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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관념을 넓혀라…‘고통·분투’가 뒤얽히는 과정
빈곤의 관념을 넓혀라…‘고통·분투’가 뒤얽히는 과정
  • 김주환
  • 승인 2024.02.23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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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아고니즘_『빈곤 과정: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428쪽

빈곤은 확정된 결과적 수치 아니라 과정
빈곤-복지와 빈곤 레짐의 규범을 넘어

이 책은 오랫동안 한국과 중국 등의 빈곤 현장을 연구해왔던 인류학자 조문영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과)이 그간의 연구 결과와 통찰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 여러 연구와 조사들이 이미 보여주고 있듯이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전 지구적 수준에서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고 빈곤이 만연해지고 있다. 

사람들의 삶은 그만큼 불안정해지고 고통스러워지고 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또한 일하기 위해 분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할퀴고 흔들며 때리는 빈곤의 공격에 대상이 분명치 않은 분노들이 차곡차곡 쌓여 가슴속에 응어리진다. 내면에 쌓인 분노들은 언제든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 시대를 휘감고 있는 각종 분노의 심층에 아마도 빈곤은 가장 중요한 기제로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삶의 위기로 고난받지만 그중 빈곤처럼 사람을 물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 궁지로 모는 것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빈곤과 같은 삶의 위기는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니 문제를 사회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공감각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개인이 겪는 삶의 위기는 남에게 의존하려 하지 말고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사회적 압박이 강해지다 보니 빈곤에 대한 대응은 개별화된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빈곤을 개별적으로 대응하려 하니 당연히 해결은 난망이고 개인들이 실존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통로를 잘못된 곳에서 찾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만큼 우리 시대에 빈곤이라는 주제가 더욱 집중적으로 재소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조 교수의 『빈곤 과정』은 빈곤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습화된 인식과 관점을 깨뜨리는 탁월한 통찰들로 가득하기에 주목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도 빈곤을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조 교수는 빈곤을 확정적인 수치나 전형화된 이미지로 축약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떤 시점의 결과로만 바라볼 수도 없다고 말한다. 빈곤을 수치나 결핍의 어떤 결과적 상태로 바라보게 될 때는 이 하나하나의 개인사적 이야기들을 포착할 수 없다. 빈민은 단지 국가의 통치 리스크 관리를 위한 인식의 대상, 무차별적 집단으로 묶여 관리의 객체가 되는 집단으로 물화돼 버린다. 그렇게 되면 빈곤은 한 사회의 일부 집단만이 경험하는 예외적 현상이 된다. 

이와 달리 조 교수는 빈곤을 복합적인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빈곤은 하나의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한 개개인들의 삶의 양상과 궤적들이 만들어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자, 실존적 고통과 분투들이 뒤얽히는 복합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수치나 결핍된 결과적 상태로만 빈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빈곤을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각자 개인들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저자의 관점은 분명히 빈곤을 인식 대상, 빈곤 정책 대상으로 바라보는 통치 리스크 관리의 관점과도 변별되는 것이다. 빈곤을 멀리 떨어진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바라보는 관점과도 구별된다. 

‘빈곤 레짐’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른바 빈곤-복지 연합 속에서 빈곤에 대한 어떠한 규범이 만들어지고 재생산되는지를 비판적 통찰을 가지고 흥미롭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인간의 삶은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존과 자립의 이분법 속에서 의존을 비도덕화해 빈민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여전히 생산적 노동과 그것을 통한 자립의 관점에서 복지를 비생산적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권리로서 분배를 얻어내기 위한 분투는 분명히 고된 노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경제적으로 생산적이어야만 하는 노동이라는 규정 속에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기업이나 여러 민간단체들, 정부는 사회공헌, 윤리적 자본주의, ESG 등을 외치며 빈곤 마케팅을 벌이고 빈곤의 한복판에 있는 청년들을 동원해 빈곤 레짐에 활용한다. 

조 교수는 빈곤 레짐의 한계에서 벗어나 빈곤을 대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현장과 사람들에 거리를 두는 관찰자의 시선 대신 연구자도 현장에 연루되는 참여자라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또한 인간 삶은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빈곤의 관념을 폭넓게 넓혀가면서 서로가 서로의 삶에 연루되어 있는 공통된 존재라는 관점에 서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관점을 이제는 인간을 넘어 비인간에게까지 확대해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윤리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김주환 
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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