다. 식물원의 식(植) 자는 나무 ‘목’에다 곧을 ‘직’ 자이다. 이 글자에서, 정직-충직-강직 등의 어휘에서 보는 ‘곧게 나아가는’ 인문적 상상력을 만난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땅의 높은 산과 언덕과 평지 그 ‘수많은’(=十) ‘눈들’(=目)이 쳐다보니 ‘감추고 숨길’(隱→ㄴ) 수 없어, 그냥 어리석고 착하게 만 자라는 저 곧고 곧은[直] 나무들[木]. 
민병갈이 그랬다. 그의 생애는 그가 가꾼 수목원의 나무처럼, 그곳에서 성장하고, 번식했다. 그 흔적은 고스란히 ‘천리포 수목원’이 되었다. 이 수목원은 민병갈의 삶을 간직한 타임캡슐이라 해도 좋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이 사랑하던 나무 밑에 묻히길 원했다. 그의 뜻대로, 결국 그는 나무 밑에 묻혔다. 나는 민병갈이 일생을 바쳐 만든, 이 <천리포 수목원>(정식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리포수목원>)이 궁금해졌다. 그곳을 찾고, 그가 묻힌 곳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민병갈 기념흉상과 그가 묻힌 나무 
민병갈이 묻힌 나무
민병갈이 묻힌 나무

만리포에서 만난 ‘무량한 빛’  

5월 중순, 햇살을 가르며, 대구에서 천리포 수목원으로 가는 길은 멀다. 충남 태안의 만리포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 노을이 막 지기 시작하였다. 서해안의 낙조는 아름답다. 떨어지는 것, 사라지는 것이 어쩜 저렇게도 곱고 찬란할 수 있을까. 반짝이는 은모래. 구구절절 애타는, 연서(戀書) 같은 노을. 그 위를 천진난만 발랄하게 뛰노는 아이들, 연인들. 
이 대목에 서면, 오래된 저 문주란의 ‘낙조’(1968년, 영화주제가)같은 애절한 노래는 차마 이해가 안 된다. “노을 지는 강물위에 물새가 슬피 울면/강바람이 쓸쓸하게 물결 따라 불어오는데/언제까지나 영원토록 잊지 못할 그 사람/슬픈 사연에 슬픈 사연에 이 밤도 목이 메인다.” 이제 ‘슬피∼슬픈∼목이 메인’ 이런 아픔의 어휘들이 차츰 우리에게서 멀어져갔으면 좋겠다. 무량 무량한 빛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다면, 무량광불(無量光佛)을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빛은 곧 생명이고 수명이고 희망이거늘. 왜 낙조를 그렇게 슬프다고만 하는가.

만리포의 낙조

몇 해 전, 네덜란드에 가족과 일 년을 머물 기회가 있었다. 여름 날, 덴하그(헤이그) 근처의 어느 바닷가로, 찬란한 일몰 구경을 간 적이 있다. 일몰이 마치 일출 같다는 착각을 했다. 커피를 마시며 해가 떨어지는 바다 속으로 눈길이 점점 빠져들면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네덜란드 사람들. 그들에겐 슬픈 일몰이 아니라 황홀한 일출인 듯 했다. 서쪽 바닷가에 발붙인 그들의 서녘은 곧 그들의 ‘극락정토’(極樂淨土)처럼 느껴졌다. 

만리포도 그랬다. 서녘 하늘이 어쩌면 저렇게 따사로울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계신 듯. 그 분은 무한한 목숨을 가진 분[아미타유스amita-yus, 無量壽]과 무한한 빛을 가진 분(아미타브하amita-bhas, 無量光)이다. 오랫동안 수행하여 10겁(劫) 전에 이미 부처가 되어 서녘 저 ‘극락(안락)’이라 불리는 정토에서 설법하고 계신단다. 이 분을 만나려면, 지금 여기서 서쪽으로 십만 억(현대의 숫자 계산으로 친다면 십만 조) 개의 정토를 밟고 지나서야 겨우 닿을 수 있단다. 타박타박 내 발로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도 아득하다. 그럴까.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분의 이름을 간절히 외치기만 하면, 마음속으로 기어코 만날 각오가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곧바로 만날 수 있으리라. 무한의 시간을 단박에 뛰어넘어, 아미타불 계시는 문턱을 넘어 뻔질나게 왕래할 수 있으리라. 눈 감고 누워서 달에도, 별에도 다녀오듯이.   

햇살 반 물결 반의 해안을, 신발을 벗어들고, 검푸른 수평 속으로, 맨발로 걸어 들어간다. 맨발로, 내 몸을 바칠 각오로 그 빛의 바다에 들어선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그립고 안타까워 울던 밤아 안녕히/희망의 꽃구름도 둥실둥실 춤춘다∼♪” 예전에 듣던 ‘만리포 사랑’(1958년,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박경원 노래)의 무대가 여기였다니. 슬쩍∼, 준비해갔던 하모니카를 꺼내, 불어본다. 누가 듣던 말든 ‘즉흥’(卽興)에, ‘젊은 꿈....그립고 안타까움....안녕!’ 이런 어휘들을 잠시나마 떠올려본다. 여하튼 만리포는 주연급 배우이고, 그 덕에 옆으로, 옆으로 조연급 배우들이 쭈욱∼달라붙어, 함께 잘 먹고 살아간다. 만리포해변의 북측으로 천리포, 그리고 백리포 해변이 이어지는데, ‘만리’니 ‘천리’니 ‘백리’니 하는 말들은 그냥 충청도식으로 ‘거시기한 농담’ 쯤으로 들어주면 된다. 백사장이 길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 일일이 따질 것 없다.  

 

* 이 글은 대구시 달서문화재단의 『문화만개』 여름호(vol.07, 2018.7)에 매수 제한으로 축약해 실었던 것을, <교수신문>의 기획 연재에 맞추기 위해 재단 측의 양해를 얻어 다시 보완해 싣는 것임을 밝혀둔다.

 

최재목 영남대 · 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 졸업, 일본 츠쿠바대 문학석사·문학박사를 했다. 한국양명학회장,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언덕의 시학』 등이 있다.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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