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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관하여
분노에 관하여
  • 장춘익
  • 승인 2023.06.19 15: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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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장춘익 전 한림대 철학과 교수(1959∼2021)의 철학 에세이 80편이 『나의 작은 철학: 일상의 틈을 우아하게 건너는 법』(곰출판 | 296쪽)으로 출간됐다. 엮은이는 탁선미 한양대 교수(독어독문학과)이다. 엮은이와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철학 에세이 한 편을 발췌해 게재한다. 일상에서 자주 느끼는 ‘분노’에 대한 철학적 시선이 돋보이는 글이다. 

장춘익 고 한림대 교수(철학과)는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분노하지 말아야 할지 철학적 시선을 제시한다. 사진=픽사베이

조금 더 화를 잘 내거나 조금 더 느긋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가끔 분노한다. 분노는 강렬하면서도 지속적인 감정이다. 우리가 때로 느끼는 행복감도 분노의 감정처럼 강렬하고 오래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행복감은 느끼는 순간 벌써 평범한 무채색을 띠기 시작한다. 반면 분노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 그런 감정을 갖는 것이 어리석다고 판단될 때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는다. 행복감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금방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분노는 아물었다고 생각되다가도 다시 더욱 아프게 터지는 상처와 같다. 

우리의 마음이란 게 잘 구획되어 있어서 마음의 한구석에서 일어난 감정이 그 자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감정이 마음에서 차지하는 자리의 크기는 바로 그 감정이 우리의 주의력을 얼마나 강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끄는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분노처럼 강렬하고 지속적인 감정은 우리 마음 전체를 사로잡아버리고, 동정심이나 이해심의 자리를 전혀 남겨놓지 않을 수도 있다. 사소한 일로 시작된 분노가 자신과 상대방의 인격 전체를 위태롭게 해도 서슴지 않고 분노에 몰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분노하는 사람에게서 공정하다는 느낌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성직자와 신도, 의사와 환자, 그리고 때로 스승과 제자처럼 이미 한 쪽이 다른 쪽의 말을 경청하고 따를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사소한 충고도 기대한 효과를 내기보다는 관계를 소원하게 하기 일쑤이다. 여러 사람과 두루 잘 지내고 싶은 사람은 남에게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는 것을 처세술의 제1조로 삼을 일이다. 

분노는 대개 공정한 판단과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분노의 피해자는 일단 분노의 화살을 맞는 사람이다. 그러나 분노하는 사람 역시 언제나 분노의 희생자다. 한 번 터진 포탄을 다시 탄피에 넣을 수없는 것처럼 분노가 가져온 부작용은 흔적 없이 처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인격수양의 요체 가운데 하나는 분노가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 막고 분노의 크기를 분노할 이유에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분노의 폐해를 절감한 나머지 어떤 이는 분노의 감정이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고의 수양 단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바람직한지도 의문이다. 하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거는 정열적인 인물들이 세계사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믿지 않더라도, 정열의 중요성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정열의 에너지는 우리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이념이나 가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이념이나 가치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한 분노에서 온다. 가난에 대한, 사랑을 막는 구습에 대한, 공정한 세상의 실현을 막는 사회구조에 대한, 여성의 인간적 지위를 가로막는 가부장제에 대한 분노가 없다면, 어떻게 새로운 삶을 위해 자신의 모든 편안함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겠는가. 그러니 분노는 그저 사라져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문제는 무엇에 분노하는가다.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분노하지 않는가를 보는 것은 한 사람의 인품을 평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화낼 일이 아닌데 화를 내는 자는 부족한 자이고, 정말 화를 낼 일에 화를 내지 않는 자는 의심스러운 자다. 아마 전혀 분노하지 않는 자는 자신이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가치를 아무것도 갖지 않은, 마음이 없는 동물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아무런 장애물을 갖지 않는 천사이리라.

그런데 조심하자. 무엇은 화낼 만하고 무엇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당신의 판단에 성숙의 정도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드러난다. 작은 물음이 작은 답을 얻게 하고 큰 물음이 큰 답을 얻게 한다는 것은 공자님의 말씀이던가. 아마 사소한 일에 대한 분노가 작은 인품을 만들고, 큰일에 대한 분노가 큰 인품을 만든다고 해도 틀리지 않으리라. 나는 당신이 작은 편익과 사소한 자존심 싸움에는 넉넉한 마음이기를 희망한다. 그렇지만 권위주의와 사회적 차별, 세계의 기아,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 여성의 좌절, 맹목적인 자연의 파괴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장춘익 
전 한림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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