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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시인 한하운의 소록도 여정 . . .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나병시인 한하운의 소록도 여정 . . .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최재목
  • 승인 2018.10.29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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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무덤기행_ “무덤에서 삶을 생각하다” 2-① 소록도 만령당(萬靈堂)을 찾다
소록병원 옆 담벼락의 재능기부 작품 '소록의 꿈' 속 작은 사슴
소록병원 옆 담벼락의 재능기부 작품 '소록의 꿈' 속 작은 사슴

소록도를 가며, 한하운 생각

전남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 녹동항 앞바다에 있는 ‘어린 사슴 모양’을 닮았다는 섬 ‘소록도(小鹿島)’[도판?]. 언제부터인가 꼭 가보리라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몇 년을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올해, 추석을 며칠 앞둔 9월 하순 소록도로 향했다.

저녁 무렵, 아으, 비가 장대같이 퍼붓는다. ‘모두가/꽃 같이 아름답고/……꽃 같이 서러워라’고 했던 한센병(나병) 환자 시인 한하운[韓何雲. 1919-1975.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신]의 시처럼, 비는 꽃같이 아름답고 서럽기도 한 듯 그치지 않는다.

우선 여수 연안부두 근처에 묵고, 아침 일찍 고흥으로 갈련다. 출렁이는 아름다운 여수의 밤바다 곁을,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거닌다. 여수(麗水)는 한하운의 ‘허전한 여수(旅愁)’인가. ‘이 세상 다할 때까지/죽자고 살아보자던 사람//(중략)/이제 그 사람 찾아온/천리 땅 대구(大邱) 길은//경(慶)/그 사람은 가고/허전한 여수는/그런대로 사랑했던 까닭인가’(「여수(旅愁)」 일부, 『한하운 전집』, 문학과지성사, 2010) 잠시 한하운이 떠나보낸 사랑을 생각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우산 밑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손가락 한 마디마디의 실루엣으로, 자꾸 눈앞에 어른대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날 한하운의 시를 너무 깊이 읽었던 탓일까. 간밤에 얼어서/손가락이 한마디/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날이 따스해지면/남산 어느 양지 터를 가려서/깊이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손가락 한마디」 전문)

가만히 읽고 있으면, 좀 섬뜩해진다. 몸에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지다가, 뼈 한 마디 살 한 점을 옷깃으로 고이 싸서 주머니에 넣어두는 대목에 이르면 처절함보다는 냉담함에 잠시 머뭇댄다.

“썩은 육체 언저리에/네 헒과 균(菌)과 비(悲)와 애(哀)와 애(愛)를 엮어/뗏목처럼 창공으로 흘러보고파……//아 구름 되고파”(「하운(何雲)」 일부)했던 한하운. 그래서 본명 태영(泰永)을 버리고, ‘누구의 기억에도 있을 수 없는’ 하운(何雲)을 택했다(1944, 25세). 그러기에 앞서 그는 ‘여름 하, 구름 운’ 자를 써서 하운(夏雲)으로 하려 했다. 그러나 ‘인간의 애증을 넘어서 생각할 때’ 하운(夏雲)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여름 하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적란운의 아름다운 로맨틱의 몽환을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인간 폐업/천형원한(天刑怨恨)’(「청지유정(靑芝有情)」 일부)이라 하여 하늘이 내린 형벌을 원한으로 생각하나, 장자(莊子)나 니체가 ‘운명을 사랑하라’고 했듯, 병의 처절함을 ‘운명’으로서 수긍한다. 즉 ‘나환자는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천부(天賦)의 인권과 의식주까지라도 박탈당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내 운명을 탓하고 따라갈 뿐이다.’(「황토길: 전라도(全羅道) 길 -소록도 가는 길에」)라고.

‘아흐, 꽃 같이 서러워라’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헨리 지거리스트가 『문명과 질병』에서 언급하듯, ‘역사상 한센병만큼 환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질병은 없었다. 한센병은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만성병으로 환자는 수십 년 동안 그 병과 더불어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치료약이 발견되기 전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문둥이’라고 격리를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한센병(나병) 환자는 ‘전염병 예방법’ 때문에 격리, 수용되어야 했다. 심지어는 수술로 그들의 생식기능을 제거하는 단종(斷種, sterilization)까지 실시한다.
당시 남성 한센병자들이 강제로 정관절제 수술을 당하는 충격과 절망은 대단했으리라. 현재 소록도 감금실 벽에 걸려있는 이동(李東)이라는 청년의 시가 잘 말해준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사랑의 꿈은 깨어지고/여기 나의 25세 젊음을/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있노라/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내 국부에 닿았을 때//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오늘도 통곡한다.

한해운
한해운

 

소록도의 단종대
소록도의 단종대

 ‘헌신짝도 짝이 있는가//나혼(癩婚)은/T.O허가제/조건은 사전 단종수술//병신인데 자식은 해서 뭐하나 하겠지만/병신이니까 자식이 있어야 하거늘//절절한 소원이지만/붕알이 짤려버려/어떻게 어떻게 할 것인가//편견의 사디즘이여/좀 말해보라/사람이 사람의 붕알을 깔 수 있는가/우라책(愚癩策)이여 좀 말해보라’(「제14회 세계 나자(癩者)의 날에」)

이동의 시 단종대
이동의 시 단종대

1940년대 이후 한센병 치료약제가 개발되면서 병의 공포는 사라지나, 여기까지 오는 사이 한센병 환자들은 세상의 갖은 차별과 박대를 받으며 살았다. 함경남도 함주 출신인 한하운은 이리농림학교(裡里農林學校) 재학 시절(17세, 1936년) 한센병 판정을 받는다.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함흥으로 와서 학생 데모 사건으로 형무소에 투옥한 뒤, 탈옥 그리고 월남한다. 그러나 남한 생활에서 환멸과 비애를 겪고서 결국 숨 막히는 더위 속 메마른 전라도길 황톳길을 쩔룸쩔룸 수백리나 걸어 생존을 위해 소록도에 수용된다. 소록도는 그에게 지옥이자 마지막 의지처이며 도피처였다.

1947년 8월 나는 원산(元山) 형무소를 파옥(破獄)하고 원산에서 38선 동두천까지 걸었다.(이 부분은 「황토길: 전라도(全羅道) 길 -소록도 가는 길에」) (중략) 서울에 올라온 나로서는 그렇게도 꿈같이 그리워하던 남조선의 민주주의의 미군정(美軍政)은 환멸(幻滅)의 비애를 주었다. 아주 개판인 지리멸렬의 혼란의 세상이었다. 거지로 전락한 나에게는 지옥이었다.(「생명과 자학(自虐)의 편력(遍歷)」)

이 모든 지옥을 벗어나려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길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길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밖에는 없었다. 이 소록도도 역시 나환자의 낙원이 못 되고 지옥의 하나임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 이 인간 동물원에 갇혀 신음하는 이곳을 찾아가야만 하는 마지막 길을 찾아가는 암담한 심정은 사형수가 사형장을 가는 그 심정과 같을 것이다. 천리 길을 걸어갈 수 없는 일이라 기차를 탄다. 찻간의 사람들의 눈초리와 주둥이는 나를 향하여 쏟아진다. 차장(車掌)은 으레 껏 발길로 차며 끄집어 내린다.(「황토길: 전라도(全羅道) 길 -소록도 가는 길에」)

천리 길을 걸어갈 수 없어 기차를 타면 사람들은 질시, 박대하고 심지어 차장은 발길질로 끄집어 내리는 수모를 당하는 장면은 처참하다. 한하운의 「전라도(全羅道) 길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에」를 읽으면 아픔이 저리다 못해 뼛속을 후벼 파는 듯하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중략)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앞으로 남는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전라도(全羅道) 길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에」 일부)

한하운의 시는 한 마디로 ‘인골적(人骨笛)’의 소리 즉 ‘뼈 다리를 골라 피리 감으로 다듬어서, 구멍 뚫어서 피리로 부’는 소리이다: ‘아득히 아득히 몇 억겁을 두고 두고/울고 온 소리냐, 인골적 소리냐//엉 엉 못살고 죽은 생령(生靈)이 운다'/아 천한(千恨) 절통의 울음이 운다/(중략)/생사람 산채로 죽여 제물로/도색(悼色)이 풍기는 뼈다리를 골라 피리감으로/다듬어 다듬어서 구멍 뚫어서 피리로 분다’(「人骨笛」 일부) 다듬어 다듬어서 구멍 뚫어서 피리로 부는 소리는 다름 아닌 소록도의 아픔을 대신 노래하는 것이다.

아픔을 다듬고 다듬어서 시로 토로하듯, 스스로 자신을 그린 자화상은 참 심플해서 캐리커처라 할 수도 없다. 그냥 눈과 얼굴 윤곽을 대충 장난하듯 그린 것뿐이다.
 

한 마디로 “아 꽃과 같던 삶과/꽃일 수 없는 삶과의/갈등(葛藤)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다”(「삶」 일부)는 그의 고백처럼,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어정쩡하게 우두커니 ‘쩔룩대며’ 서 있는 모습을 스케치한 것이다.

 

 

최재목 영남대ㆍ철학과/시인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에서 문학 석·박사를 했다. 양명학ㆍ동아시아철학사상 전공으로 한국양명학회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동아시아 양명학의 전개』, 『동양철학자 유럽을 거닐다』 등이, 시집으로 『해피 만다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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