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3:55 (토)
루크레티우스, 정치의 가장 깊숙한 핵심을 건드리다
루크레티우스, 정치의 가장 깊숙한 핵심을 건드리다
  • 안재원 서울대·HK연구교수
  • 승인 2012.05.09 16:5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④ 고전교육은 집단을 뒤흔들었나(서양편)

인간의 삶이 무거운 종교에 눌려/모두의 눈앞에서 땅에 비천하게 누워있을 때,/그 종교는 하늘의 영역으로부터 머리를 보이며/소름끼치는 모습으로 인간들의 위에 서 있었는데, (중략) 그리하여 입장이 바뀌어 종교는 발 앞에 던져진 채/짓밟히고, 승리는 우리를 하늘과 대등하게 하도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1권 62~79행

지금 읽어도 도전적이다. 특히 마지막 주장, “승리는 우리를 하늘과 대등하게 하도다”는 오만(hybris)의 극치이다. 무엇보다도 ‘神’을 맨 앞자리에 놓는 서양고대인들에게는 특히나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인’이라는 뜻을 가진 기가스(gigas) 종족이 있었다. 그들은 우주의 통치권을 탐내어 산 위에 산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마침내 별들이 빛나는 하늘에 닿았고, 마침내 제우스의 궁전을 공격했다. 이에 격노한 제우스가 번개를 던져 그들이 쌓아 올린 산을 무너뜨리고 거인들의 몸을 찢어 대지 위에 뿌렸다. 이게 하늘에 도전하는 자들의 말로(末路)였다.

아네네의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극형 선고를 받게 된 혐의도 실은 신성모독 때문이었다. 해서, 종교에 대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 기원전 98/96~55/53년)의 저 ‘승리’ 선언은 참으로 대담하다 하겠다. 어쩌면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보다 더 대담했을지도, 그 파장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를 전하는 문헌이 없기에 일반 시민의 반응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물론 반응은 다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키케로의 말이다.

그것과 동시에 경외심과 종교 생활 역시 소멸될 수 밖에 벗는데, 그것들이 없어지면 삶의 동요와 크나큰 혼란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나(키케로)로서는, 신들을 향한 경건함이 사라지고 나면, 인간 종족에 대한 신뢰와 연대감, 그리고 가장 탁월한 덕인 정의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라 확신합니다.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 제1권 3장~4장  

계몽주의 시대 길 밝힌 古典

소박하다. 물론 작은 문제는 결코 아니다. 이에 대해 키케로는 약간은 유보적이다. 일단 종교를 무시하는 입장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에 대해서 둘 다 들어보자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출판됐을 당시의 로마의 분위기였다. 사실 ‘내전(bellum civile)’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기에 일반 시민들은 이 책에 출판 사실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정치가 안정되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는 사람이 생겨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 대한 호감과 반감이 분명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호감을 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오비디우스다. 그의 「변신 이야기」 시작 대목이다.

“바다도 대지도 만물을 덮고 있는 하늘이 생겨나기 전 자연은 전체가 한 덩어리였고 한 모습이었다네. 이를 사람들은 카오스라 불렀지. 원래 그대로 투박하고 어떤 질서도 어떤 체계도 갖추지 못한 채 무거운 덩어리로, 마찬가지로 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만물의 씨앗(원자)들이 한데 뒤엉켜 있다네.” 제1권 5~9행

미카엘 부르거의 작품
물론 오비디우스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어느 깊이로 참조했는지는 문헌학적으로 검증해야 할 물음이다. 하지만 오비디우스가 루크레티우스가 표방하는 유물론을 지지하는 것은 명백하다. 단적으로 오비디우스의 ‘카오스’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혼돈’을 뜻하고, 따라서 태초의 우주는 무질서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는 물질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미리 존재하는 무엇인가로부터 다른 형태의 무엇인가가 나온다는 생각, 다시 말해 “ex nihilo nihil” 곧 “아무것도 없는 것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에피쿠르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적인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세계관은 無(nihil)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유일신을 찬양하는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이유에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가장 혐오한 이들이 기독교의 교부들이었다. 해서,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수도원의 포도주 창고에서 발견돼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포찌오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라는 문헌사냥꾼이 독일의 풀다(Fulda) 수도원에서 이 책의 필사본을 발견한 해는 1417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필사본이 발견되지 않고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면,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그 이름만 전해졌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아마도 세계 역사도 지금의 모습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계몽주의 시대의 길을 밝힌 책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뉴턴과 같은 자연과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었기에 말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선언이다.

“정신에 자리잡은 종교에 두려움과 어둠을 태양의 빛과 낮의 빛나는 햇살이 아니라, 자연의 관찰과 추론으로 몰아내야 한다.” 『자연에 대하여』 제1권 146행~148행

사물의 본성이자 사회의 본성 '개인'

가히, 기독교계에서 싫어할 만하다. 하지만 그들이 싫어한 이유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은 루크레티우스에 감동한 볼테르나 홉스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벌인 反종교 운동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성과 합리성을 모든 행위의 원리이자 기준으로 삼는 서양의 근대는 이렇게 시작했다. 요즘이야 이 근대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지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당대 집단에 충격을 가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만든 책인 셈이다. 그렇다면 루크레티우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이런 문제작을 지었을까.

책의 원천 저작권은 에피쿠로스에게 있다. 하지만 라틴어로 옮긴 이는 루크레티우스다. 그의 생각을 소개하겠다. 그는 번잡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정치 활동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고, ‘숨어 사는(lathe biosas)’ 은둔의 삶을 즐기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아마도 이런 생활 덕분일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지만, 이 때문에 욕도 들어먹어야 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이에 대한 그의 반박은 이렇게 재구성될 것이다. 모든 운동은 언제나 연결돼 있다. 새로운 운동이 고정된 순서에 따라 이전 운동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대개 소위 기계론적 과학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소위 운명론이다. 이에 대해 인과의 사슬로 짜인 운명의 고리를 깰 수 있으며 무한한 이전의 원인으로부터 일탈이 가능하다는 게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이다. 그는 이 일탈을 이끄는 원리가 쾌락의 힘이라 주장한다. 쾌락이라는 최고 목적 때문에 인간은 정해진 노선이 아닌 일탈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자유의지가 생겨난다고! 쾌락을 최고 목적으로 보았을 때에 이를 방해하는 일체의 인위적인 제도는 예컨대 종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약한다고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런 자유의지를 가지는 존재가 개인이다.

반전은 여기서부터다. 그에 따르면 원자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은 무엇”이다. 그리스어로는 atomos, 라틴어로는 individuum이다. 그리스어 atomos는 근대에 와서는 자연과학의, 특히 화학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원자가 그것이다. 반면 라틴어 individuum은 법철학과 소위 사회과학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개인이 그것이다. 따라서 눈길을 끄는 것은 라틴어 번역이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무엇’의 정의를 인간에게 적용하고, 그 극한을 수렴해보자. 한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쪼개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 것을 추적하면, 결국은 그것은 곧 개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인 개인이 탄생한다. 인권 개념도 이를 바탕으로 성립한다. 이 인권 개념은 나중에 국권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개념으로까지 상승한다.

여기까지가 국가 개념과 대립적 지평에서 동등성과 대등성을 갖는 개인 개념의 성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가장 비정치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기에! 정치로부터 가장 멀리 거리를 취하려 한 철학자의 생각이 실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중심을 차지하기에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프랑스의 혁명 이후의 근대의 모든 정치 운동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확립을 위한 투쟁이었다는 사실 정도만 언급하자. 

안재원 서울대·HK연구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kiphros 2019-01-06 02:43:41
제가 좋아하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가 좋아하는 대목, 기사 잘 봤습니다.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