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3:50 (토)
근대적 주체 깊이 사유 … 良知 개념 통해 當代의 중층적 문제에 맞서
근대적 주체 깊이 사유 … 良知 개념 통해 當代의 중층적 문제에 맞서
  • 교수신문
  • 승인 2010.05.24 15: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2> 박은식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그 두 번째 인물은 백암 박은식(1859.9.30~1925.11.1)이다. 정성식 영산대 교수(철학)는 박은식에 대해 “그의 대동사상은 당시 현실에 기초한 것으로 진보적 성향의 애국계몽사상과도 모순이 없었다”고 평한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정치가였던 박은식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역사서술을 통해 근대사 확립에 초석을 마련했다. 박정심 부산대 교수(철학)는 한국 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유학사상가 중 유일하게 박은식이 포함된 점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박은식이 양명학을 통해 근대 유학문명론을 재건한 데 그 이유가 있다는 주장이다. 조한석 대진대 연구교수(철학)는 박은식의 양명학 수용을 사상적 도전이라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유학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두 철학자의 논의가 부딪히는 지점에 박은식 사상의 논쟁점이 있다. 그 본격적인 탐색을 시작한다.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白巖 박은식은 1859년 밀양에서 태어났다. 1898년 <황성신문> 주필, 1908년 서북학회 회장직을 역임했다. 1909년 「유교구신론」을 발표해 유교개혁을 주장하고, 大同敎를 창건했다. 1911년에는 만주 위안런현으로 망명해 나라 밖에서 구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신문> 사장이 됐으며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제2대 대통령이 됐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이 있다. 1925년 11월 1일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유언으로 남기고 67세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철학계를 대표할만한 인물로 선정된 이들이 대개 서양철학과 관련이 깊은 반면 유학사상가인 박은식이 포함됐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물론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겠으나, 필자는 무엇보다 박은식이 양명학을 통해 근대유학문명론을 재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글은 그는 왜 유학 특히 양명학을 문제 삼았는가, 그의 유학사상은 무엇을 해결하고자 했는가를 일차적으로 답해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지금 왜 그의 사상을 문제 삼고 있는지, 그의 사상이 근대에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이 무엇인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한국근대는 유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한 도덕문명과 유럽 근대의 기술문명이란 이질적 보편문명 간의 만남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성리학적 사유를 공고화했던 척사론을 제외하면 유학은 낡고 그래서 버려야할 이념으로 취급되기 십상이었고, 新學問인 서구문명은 그야말로 새로운 典範이 됐다. 보편문명간의 만남은 제국주의침략이란 역사적 시련과 맞물려 ‘근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를 묻게 했다. 보편문명 간의 충돌적 만남은 단순한 문화접변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기존의 왕조교체와는 달리 삶의 양식 전반에 걸친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낯선 타자와 마주선 주체는 타자란 무엇인가란 질문과 동시에 타자와 마주선 주체 또한 물어야 했다. 근대적 주체에 대한 물음은 곧 새로운 삶의 공간인 ‘근대’에서 전근대사회의 지도이념이었던 유학의 정체성을 되묻는 지점에서 시작됐다.

서구 근대의 수용과 眞我論의 함의

유학에 대한 반성적 물음은 서구적 근대문명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맞닿아 있었다. 서구적 근대는 야누스적 타자였다. 근대는 세계적 차원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세계체제로 열려있었지만 정치 경제 단위가 국경이 됨으로써 일국적 차원에서는 닫혀있었다. 또한 유럽역사를 기준으로 한다면 근대문명은 진보요 발전이었지만, 비서구지역에게 근대란 식민의 역사였다. 더욱이 유럽중심주의는 비서구지역을 야만으로 대칭시킴으로써 비서구는 결핍된 ‘타자’가 됐다. 한국은 서구 근대문명이 지닌 문명성은 수용해야 하지만, 동시에 침략적 야만성에 대해서는 저항해야하는 중층적 문제에 직면했다. 따라서 민족적 위기에 직면해 시대문제를 명확히 인식하고 헤쳐나갈 근대적 주체가 요청되는 시대였다. 그런데 서구 근대문명론에 입각한다면 한국인은 중화문화의 담지자가 아니라 결핍된 타자가 됐다. 그렇다면 ‘근대’를 한국적 시각에서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한 물음이 중요한 철학적 주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박은식은 유학사상에 대한 반성적 물음을 철학적 출발점으로 삼았다. 박은식은 스스로 유학자라고 자임했으나 성리학만이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당시 유림들이 성리학적 사유에 함몰돼 시대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고자 했다. 그는 도덕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하면서 근대사회에 맞지 않은 전근대적 요소는 단호히 해체하되, 도덕적 자각과 실천 그리고 사사로움에 매몰되지 않는 공덕 등 유학의 긍정적 측면을 근대사회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유학을 재정립하고자 했다.「유교구신론」은 그의 유학적 사유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박은식은 유학뿐만 아니라 서구적 ‘근대’ 또한 한국 근대사회를 건설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봤다. 1900년대 들어 한국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을 이론적 근거로 자강운동을 전개했다. 박은식 또한 당대를 국가 간 경쟁시대라고 파악하고, 自强한 근대국가를 건설해 適者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문명화는 민족을 위한 수단일 뿐, 문명화 자체가 일차적 목표가 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사회진화론을 문명화의 논리로 수용했던 당시 지식인들이 우리보다 앞서 문명화에 성공한 일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로 친일을 합리화했던 것과는 차별되는 점이다.

그렇다면 낯선 타자에 맞서 격변기의 역사를 헤쳐나갈 근대적 주체는 어떠해야 하는가. 박은식은 양명학의 良知 개념을 근간으로 근대 한국이 직면한 중층적인 문제들에 답했다. 박은식은 양지를 구현하는 眞我를 근대주체로 상정했다. 진아란 私心· 私欲· 私意와 같은 사적인 자아의식에 가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私欲과 物欲이 없는 참된 인간 주체다. 진아는 도덕적 자율성을 本有하고 있기 때문에 외재적인 타율이나 형식을 행위의 준거로 삼지 않고, 주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명석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지에 비춰 보면 유학이념이 평등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할 수도 있으며, 근대문명을 수용하되 민족적 주체성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도 가능하고 경쟁의 공정성도 물을 수 있다.   

 
진아가 유학적 도덕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의 이성적 개인과는 다른 근대주체다. 진아는 타인·사회·국가 더 나아가서는 세계전체와 관계맺음을 하는 존재이지 결코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삶은 곧 국가적, 민족적 삶이요 세계적 지평에 선 삶이다. 그는 진아가 근대한국사회의 주체가 될 때 한국은 일본제국주의의 부당한 침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세계 평화를 이뤄나갈 세계적 구심점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개인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세계로 차원을 확대해 人道와 平和를 실현해나가는 것이 바로 유학의 방법적 차별애다. 그래서 박은식은 한국민족의 당면 과제를 강권의 제국주의를 이겨내고 평등주의를 실현하는 주체가 되는 것으로 설정했다. 주체가 해체돼 버리고 나면 人道와 平和를 실현할 수 있는 구심점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침략 한 가운데서 제국주의 침략을 넘어서서 세계평화를 지향하면서도, 민족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박은식 사상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최근 학계는 유럽중심주의 및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문명의 문명다움을 되묻고 있다.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문명다움’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서구적 근대성만이 유일한 보편이념일 수 없다는 것은 동의하고 있다. ‘문명의 문명다움’은 인종적 편견이나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해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또 다른 중심을 재건하는 작업이 돼도 안 될 것이다. 또 삶을 주도하고 있는 과학기술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德性知를 통한 성찰의 현재성

과학기술은 유럽의 ‘문명적 진보’를 확보해주는 주요한 수단이었으나, 군국주의 팽창의 도구기도 했다. 박은식은 객관적 과학지식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지만 동시에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이 돼야 한다는 점에서, 見聞知에 대한 덕성지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은식이 과학기술적 문명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측면을 양명학의 양지와 덕성지를 통해 통찰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적 근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선행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아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시비판단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인간주체다. 박은식은 진아론을 통해 유학이 평화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진아론은 단순히 유학문명의 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학이 늘 시대와 함께 호흡하면서 시대적 문제를 고민하는 시대정신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力說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유학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박정심 부산대·철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박은식 格物致知說의 근대적 함의」, 저서로는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2-13卷』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