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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주고받는 도덕 경제도 가능하다”
“선물 주고받는 도덕 경제도 가능하다”
  • 김주환
  • 승인 2023.07.21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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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아고니즘_『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 이상률 옮김 | 한길사 | 303쪽

악덕을 미덕으로 만드는 위선은 사회의 기초
힘의 균형 무너질 때 약자에 대한 혐오 확산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대니, 협력이니, 공감이니 하는 도덕과 윤리의 언어들만큼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가령 강의실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의 정서에서 ‘연대’는 내가 하지도 않은 동료의 잘못 때문에 나도 같이 처벌받거나 같이 책임을 져야하는 부당한 군대식 조직 문화에 불과하다. 협력은 그 취지는 좋지만 실제로는 무임승차자의 무책임을 은폐하고 각자가 기울인 노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에 무관심한 도덕책에서나 나오는 용어다. 나와는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도저히 마음으로부터 공감이 일어나지 않기에 그것은 단지 당위적인 훈계에 그치기 십상이다.

탈사회, 파편사회, 개별화된 사회, 부족의 시대, 사회적인 것의 죽음 같은 최근 유행하는 시대 진단의 언어들이 결코 과장된 표현만은 아닌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교수자들은 그러한 정서를 방관하고 편승하거나,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다른 교수들은 약자들과 연대해야 하고 협력해야 하며 타인에 대해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는 도덕과 윤리를 힘주어 다그친다. 다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억지 다그침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가치들을 현실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배후는 사드라고 하지 않던가. 이는 교육이 무능력의 사황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도덕과 윤리의 무력함과 무력함으로 인한 폭력성

우리가 사회를 만들고 집합적인 인위적 실천으로서 정치를 통해 사회적 삶의 방식을 공적으로 조직하며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 각자는 혼자 생존할 수 없는 유한하고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삶의 많은 부분들이 시장의 원리나 국가 행정 권력의 힘에 의해 결정되고 있어서 근대 이후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힘이 약해져 있는 오늘날, 연대, 협력, 공감 같은 사회와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 원리나 가치들이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연대, 협력, 공감 같은 것들을 냉소한다는 것은 사회와 정치가 그런 것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원리, 이를테면 사물의 원리에 의해 조직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상품과 화폐의 원리, 권력 시스템의 통제와 지배의 원리 같은 것 말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사물의 원리에 의해 조직되는 인간의 삶이 우리 시대의 여러 병리들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우리는 왜 연대하고 협력하는가? 연대와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마르셀 모스(1872∼1950)의 『증여론』의 문제의식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길잡이를 제공해준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은 시장에서의 상품과 화폐라는 사물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지며 시장에서의 사물의 교환 원리는 현대사회의 핵심적인 조직 원리가 되고 있다. 이와 달리 모스의 『증여론』은 전자본주의적 태고사회들에서 사람과 사람, 부족과 부족 사이에 호혜적으로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이루어지는 도덕 경제가 광범위하고 굳건하게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익명적 개인들의 차가운 이해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인격과 이타적 도덕성에 기반한 협력의 도덕 경제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모스의 『증여론』을 인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지점에 착목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대안으로 공동체 성원간 호혜에 기반한 도덕경제를 제시하기 위해 모스의 『증여론』의 논의를 근거로 댄다.

오늘날에도 선물 교환 같은 도덕의 경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스는 지나간 과거의 향수에 사로잡혀 있는 전통주의자가 아니었다. 정작 모스의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선물 교환의 도덕 경제가 가능함을 논증하고 그것을 되살리려는 것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어떻게 과거의 도덕 경제가 불가능해지게 되었는지를 해명하고 그로부터 자본주의 시장과 국가의 관료제적 시스템의 통치가 야기한 현대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선물 교환의 도덕 경제가 가능할까. 이미지=픽사베이

모스는 『증여론』 ‘서문’에서 위선적이고 모순적으로도 보이는 선물 교환의 흥미로운 특징을 지적하며 시작한다. 우선 선물의 주기는 증여자의 자유로운 선의에 의한 것처럼 행해지지만 실제로는 주어야만 하는 의무가 있기에 주는 것이다. 둘째, 선물의 주고 받음은 겉으로는 마치 이해관심에 초연한 것처럼 행해지지만 속으로는 이해타산의 계산을 하고 이루어진다. 셋째, 선물 교환에서 겉으로 교환되는 것은 사물이지만 실제로 교환되는 것은 그 사물에 깃든 사람의 인격 내지 영혼이다. 모스가 볼 때 선물의 교환은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위선적이다. 위선적인 행위이므로 선물 교환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일까?

겉과 속의 일치라는 개인 내면의 진정성의 관점에서 보면 선물은 위선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선물 교환의 위선적 성격을 잘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실천한다. 여기서 모스는 『증여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선물에는 도대체 어떤 힘이 있기에 (이러한 위선에도 불구하고) 받은 자가 되갚게 만드는가?’ 라 로슈푸코가 말하듯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경의’로서 ‘악덕을 미덕으로 만들기도’ 한다. 개인과 그 개인의 자아 사이의 진정성의 관계에서와 달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관계 차원에서는 이와 같은 위선이야말로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집합적 실천 관행으로서 사회·정치적 진실을 담고 있다. 이점은 선물의 교환에서 작동하는, 즉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연대, 협력, 공감 등의 도덕과 규범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하는 도덕적 강제력이다. 나도 그러할테니, 당신의 본심이 어떻든 나와의 공적 관계에서는 이러저러한 미덕과 예의를 갖추어 행동하라는 것, 그렇지 않는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악덕으로 대할 것이다라는 암묵적 협박 말이다. 

 

마르셀 모스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였다. 사진=위키백과

 

날 것의 적대를 도덕과 상징의 경합으로 바꾸는 기술로서 사회와 정치

그런 점에서 사회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상호간 선의의 진정성이 아니라 상호간 적대와 죽음의 가능성이다. 지젝은 말한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 이웃이 바로 나를 죽일 수 있는 괴물이기 때문이라고. 같은 맥락에서 모스가 볼 때 선물 교환 그리고 선물 교환에 의해 가능해지는 사회란 이처럼 개인과 개인, 부족과 부족 사이에 놓여 있는 적대와 죽음의 심연을 건너기 위한 아슬아슬한 교량이다. 정치는 이러한 적대와 죽음의 심연 위에 설치된 교량을 공적으로 관리하는 집합적 기술의 활용 영역이다. 말하자면 날것의 적대를 도덕적 규범과 상징을 활용한 상호 경합의 게임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기술이 정치이다.

모스의 『증여론』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놓치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모스는 『증여론』의 처음부터 끝까지 선물 교환의 의례는 마치 전쟁의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번 강조한다. 선물 주기에 인색한 것,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곧 전쟁의 선언과 다름 없고, 선물 교환의 관행들을 지배하는 것은 경쟁과 경합의 원리들로서 때로는 경쟁자이자 협력자인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해 축적해두었던 부를 아낌없이 파괴해버리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날 것의 적대와 전쟁을 선물 교환의 호혜적 도덕 원리에 기초한 정치적 경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집단 간 힘의 균형이 어느정도는 팽팽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어느 한 쪽의 힘이 압도적이어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상호간 도덕적 강제력이 작동하기 힘들어진다. 이럴 때는 날 것의 적대가 전면에 부상한다. 현대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모스가 『증여론』을 썼을 때 그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위기 상황이었다. 사회와 정치의 도덕규범의 통제력 하에 있던 자본주의 시장의 힘과 국가의 관료적 행정권력이 힘을 키워 사회와 정치의 통제력으로부터 벗어나 자립하더니 급기야 사회정치적 토대를 압박해오는 상황 말이다.

모스의 『증여론』은 이처럼 경제와 국가가 사회와 정치의 도덕질서와 분화되지 않고 통합된 채 후자의 통제 하에 둘 수 있었던 사회정치적 차원의 집합적 실천에 대한 탐구를 통해 당대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고자 한 시도였다. 『증여론』은 논의의 시작이었다. 모스는 『증여론』 이외에도 『주술의 일반이론』을 비롯해 “기술”과 “정치”에 대한 많은 글들을 남겼는데 열정적 사회개혁가로서 모스는 자본주의 경제와 국가 관료적 행정권력의 힘을 사회와 정치의 힘으로 통제하기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정치, 사회적 기술이 개발되어야 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지속했고 이를 학문의 사명으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해결은 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그 불만은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로 전환되고 있다. 서로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를 악으로 낙인 찍고 적대적 공격을 일삼는 정치가 범람하고 있다. 연대와 협력은 냉소의 대상, 감흥을 일으키기 힘든 말이 되고 있다. 사회가 보유하고 있던 정치적 힘이 약해져 자본주의 경제, 국가, 사회 사이의 힘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아마도 도덕과 윤리의 언어들은 지속적으로 냉소의 대상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와 국가의 힘에 대적하기에 도덕과 윤리의 언어들이 지닌 힘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가 고민하며 찾아야 할 것은 그럴 능력을 가진 힘의 원천은 무엇이며, 그 힘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기술은 무엇인가 하는 것 아닐까 한다. 

 

 

김주환
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사회학 

미국 조지아주립대 사회학과에서 박사를 받았다. 비판적 사회이론과 사상, 문화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의 사회이론과 규범적 사회이론을 생산적 긴장 속에서 어떻게 접합시킬 수 있을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고니즘’은 적대 즉 안타고니즘과는 달리 경쟁을 하되 서로 절멸시키지 않는 방식의 상호 향상을 위한 건전한 경쟁을 의미한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정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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