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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 사유의 방식을 전환시킨 ‘물음의 형식’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 사유의 방식을 전환시킨 ‘물음의 형식’
  • 안재원 서울대·HK연구교수
  • 승인 2012.04.17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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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③ 인간 정체성에 충격 가한 고전교육(서양편)

답은 인간이다. 이를 푼 이는 오이디푸스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이 사건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데에는 뭔가 남다른 사연이 숨어 있다. 해서, 그 사연을 소개할까 한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물음 방식이다. 얼핏 보기에, 물음은 평범하다.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방식으로 묻고 있기에. 하지만 이 평범한 물음 때문에 옛날 그리스의 테베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재난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이 물음을 단칼에 해결한 이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오이디푸스다. 그 공로로 그는 테베의 왕좌에 오른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한데,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따르면, 그 다음 사연이 기가 막힌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 친 노인을 몽둥이로 쳐 죽이고 그의 부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노인이 자신의 아버지였고 그 부인이 실은 자신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에서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 기원전 497/5년~406/5년)의 통찰력이 돋보일지도 모르겠다.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깊게 반성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단 스핑크스가 “그는 누구인가”라고 묻지 않고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흥미롭다. 물론 물음 형식의 차이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류 지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나름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 형식 자체가 사유의 중요한 한 형식이고 학문의 기본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부연하자. “이것은 무엇인가”의 고대 그리스어는 ti esti이다. 영어로 하면 what is it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그냥 질문이 아니다. 실은 플라톤이 서양 철학의 기본 판을 짤 때에 사용했던 핵심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존재의 세계를 말(logos) 위에 세우려 할 때 “그것이 그것이”기 위해서는 일단 logos의 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그 시험의 첫 번째 관문이 ti esti였기 때문이다.

이는 요컨대, “정의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절제란 무엇인가”, “덕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의 대화를 담고 있는 플라톤의 초기 텍스트들이라는 점에서 쉽게 확인된다. 예컨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는 대화가 「뤼시스」 편이다. 어쨌든 플라톤은 ti esti라는 물음 형식을 통해서 인류 지성사에 말(logos)로 사물을 규정하는 방식을 선물했는데, 이것이 다름아닌 “정의(definitio)”내리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미 스핑크스의 수수께기에서 보았듯이, ti esti라는 물음 형식은 플라톤 이전부터 사유 혹은 학문의 중요한 한 방식이었다. 단적으로, 다름 아닌 자연학자들이 사물과 자연의 원리(arche)를 궁구할 때에도, 그들이 던진 “세계의 시초는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근본적으로 ti esti 형식의 변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ti esti도 실은 자신의 독자적인 고안물이 아니라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의 재활용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재활용이 아니다. 인류의 사유 방식과 철학하는 길을 통째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의 주해사”라는 화이트헤드의 말도 근거없는 소리는 아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에 담긴 철학적 물음 

   맨하턴 박물관 소장본
다시, 소포클레스로 돌아가자. 그도 ti esti를 재활용한 인물 가운데에 하나다. 하지만, 플라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물음을 재활용했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그는 누구인가?”로 말이다. 그리스어로는 tis esti이다. 차이는 s자 하나다. 하지만, 그 차이는 크다. 물론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범인은 누구인가”의 형식으로 표현되지만 이 물음은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플라톤이 인류에게 선물한 정의내리는 형식으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물음은 소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의 형태로 주어지는 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포클레스가 던진 물음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어떤 사태와 그 사태를 둘러싸고 있는 특수하고 한 인간에게만 고유한 이야기의 형태로 풀 때에 답변이 가능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소포클레스의 물음이 추적하려했던 해답과 플라톤의 물음이 찾으려고 시도했던 정답은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하겠다. 도대체 자신이 찾고자 하는 선왕의 살해자가 그 자신이고, 그런데 그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이고, 자신이 낳은 아들과 딸이 아빠이자 형이고 오빠인 자라는 사실을 플라톤의 ti esti 형식으로 알아낼 수 있을까.

요컨대 플라톤의 물음 형식으로는 안티고네에게 오이디푸스는 아빠일까 아니면 오빠일까 등의 난제를 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ti esti에 대한 소포클레스의 재활용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하겠다.

단도직입적으로, 소포클레스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도대체 답이 가능한 질문일까. 내 생각에 이에 대한 답은 양가적이다. 가능하기도 하고 가능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약간은 역설적이지만 먼저 “가능하지 않다”는 답부터 하자. 이에 대한 근거는 이렇다.

과연 당신은 누구입니까의 물음에 대해서 “나는 홍길동입니다”라는 식 이외에 또 다른 대답을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과연 그는 누구일까. 아마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은 그 답을 찾기 위한 각각의 노력이 각각의 삶이고 개별 인생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인 즉, 원래 이 물음이 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물음 자체를 반성적으로 숙고하라는 일종의 철학적 화두이기 때문이다.

古典 텍스트에 녹아 있어야 하는 것들

이제는 “가능하다”는 답을 하겠다. 이에 대한 근거는 이렇다. 하지만 먼저 “어떤 점에서”라는 단서를 달겠다. 애당초 이 물음 자체가 물음이기에 그 의미가 있지, 답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어떤 면에서”는 가능하다. 요컨대 그 가능성을 다시 소포클레스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이디푸스가 극중에서 종국엔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사실도 “가능하다는” 답에 들어간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이 답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정반대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처지, 이 처지가 실은 또 다른 답이라는 소리다.

오이디푸스! 그는 아버지에게는 아들이자 경쟁자이고, 어머니에게는 아들이자 남편이고, 아들에게는 아버지이자 형이고, 딸에게는 아빠이자 오빠인 사람이었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를 없애버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누구일까. 이 사람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이 사람이 실은 인간이고, 이 사람이 바로 시민이란 소리다. 무슨 소린지 궁금해 할 독자가 있을 것이다. 해서 잠시 사족을 달면 이렇다.

소포클레스는 본시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곱지않게 바라보았던 보수파에 속했다. 그에게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시민들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를 없애는 제도였다. 이 민주주의는 아버지도 한 표, 아들도 한 표, 부자도 한 표, 빈자도 한 표를 보장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 혈통, 가문, 한마디로 빈부귀천을 모두 무시하고 모든 시민에게 똑같이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소포클레스의 입장이 반영된 작품이 실은 「오이디푸스 왕」이다.

한데 재밌다. 소포클레스는 시민들에게 너희는 너희 자신이 누군인지를 모르는 놈들, 애비를 살해한 아들들, 전통을 말살한 천박한 무리들, 해서 “너 자신을 알라(gnothi sauton)!”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지만, 시민 대중은 그 메시지를 오히려 즐기면서, 이는 소포클레스가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메시지를 전혀 다른 의미의 메시지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이었을까. 소포클레스도 별 수 없었나 보다. 자신의 작품을 공연한 장소가 실은 시민 대중이 모였던 극장(theatron)이었기에, 이곳에서 그도 인정받고 사랑받으려고 갖은 정성과 온갖 노력을 다 기우려 드라마를 짓고 공연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천박하다고 무시한 시민 대중들 앞에서 그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역사는 이렇게 시민 대중의 사랑을 받은 작품들을 전한다. 어쩌면 이게 고전일 게다. 소위 고전이란 게 별 게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대중의 사람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거기에는 뭔가가 더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지만 바닷물에 소금이 녹아들어있듯이, 시대를 뛰어넘는 뭔가가 텍스트에 녹아있어야 한다.

예컨대 「오이디푸스 왕」에 녹아있는 마치 소금같은 뭔가가, 즉 한 사람은 가족이면서 시민이며, 그런데 시민이지만 인간이라는 점, 그러하기에 누구나 너와 나를 구별할 수 없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메시지 같은 것이 말이다. 이를 시민 대중은 원래 주인 소포클레스가 의도한 바와는 전혀 반대로 해석했음에도 말이다. 이게 소포클레스에서 찾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내가 찾은 답이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안재원 서울대·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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