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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칠레 신헌법과 교육정책을 둘러싼 갈등
[글로컬 오디세이] 칠레 신헌법과 교육정책을 둘러싼 갈등
  • 이성훈
  • 승인 2022.01.13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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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이성훈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
칠레 제헌의회가 사회적 요구에 부합한 신헌법을 제정하는 데 순탄치 않아 보인다. 사진은 지난해 7월 4일(현지시간) 칠레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마푸체족 의원 엘리사 롱콘. 사진=EPA/연합뉴스

2021년 7월 제헌의회가 임기를 시작하면서 칠레에서 신자유주의 유산을 지우려는 역사적 여정이 시작됐다. 제헌의회에서 무소속과 좌파 세력이 의석 다수를 차지하면서 이른바 ‘1980년 체제’로 명명되는 ‘피노체트의 유산’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제헌의회에서 우파는 37명으로 전체 의석수의 3분의 1에 미치지 못했고, 2018년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던 무소속과 주요 야당 출신이 3분의 2에 달했다. 이중 무소속이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데, 이는 기성 정당과 정치체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함께 향후 헌법 제정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념 갈등의 중심이 된 칠레 교육제도

최근 제헌의회 내에서 이른바 ‘교육할 수 있는 자유’와 ‘자녀의 교육을 선택할 수 있는 부모의 우선적 권리’를 둘러싼 좌·우파 세력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됐다. 우파의원들이 이 권리들을 기본권 소위원회의 의제에 포함할 것을 요구해왔지만 11월 전체 투표에서 세 번째로 부결됐다. 중도와 좌파 의원들로 구성된 다수파는 이 표결로 향후 신헌법에서 이 권리들이 배제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2006년 학생 시위부터 지금까지 학생과 시민사회가 보여주었던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정서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부결은 향후 신헌법이 담고 있을 정책적 방향을 시사한다. 우파 역시 세 번씩이나 표결을 요구할 만큼 이 권리들이 칠레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의 중요한 근간으로 포기할 수 없는 헌법적 가치라며 반발하고 있다.

칠레 헌법은 피노체트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됐지만, 교육 분야에서도 피노체트 체제의 유산은 여전하다. 피노체트 체제의 근간인 1980년 헌법은 ‘교육받을 권리’와 함께 ‘교육할 수 있는 자유’와 ‘자녀의 교육을 선택할 수 있는 부모의 우선적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이런 교육 기본권들은 국가의 책무성보다는 민간 부분이 교육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되고 있다.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경쟁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민간 부분이 교육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우처 제도라고 하는 보조금 지급 제도였다. 재학생 수에 따라 일정 지원금을 지원하는 제도로, 공립과 사립을 차별하지 않고 보다 많은 학생을 유치하는 학교가 더 많은 지원금을 받는 시장원리는 교육에서도 작동하게 된다. 피노체트 이후 등장한 콘세르타시온(Concertacion) 초기 정부들도 이러한 교육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했다. 두 차례에 걸친 사회당의 바첼렛 집권 시기에 들어서야 신자유주의적인 교육제도에 대한 변화를 모색했다.

특히, 의무교육기관에서 등록금 징수 금지, 교육기관의 이윤 행위 금지, 선택적 입학행위 근절 등의 개혁조치를 통해 교육 기회가 사회적 경제적 능력에 따라 제한받지 않도록 제도화했다. 그런데도 본질적인 교육개혁을 바라는 학생들의 요구는 지속됐다. 특히, 2006년과 2011년의 학생 시위에서 보듯이 국가의 교육 책무성보다는 민간의 투자를 강조한 칠레의 교육제도에 대한 사회적 불만은 극심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에 따라 구성된 제헌의회는 신자유주의적인 교육체계의 전면적인 변화를 요구받았다. 제헌의회 다수파는 피노체트 체제가 야기한 공교육의 약화와 극심한 교육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콘세르타시온 정부들이 보여주었던 소극적인 방식보다는 피노체트가 남긴 교육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민간 부분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국가는 보조금을 지급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에서 국가가 더욱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헌의회 다수파는 신자유주의적인 교육제도의 근간이 되어 온 ‘교육의 자유’와 ‘부모의 우선적 권리’를 어떤 식으로든 제한하고자 한다. 반면 구체제의 유산을 지키려는 우파로서는 민간의 역할을 보장하는 이 두 가지 기본권을 헌법에 명시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칠레 교육의 미래는 오리무중

교육 체제의 변화를 바라는 칠레 시민사회와 학생들은 국가가 교육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회적 국가’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제헌의회가 이런 사회적 요구를 신헌법에 담아낼 수 있을지는 제헌의회 내 세력 분포와 국민 여론을 통해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좌파 대통령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대통령 선거 과정과 제헌의회 논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많은 혼란은 ‘피노체트 체제’와의 근본적인 단절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이성훈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주된 연구 분야는 라틴아메리카 문화연구와 라티노 문화다. 주요 저작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2014·공역), 『논쟁을 통해 본 라틴아메리카 사회와 문화』(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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