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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군 무대에서 ‘다운타운’ 청년문화로
미8군 무대에서 ‘다운타운’ 청년문화로
  • 신현준
  • 승인 2022.07.08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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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어디서 왔니 ② 탄생과 절정

대중가요의 역사와 문화를 현장감 있게 조명한 『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1960, 1970, 1980, 1990)가 화제다. 이 시리즈는 한국 팝에 대한 문화연구 측면과 K팝의 뿌리를 찾는 여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특히 『한국 팝의 고고학』은 공간을 중심으로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통사적으로 엮어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에 책의 공저자인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가 ‘K팝 어디서 왔니’라는 제목으로 책에서 못다한 얘기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한다. 

미8군 무대와 동시에 방송확립·음반 판매가 결합해 성장
금지곡과 활동정지로 찰나의 절정을 맞이한 혁명의 음악

지난 회에서 ‘한국 팝’이라는 명명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했지만 언급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이는 그 시대의 특징에 대한 것이다. 좁게 정하면 1960년대부터 1990년대, 넓게 정하면 195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시대에 해당한다. 정치나 경제 등의 ‘진지한’ 분야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해당 시대의 특징을 말할 수 있지만, 대중음악이라는 ‘하찮은’ 분야로 정의해 보자. 사실 ‘하찮은’이 아니라 ‘하찮다고 간주되는’이 정확한 표현이다. 

 

손석우가 작사·작곡하고 한명숙이 부른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가 수록된 앨범(1963 추정), 이장희가 작사·작곡·노래한 「그건 너」가 수록된 앨범(1973), 신중현과 엽전들 1집 앨범(1974). 사진=을유문화사

이 시대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음반(record)이라고 총칭되는 저장 장치가 전성기를 이루었고 TV와 라디오라는 매스 미디어가 지배했던 시대다. 이는 이 시기의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명백해진다. 2000년대 중반 이후는 ‘음반’이라는 단어를 ‘음원’이라는 단어가 대체했고, TV와 라디오는 인터넷, 특히 유튜브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 전 시대에는 TV와 라디오의 보급률이 낮았고 음반도 SP레코드 혹은 유성기 음반이 지배했다.

『한국 팝의 고고학』의 1권(1960년대)과 2권(1970년대)의 부제는 각각 ‘탄생과 혁명’, ‘절정과 분화’다. 이 부제가 선정적인 데다가 과장이 있다고 평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이 시기 대중음악이 ‘급변’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라고 관대하게 생각해 주기 바란다. 

 

최초의 한국 팝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한국 팝’을 언급하기 위해서 빼놓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일’이 있다. ‘미8군 무대’라고 불리는 실천과 제도다. 한국인이 주한미군을 위해 ‘쇼’를 공급한 이 무대가 한국 대중음악에 미친 효과를 얼마나 강조해야 할지,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논란거리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미8군 무대 출신’이라는 브랜딩으로 1960년대에 상업적 성공과 대중적 명성을 거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국 팝’이라는 호칭에 적격인 곡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가수 한명숙도, 작사·작곡한 손석우도 이 무대와 연관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이 자동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한국 팝의 탄생은 미8군 무대에서의 경력 외에도 방송의 확립과 음반의 판매라는 실천과 결합되어 설명하지 않으면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한국 팝은 미8군 무대에서 왔다’라는 문장은 맞는 말도 틀린 말도 아니다. ‘어디서 왔는가’만큼 ‘어디로 가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팝의 탄생 시점이 묘하게 박정희 정권의 성립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즉, 『한국 팝의 고고학』의 1권과 2권은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다. 그래서 대략 1961년부터 1967년의 시기는 손석우를 필두로 이봉조, 박춘석, 길옥윤, 김인배 등의 멋쟁이 악단장이 작곡가와 연주인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방송가와 음반계를 지배하던 시기다. 

이 시기는 미8군 무대가 쇠퇴하던 때이기도 하다. 그 결과, 그들보다 젊은 세대들, 대략 1940년대 생들이 내국인들을 대상으로 청중을 찾아 나섰다. 1960년대 말, 걸 그룹 펄 시스터스의 ‘소울’과 보이 밴드 트윈 폴리오의 ‘포크’는 단순히 서양 팝의 모방과 수용에 머물지 않는 한국 팝의 창작 혹은 번안을 낳았다. 그리고 터졌다. 이 시기를 ‘혁명’이라고 부른 이유다. 경제개발계획으로 인해 시쳇말로 ‘돈도 좀 돌던’ 때다. 

이를 공간과 장소를 통해 해석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의 20년은 ‘시내’나 ‘사대문안’으로 불리던 서울의 도시 공간에 재미를 찾으려던 여러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다운타운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고 음악다방, 음악감상실, 생음악살롱, 고고클럽 등 이전 세대와는 구분되는 여러 ‘핫스폿’들을 우후죽순 탄생시켰다. 어딜 가나 음악이 있었다. 

이는 점차 ‘청년문화’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음악산업과 방송산업이 이들에 대한 조명을 증가시키면서 다운타운은 젊은이들의 공간이 되었고 1974∼1975년에는 소설, 영화, 미술 분야에까지 청년문화의 기운이 뻗쳐서 대중문화의 주류의 한 갈래로 부상했다. 그 결과는 많은 사람이 아는 대로다. 1975년 여름부터 대대적으로 금지곡이 지정되었고 겨울에는 몇몇 음악인들에게 평생 활동을 금지하는 처분이 내려졌다. ‘절정’은 짧았다.

고 이영훈은 정동길과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이라고 아쉬워하는 「광화문 연가」를 1988년에 작사·작곡했다. 그가 1970년대에 10대 시절을 다운타운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이 곡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어제는 비 내리는 종로 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라는 이장희의 「그건 너」는 많은 가수와 그룹이 리메이크하고 있다. 신중현과 더 멘의 「아름다운 강산」은 심지어 애국가로 지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한순간에 주저앉은 ‘청년문화 혁명’의 아쉬움에 대한 단편적인 예일 것이다. 이런 질문이 현재 60대 이상의 노스탤지어로 전락하지 않게 만드는 투쟁은 여러 가지 프레임들로 고통받고 있다. ‘대마초 피운 놈들을 잡아 족친 게 뭐가 문제냐?’라는 프레임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놀랍게도 당시 학생운동권도 이에 대해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1974년 ‘청년문화 논쟁’에서도 ‘딴따라’를 청년문화의 기수라고 부르는 것에 격렬히 항의했다. 이제 와서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반칙이다. 단지 그게 불가피했던 상황이 놀라운데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면 그쪽이 반칙이다. 「아름다운 강산」은 촛불문화제에서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기타를 치고 ‘마약 전과 5범’ 전인권이 노래를 불렀다.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사회융합자율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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