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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교육, 중심부 담론으로 진입할 때다
여성주의 교육, 중심부 담론으로 진입할 때다
  • 탁선미
  • 승인 2022.06.28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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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 탁선미 외 10인 지음 | 장춘익교육실천연구회 엮음 | 곰출판 | 332쪽

보편적 도덕과 의사소통 합리성, 환대의 윤리로서 교육
전국 46개 철학과 중 6개 학과만 여성주의 과목 개설

이 책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어떤 특별한 여성주의 대학교육의 사례에 대한 보고이자 연구이다. 화제의 수업은 춘천이라는 지역의 한 대학에서 약 20년간 이어진 장춘익 교수(1959∼2021)의 <여성주의철학>인데, 이 수업은 첫째, 철학과라는 교육공동체를 배경으로 신뢰자원을 가진 전임교원의 전공교과목으로 운영되었고, 둘째, 종단사적 영향 연구가 가능한 매우 드문 장기적 교육사례이며, 셋째, 여남학생 비율이 균형을 이룬 수업집단을 대상으로 남성교수가 여성주의교육을 실시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독보적인 사례이다. 

 

2015년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가 이야기되고, 성차별과 젠더 갈등이 연일 언론에 언급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또 여성학과 여성학 과목이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 대학캠퍼스에 화려하게 진입하였고 그 이후 여성과 젠더연구,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여성)학자와 활동가들의 연구가 지금까지 확장일로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장춘익 교수의 위 수업의 특별한 성격이 얼핏 잘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대중적 페미니즘이 처음 확산된 세기전환기 이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놀랍게도 대학 인문사회과학 교육의 중심 공론장, 즉 분과학문의 전공 커리큘럼 자체는 여성주의 연구의 결실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돌아가고 있음이 확인된다. 

오히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여성학 학위과정과 교과목들이 폐지되거나 축소되었는데, 2018년 전국 198개 4년제 대학 교과목편람 기준 ‘성’ 관련 전공 교과목은 평균 2.11개이고 교양 교과목은 평균 2.94개뿐이다(이예담(2018), 대학 내 여성학의 현황 – 교과목에 대한 양적 분석을 중심으로). 또한 여성주의 연구의 이론적 토대인 ‘여성주의철학’을 전공 교과목으로 개설한 경우는, 2019년 2학기∼2021년 1학기 4개 학기 기준 전국 46개 철학과 중에서 단 6개 학과(서울시립대, 서울대(미학과), 이화여대, 전북대, 제주대, 한림대)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 중 2015년 이전부터 해당 교과목을 운영한 학과는 서울시립대, 전북대, 한림대 철학과 3개 학과이며, 교과목의 안정적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전임교원의 교과목 담당은 한림대와 제주대 철학과 단 2개 학과 뿐이다. 게다가 유감스럽게도 이 6개 철학과 중 전북대와 한림대는 추후 여성(주의) 전공 교과목의 유지가 불투명해졌다. 이러한 통계는 지난 20여년 대학의 여성주의 교육이 교양과목, 비전임 여성교원, 여성 수강생으로 뚜렷하게 편중되어 있었고, 그럼으로써 주변부 교육의 위상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시민적 의사소통의 실험실

최근 2년의 선거결과들은 우리 사회 청년세대의 성별 정치적 양극화가 사회통합을 해치는 수준으로 심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이 청년세대들을 교육하는 의무를 가진 우리 대학사회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책의 집필을 위해 결성된 <장춘익교육실천연구회(탁선미·조한진희·노성숙·나영정·권율수)>는 대학의 여성주의 교육이 이제야말로 정체성의 정치에 토대를 두는 주변부 학문의 위상을 벗어나서, 성별과 무관하게 모든 대학구성원이 함께 참여하는 중심부 담론으로 진입하고, 보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며 상호책임감 있는 의사소통의 교육 형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판단이다. 

하버마스 연구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장춘익 교수는 대학교육을 참여적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고유한 의미의 정치적 공중이 형성되는 여러 중요한 사전 공론장들 중의 하나로 이해하였다. 시민적 연대의 도덕 형성을 위한 공간으로서 오늘날 대학교육 공론장이 더욱 중요해진 이유는 후기산업사회에서 사회정의 담론이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분배 문제에서 보편적 인권운동이나 생태주의, 페미니즘 문제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라는 교육 공동체를 배경으로 여남학생이 고루 참여하고 남성교원이 지도하는 그의 <여성주의철학>은 참여자 다양성, 의사소통의 개방성, 관계의 상호구속성을 두루 갖추었다는 점에서 고유한 의미의 민주주의 시민적 의사소통의 작은 실험실로 비유될 수 있다. 많은 보고와 증언을 분석한 결과, 그의 수업은 여남 학생 모두에게 성차에 대한 자신의 기존 이해를 강화하는 선제적 동일시를 어렵게 만들었고, 성차의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관계에 들어서게 만들었고,  그 과정을 통해 다른 성의 존재 방식을 ‘발견’함으로써 차별을 규범화하는 사회문화 권력구조에 대한 인식에 스스로 도달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책의 2장 집단설문조사와 5장 심층인터뷰가 보여주듯이, 그래서 그의 <여성주의철학>은 여성 수강생들 뿐 아니라 남성 수강생들도 종종 ‘나의 삶을 바꾼 수업’으로 회상한다. 

하지만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여성주의 교안과 교수법, 교육영향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1장, 2장)를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이 책은 스승의 갑작스런 죽음이라는 실존적 충격 상황에 마주하여 남은 자들, 이제는 성인이 된 제자들이 고통 속에 애도하는 가운데 끌어내고 현존시킨 저 지나간 전환적 인식과 성장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 다시 비추어보는 개인의 자아에 대한 내밀한 성찰의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하다(5장, 6장). 이 책이 교안과 교수법 연구를 넘어 새로운 여성주의 페다고지를 향한 깊이 있는 이론적 비평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3장, 4장)은, 보다 집단적이고 계량적인 수업영향 평가와 더불어 바로 이처럼 질적 연구를 가능하게 해준 심층 인터뷰와 개인의 스토리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개인적 고백과 스토리들 덕분에 독자들 역시 어느덧 과거의 저 전환적 인식의 내밀한 시간에 함께 불쑥 다가서는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연구회나 12인의 집필자들을 훨씬 넘어서는 수강생 전체 집단의 목소리와 생각들이 모아진 결과물이다.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철학> 20년 교육실천은 보다 보편적인 도덕, 의사소통의 합리성, 타자에 대한 환대의 윤리에 토대를 둔, 미래를 위한 새로운 여성주의 페다고지가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바로 이러한 여성주의 페다고지를 추구하고 공감하는 여성과 남성, 새로운 청년세대와 이들을 교육하고 이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모든 기성세대를 독자로 초대하고 싶다. 성별, 연령, 지역을 넘어 공존과 환대의 윤리에 기반한 페미니즘을 희망하는 더 많은 독자들과 함께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탁선미 
한양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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