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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술 통해 시대적 과제 실천 … 양명학 수용은 성과이자 한계
역사서술 통해 시대적 과제 실천 … 양명학 수용은 성과이자 한계
  • 조한석 대진대·철학
  • 승인 2010.05.2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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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사상의 역사적 의의

세간에 회자된 바와 같이 올해는 한일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10년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일제의 한반도 병합과 강점이 공식적이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이 시기와 관련된 사건의 진위와 역사적 평가 문제와 아울러 당시 지식인들에 대한 재평가 역시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지금까지 이웃나라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관계는 이런 저런 문제들이 산재해있었다.

 

특히 일제 36년의 문제는 그 시기를 살았던 당대 지식인들에게는 결코 피해갈 수 없는 현안이었을 것이다. 한일병합이 강행된 1910년 51세였던 박은식은 당시 <황성신문>의 주필을 담당하던 언론인이었다. 또한 1911년 이후에는 중국으로 행동 거점을 옮겨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임시정부 초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문인이었던 그의 독립운동 방식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필력에 기반 해 역사와 이념의 문제를 중심으로 독립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그의 주된 저술은 역사와 유학이 중심을 이룬다. 박은식은 중국 망명 이후 우선 역사문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는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이념 문제와 직결됨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통사』(1915)에서 근대 개항 무렵부터 한일병합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정리하고 일제의 반문명적 강제 병합을 비판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에서는 국권 상실 이후 3·1 운동 무렵까지의 독립운동사를 정리하면서 강탈당한 국토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혼’을 자각하고 보존할 것을 피력했다. 펜의 힘은 칼보다 강하다. 조국의 독립을 향한 그의 열변은 어줍지 않은 폭력시위보다 더 강한 어조로 당시 지식인과 독립지사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에 도화선이 됐다.

한편 ‘독립’에는 ‘독립 이후 새로운 사회 구성’이라는 아주 자명한 문제가 수반된다. 이는 곧 독립 이후 한반도 사회를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란 문제다. 물론 이미 망한 이씨 왕조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500여 년 동안 전제왕권에 길들여진 국가 의식과 사회 구석구석에 드리워진 조선 사회의 여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그의 고민은 여기까지 미치고 있다.

역사, 이념 문제와 직결됨을 간파


또한 여전히 한반도 지식인들의 주류인 성리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그는 「유교구신론」에서 조선식 유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혁신된 유교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유교를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해서 다시 국가 통치의 소프트웨어로 활용하자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는 전제군주제의 비합리성을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씨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주자성리학에 대해 관념성과 비실효성을 이유로 폐기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주자성리학’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양명학을 제시하면서 주자학에 비해 簡易直截한 방법론이 그가 구상했던 국력단합의 이념 곧 유교의 전파에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는 양명학의 ‘만물일체론’을 ‘민족적 일체화’로 연결해 저항의 주체를 확립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양명학의 수용을 주장한 그의 견해는 주자학적 기준에서 본다면 이단의 학문인 양명학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벽이단 이라는 도그마를 넘어선 일종의 사상적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그의 사상적 특징이면서 동시에 역사의식의 한계를 노정하는 부분이다.

대표적 저서인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역사적 사실 전개 과정을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근대적 역사서술 방식을 도입하는 진보성을 보이기는 했지만 ‘유학’이라는 한계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는 한일병합의 원인 분석에 대한 박은식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박은식은 한일병합의 역사적 원인을 분석함에 있어서 외세에 그 책임을 전가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히 내부적 책임에 대한 반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 왕정의 실정과 그 사회의 중심 이념이었던 유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은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유학에 매몰, 역사적 반성 놓쳐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그의 ‘주자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그의 사고가 유학의 외부를 지향했다는 것을 의미 하는가’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학의 도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학’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한계다. 자본과 인권을 향해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그렇게도 유학이 중요했을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눈을 외부로 돌려서 철저한 자기반성을 해야 했었던 것은 아닌지 일제의 만행을 지탄하기 전에 힘없이 거꾸러진 조선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그리고 패배와 근대화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 철저한 자기반성을 해야 했다. 이런 반성이 선행돼야 독립 이후 한반도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도 좀 더 미래 지향적으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 변화에 보조를 맞추지 못해서 자멸했다는 외면하고 싶은 진실 앞에서 좀 더 냉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박은식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었다. 그는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는 과정을 바라봤던 사람이었고 때문에 독립과 일제에 대한 비판은 그의 숙명적 과제였다. 박은식에게 비록 구한말 지식인으로서 시대적 한계는 있었지만 역사서 저술을 통해 민족적 일체감 형성과 독립의 정당성을 피력한 부분은 시대적 요구에 대응했던 지식인자 독립운동가로서의 책임의식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한석 대진대·철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청학집』소재 선맥의 이중성과 그 의미」, 「안정복의 삶과 생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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