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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위의 장르 ‘서태지’…록·힙합·테크노를 솜씨 좋게 버무리다
장르 위의 장르 ‘서태지’…록·힙합·테크노를 솜씨 좋게 버무리다
  • 신현준
  • 승인 2022.07.22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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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 어디서 왔니 ④ 상상과 우상

대중가요의 역사와 문화를 현장감 있게 조명한 『한국 팝의 고고학』 시리즈(1960, 1970, 1980, 1990)가 화제다. 이 시리즈는 한국 팝에 대한 문화연구 측면과 K팝의 뿌리를 찾는 여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특히 『한국 팝의 고고학』은 공간을 중심으로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통사적으로 엮어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에 책의 공저자인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가 ‘K팝 어디서 왔니’라는 제목으로 책에서 못다한 얘기를 총 8회에 걸쳐 연재한다. 

서태지와 아이들·노이즈·듀스 에이치오티까지, X세대의 우상
국제적 유행과 최신 스타일 인증 위해 장르명도 영어로 병기

1990년대는 ‘좋았던 시대’로 기억된다. 정말 좋았는지는 따져 보아야겠지만, ‘돈이 잘 돌았던’ 시대였던 것은 맞다. 정치에서는 민주화가, 문화에서는 자유화가 진전됐다. 무엇보다 경제에서 돈이 팡팡 잘 돌았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른바 ‘3저 호황’으로 인해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국내에 풀리면서 ‘과소비’를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우상’의 일부 목록. 서태지와 아이들 1집(1992), 노이즈 1집(1992), 듀스 2집(1993)의 음반 표지. 사진=을유문화사

1994년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돌파했을 때는 선진국이 코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해 성수대교가, 이듬해 삼풍백화점이 붕괴했지만 “자본주의여 울울창창하라”는 어떤 문인의 한탄처럼 대세는 명백해 보였다. 그 좋았던 시대가 1997년 말 이후 환란의 시대로 급전하지만 그 뒤 2년은 ‘1990년대’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만 같다. 아이돌 보이 그룹 지오디(god)가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고 효도를 노래하던 시대 말이다. 

지오디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이 시대가 우상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아이돌’과 ‘우상’이 이제는 의미가 전혀 다르게 들리더라도 아이돌은 우상이고 우상은 아이돌이다. 누구의 우상이냐고 묻는다면 신세대 혹은 X세대의 우상이라고 답하는 게 제일 편하다. 그래서 1990년대를 물리적 연력(年歷)이 아니라 우상들의 문화적 연력으로 잡는다면 1988년부터 1997년까지가 낫다. 시작에는 소방차가 있고 끝에는 에이치오티(H.O.T.)가 있다. 신해철, 015B, 심신, 김원준, 김완선, 이지연, 강수지 등이 8말9초를 누볐지만 지금 관점에서 아이돌은 아니다. 

이 시대를 반으로 뚝 자르면 1988년부터 1993년까지는 박남정(과 프렌즈), 현진영과 와와, 철이와 미애, 서태지와 아이들, 노이즈(Noise), 듀스(Deux) 등이, 1994년부터 1997년까지는 룰라(Roo’Ra), 디제이 디오씨(DJ DOC), 쿨(Cool), 클론(Clon), 베이비 복스(Baby Vox) 등이 지배했다. 신승훈, 김건모, 김종서, 신성우 등의 빼어난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조관우, 신효범, 양파, 박정현 등의 R&B 보컬리스트 역시 한 계열을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X세대 댄스가요’가 지배적인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들이 여기저기 모습을 비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들의 음악을 즐기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TV에 나오는 모습을 ‘본방 사수’하면서 시청하는 것, 그리고 열성 팬이 아니라면 리어카에서 파는 불법 테이프를 워크맨으로 듣는 것이었다. 신문과 잡지는 연일 이들의 소식을 실어 날라서 굳이 정보를 검색할 필요가 없었다. 

라인음향과 월드뮤직의 음반 제작

이제까지는 X세대 댄스 가요의 ‘얼굴’만 살펴보았다. ‘몸통’은 따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1980년대 나이트클럽이나 디스코텍에서 DJ로 활동하면서 사운드 믹싱을 갈고 닦은 뒤 음반 제작(프로듀싱)으로 나선 용자들이었다. 전형적인 인물은 한때 라인음향을 제국으로 만든 김창환이었다. 1990년대 중반 라인음향은 1970년대 중반 포크 음악의 산실인 오리엔트 프로덕션과 더불어 중요한 사례로 더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1990년대는 1970년대와 다르다. 무엇보다 세계화의 시대였다. 세계화가 ‘globalization’이 아니고 ‘segyehwa’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던 인물들이 하던 말이다. 미국 주도의 글로벌화에 수동적으로 당하지 말고 ‘우리’가 똘똘 뭉쳐 주도적으로 세계 수준의 나라가 되자는 뉘앙스의 말이었다. 이 말에 부응하는 대중음악계의 실천은 ‘장르’의 수입이었다. 1987년까지 이런저런 경로가 막혀 있다가 갑자기 뚫리니 그동안 병목으로 몰려 있던 외국의 이런저런 트렌드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얼터너티브 록, 랩·힙합, 하우스·테크노 등이 대표적이었지만 이것만 알면 세계화에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각각의 하위 장르(subgenre)들도 알아야 세계화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만 4년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의 지존으로 군림한 사실은 방금 언급한 1990년대의 3대 장르를 솜씨 좋게 버무렸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서태지는 한국에서 하나의 메타장르, 장르 위의 장르가 되어 버렸다. 김건모도, 솔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경우는 곡 하나하나마다 장르명을 로마자(영어)로 붙였다.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최신 스타일이라는 인증이었다. 김건모는 라인음향의 ‘김창환 사단’이었고, 솔리드의 음반사는 월드뮤직이었는데 이곳은 뒤에 ‘이상민 사단’의 터전이 된다. ‘월드 라인’인 것이다. 

 

솔리드 2집(1995) 음반 뒷면에 실린 곡명 옆에는 영어로 장르명이 병기되어 있다. 사진=을유문화사

이건 주류 음악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언더그라운드인 듯, 언더그라운드 아닌 록 음악의 경우도 그런지, 매드체스터, 네오 펑크, 브릿팝, 고딕, 하드코어, 이모, 슈게이징, 뉴 메탈, 네오 거라지 등의 서브장르가 속속 수입되었고 요즘보다야 시차가 있었지만 이 서브장르를 추종하는 밴드들이 탄생했다. 1997년에는 이 밴드들 일부가 ‘인디’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집단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지금까지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4권의 제목은 ‘상상과 우상’이다. 이 제목은 책을 쓴 다음에 고심해서 붙였다. 상상은 환상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PC통신과 삐삐 등이 보급되면서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다는 환상이 그득했던 시대를 말하고자 했다. ‘장르파괴’나 ‘경계넘기’ 등처럼 모든 것이 유동한다고 생각했던 당시 시대의 신호였다. 반면 우상은 중의적이다. 하나는 이 시대 전반기에 형성되어 1990년대 중후반 본격적으로 패키지로 만들어진 아이돌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유동해도 어딘가에 정박할 곳이 필요하며 그곳에 제단을 마련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우상은 장르에서도 드러나고 장소에서도 드러난다. 무수히 많은 장르들을 우상처럼 떠받들(다가 휴지처럼 버리)던 시대다. 반면 장소도 우상이었다. 이 장의 1장이 압구정동이고 9장이 홍대인 이유다. 이곳들은 조금씩 이동했어도 여전히 공간적 우상이다. 좋은 의미도 있고 나쁜 의미도 있다. 그것은 자기가 의미를 찾기 마련이다. 

음악은 이렇게 움직이다가 잠시 정지하기도 한다. 한국 팝이 고고학이자 지리학의 대상인 이유다.

 

 

신현준
성공회대 교수(사회융합자율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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