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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부대와 이태원’, 흑인음악을 한국에 뿌리내리다
‘미군 부대와 이태원’, 흑인음악을 한국에 뿌리내리다
  • 김학선
  • 승인 2022.07.29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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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어디서 왔니 ⑤ 흑인음악

대중가요의 역사와 문화를 현장감 있게 조명한 『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1960, 1970, 1980, 1990)가 화제다. 이 시리즈는 한국 팝에 대한 문화연구 측면과 K팝의 뿌리를 찾는 여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특히 『한국 팝의 고고학』은 공간을 중심으로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통사적으로 엮어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에 책의 공저자인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가 ‘K팝 어디서 왔니’라는 제목으로 책에서 못다한 얘기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한다. 

미군 기호에 맞는 흑인음악 부른 윤복희·사랑과 평화
한국에 돌아온 재미교포들, R&B·힙합·뉴잭스윙 이식

몇 해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영상이 하나 있다. 가수 윤복희가 속했던 코리안 키튼스(The Korean Kittens)의 미군 부대 공연 영상이다. 윤복희는 신들린 듯한 모습으로 노래와 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군인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윤복희가 부른 노래는 레이 찰스(Ray Charles)의 「What’d I Say」였다.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 드물게 소울 음악을 했던 밴드 데블스와 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던 영화 「고고70」. 사진=을유문화사

한국에서 가장 잘한다는 가수와 연주자들이 미8군 무대에 섰다. 전국 미군 클럽의 수가 264개에 이를 만큼 수요가 늘자 아예 전문적으로 무대에 설 연예인을 체계적으로 관리·공급하는 전문 업체도 등장했다. 규모가 커지자 이를 관리하기 위한 심사도 철저해졌다. 미국에서 파견한 전문 심사위원들이 오디션을 보고 등급을 매겼다. 사랑과 평화가 ‘스페셜 더블A’를 받았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미8군 무대에선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앞서 언급했듯 코리안 키튼스는 레이 찰스의 노래를 불렀다. 윤복희는 흑인 싱어가 빙의한 듯 소울풀하게 노래했다. 사랑과 평화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을 대표하는 훵크/소울 밴드로 불린다. 1970년대 큰 인기를 얻었던 록 밴드들은 주로 소울 사이키 밴드로 소개됐다. 미군의 기호에 맞춰 소울 음악, 즉 흑인음악을 하는 음악가들의 수가 많았다. 흑인음악은 기능적으로도 많은 연마가 필요한 음악이다. 생계를 위해, 또 취향에 맞춰 소울 음악을 하면서 음악가들의 역량도 함께 향상됐다.

하지만 이 음악들이 미군 부대 담장 밖을 넘어가긴 쉽지 않았다. 부대 밖 한국의 대중은 여전히 트로트를 즐겼고 이를 자신들의 음악으로 삼았다. 레이 찰스의 음악을 부르는 코리안 키튼스의 모습을 누군가는 경탄하며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레이 찰스의 음악은 한국에서 큰 인기를 얻어 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면 사랑과 평화 정도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정통 소울이나 훵크 음악을 가지고 큰 인기를 얻었던 음악가도 없었던 것 같다. 

1980년대 이태원을 1960~1970년대의 미8군 무대와 비교하는 건 어떨까. 이태원 역시 미군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용산 기지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유흥을 즐기기 위해 찾았던 곳이 이태원이다. 당연하게도 이태원에선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 주류와는 다른 음악들이 전파됐다. 수많은 춤꾼들이 이태원 클럽에서 춤을 추었고,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을 틀어줄 DJ가 필요했다. 당시 한국에서 잘나가는 DJ들은 강남과 이태원의 클럽에 섰는데 트는 음악은 달랐다. 

강남 나이트클럽에서 유로 댄스를 비롯한 당시 유행하던 음악을 주로 틀었다면 이태원에선 굉장히 ‘딥’한 흑인음악을 틀었다는 게 당시 관계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여기서 ‘딥’하다는 건 기존의 소울이나 훵크, 디스코뿐 아니라 1980년대부터 미국 팝 음악계에서 많은 인기를 얻어가던 힙합이나 뉴잭스윙 같은 음악이 포함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음악들 역시 이태원의 영역을 넘어가지 못했다. 1990년대가 돼서야 전설의 문나이트 클럽이라거나 이태원 춤꾼들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이지, 당시엔 인식도 좋지 않았을뿐더러 이태원 클럽과 그곳에서 활동하는 DJ와 댄서들이 듣는 음악은 주류가 되지 못했다. AFKN에서 방송하던 흑인음악 전문 방송 「소울트레인」을 찾아보던 한국인은 소수였다. 

 

공연·라디오에서 불리지 못했던 흑인음악

그렇다면 한국은 흑인음악을 좋아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지금껏 이야기했던 이야기와 다른 대답인 것 같지만, 이는 생산자와 수용자의 차이로 이야기를 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1960~1970년대 대중은 흑인음악을 수용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공연은 언감생심이었고 그나마 들을 수 있는 라디오에서 흑인음악의 검은 소리는 거의 송출되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흑인음악을 추구하던 데블스나 서울나그네(사랑과 평화 전신)의 성취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한국에서 블랙 뮤직을 전파했던 선구적인 음반들. 왼쪽부터 현진영, 듀스, 솔리드. 사진=을유문화사

이태원에서 음악을 틀던 DJ들은 1990년대 가요계에 진출해 가요에 흑인음악을 접목하기 시작했고, 댄서들은 직접 마이크를 잡고 노래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춤꾼으로 유명했던 이현도와 김성재는 듀스(Deux)를 결성해 한국에 힙합과 뉴잭스윙을 전파했고, 이들보다 선배인 현진영도 새로운 댄스(New Dance) 음악을 들려줬다. 현진영의 음악을 제작했던 프로듀서 이수만과 작곡가 홍종화가 레퍼런스로 삼은 건 재닛 잭슨 같은 “바운싱이 좋은 훵키한” 음악이었다. 

그리고 재미교포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1980~1990년대 교포는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는 존재였다. H2O의 김준원이나 유앤미 블루의 두 멤버처럼 새로운 록 음악을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1990년대는 미국에서도 블랙 뮤직의 세가 한참 강해질 때였다. 그 음악을 듣고 자란, 그리고 재미교포들에 중요한 공간인 한인교회에서 가스펠을 부르던 교포 청년들이 한국에 돌아왔다. 그들이 들려주는 음악은 이제 소울 대신 R&B라 불렸고 힙합이나 뉴잭스윙 같은 새로운 음악도 함께 이식됐다. 미국과 한국의 유행 간격이 점점 더 좁혀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제는 좁혀지다 못해 실시간으로 서로 유행을 주고받는다. 한국의 청소년은 이제 누구나 힙합을 듣고 랩을 한다. 미군 부대 안에서만 통용되던 음악, 그리고 이태원을 벗어나지 못했던 음악, 하지만 미군 부대와 이태원이라는 특수한 공간, 그리고 재미교포라는 특수한 사례를 통해 한국에서 흑인음악은 뿌리를 내렸고 지금은 가장 울창한 장르가 됐다. 외부의 요인이 내부와 맞닿은, 한국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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