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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타인을 혐오하고 분노하는가
우리는 왜 타인을 혐오하고 분노하는가
  • 김재호
  • 승인 2023.10.11 0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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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에디스코 | 288쪽) 쓴 한상원 충북대 교수

위기의 상황에서 공포의 원인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타자에게 분노의 에너지를 쏟아 부음으로써 
주체는 자신에게 공포를 주는 대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안도감을 찾으려고 한다.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의 핵심은 ‘자기보존을 위해 자기지배가 만연하며, 결국 자기희생에 매몰되는 것’으로 읽힌다. 그 메커니즘은 계몽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동일화 논리(타자혐오)다. 계몽·계몽의 동일성 원리·계몽의 권력화 등의 배경에는 홉스식의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과연 공포(두려움)의 기원은 무엇일까? 

“오늘날 공포의 양상은 두 가지 흐름의 혼합이다. 첫째, 사회의 해체와 개인 사이의 능력주의적 무한경쟁으로 인한 만성적인 위기감·불안감이다. 둘째, 팬데믹·기후위기 등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체적 공포이다. 그 사례는 전 지구적으로 나타난 팬데믹 시기의 코로나 인종주의였다. 곧 신자유주의로 인한 고립과 단절, 경쟁으로 인한 공포와 팬데믹·기후위기 등에 의한 생명에 대한 공포는 서로 연결돼 우리 시대의 만성적인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다.”

서울시립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 개념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후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아도르노의 정치철 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앙겔루스 노 부스의 시선: 아우구스티누스, 맑스, 벤야민. 역사 철학과 세속화에 관한 성찰』이 있다. 옮긴 책으로 『공동체의 이론들』(공역), 『아도르노, 사유의 모 티브들』, 『역사와 자유의식: 헤겔과 맑스의 자 유의 변증법』 등이 있다. 사진=한상원

 

무한경쟁과 환경파괴라는 이중의 공포

위 답변에서 주목할 단어는 ‘혐오’다. “위기의 상황에서 공포의 원인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타자에게 분노의 에너지를 쏟아 부음으로써 주체는 자신에게 공포를 주는 대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안도감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는 이러한 타자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에너지를 선동하는 지도자와의 일체감 속에서, 사회적으로 상실된 연대감을 왜곡된 방식으로 되찾고자 한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지배가 실행되는 방식이다.” 독일의 나치즘이나 요즈음 무서울 정도로 성장하는 극우주의가 그러한 예이다. 

‘자기희생’이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구조는 현대인의 불안과 우울과도 겹친다. 반면, 자기보존을 위한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이 중용을 지킨다면, 어떤 측면에서는 필요하거나 좋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처럼 말이다. 

“현대인의 자기부정은 (생존이라는 좁은 의미로 한정된) 자기보존을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타자를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출현한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강제된 자기부정, 곧 자기소외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보존의 실패를 나타내는 논리가 바로 능력주의다. ‘능력’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노력’에 의한 보상이 정당하다는 논리는 현실에서는 경쟁으로 인한 불평등을 ‘공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로 둔갑한다. 그러한 논리 속에서는 개인의 자기실현과 같은 이상은 허황된 꿈일지도 모른다.”

『계몽의 변증법』은 ‘총체적인 자본권력’에 대한 저항을 겨냥한다. 특히 문화산업론의 측면에서 ‘자본의 무의식적 가치축적’을 지적한다. 하지만 기자의 관점에서 볼때 너무 ‘신자유주의 비판’에만 매몰된것 같다. 자본은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옷을 입고 더욱 진화하는데, 인문학은 여전히 고전에만 파묻힌 게 아니냐는 푸념이다. 

“사람의 수고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기술 발전에 의해 일자리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우려스럽기도 하다. 또한 지나치게 빠른 기술 변화로 인해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계층이 생겨나는 현실 역시 걱정이다. 반면에 새로운 IT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슈퍼리치의 출현과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빈부격차의 출현을 낳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어떻게 새로운 기술에 대한, 나아가 디지털로 무장한 자본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가 가능할까? 신자유주의화된 시대에 새로운 기술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불평등에 대한 현실적인 고발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비판 위한 비판 넘는 규정적 부정성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작업은 종종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는다. 비판이론이라는 이름도 내포하듯이, 비판적 사유의 끝에는 결국 부정성만 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민주주의 자체를 민주화하기 위한 비판이론, 곧 급진민주주의적 비판 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판이론에서의 비판은 허무주의적인 추상적 부정성을 겨냥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규정적 부정성, 곧 부정을 통한 긍정성의 산출에 주목한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내재적 비판, 즉 주어진 시대와 사회가 제시하는 그 규범적 이상이 지닌 이중성과 자기모순을 고발하면서 현재의 사회가 약속한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 변혁돼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는 비판적 방법이다.”

앞으로 한 교수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관심을 두고, 여러 근현대 철학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의 개념들(자유, 평등, 주권 등)의 개념적 재구성이라는 문제 역시 던져야 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계몽, 계몽의 동일성 원리, 계몽의 권력화 등이 나타나는 핵심에는 언급하셨다시피 홉스식의 '공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과연 공포(두려움)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공포는 특정 독재자로부터 발생한 것일 수도 있는데, 군중 혹은 제도권력이 함께 만들어낸 것처럼 비치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책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오늘날의 현주소를 분석할 때 제가 주목한 측면은 말씀해주신 바와 같이 공포의 정념이 갖는 파괴력입니다. 오늘날 공포의 양상은 두 가지 흐름들의 혼합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이후 초래된 ‘사회적’ 자연상태, 곧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유사 자연상태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사회의 해체와 개인들 사이의 능력주의적 무한경쟁으로 인한 만성적인 위기감과 불안감을 말합니다. 이것을 유사 자연상태라고 보는 이유는, 홉스의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개인들이 끝없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을 보호해줄 절대권력에 대한 욕구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원인을 갖는 자연상태, 곧 철학적으로는 ‘제 2의 자연’이라고 불릴만한 것의 위기와 관련되는 자연상태입니다. 

반면 우리 시대에는 제1의 자연, 곧 진정한 자연 앞에서의 두려움 역시 등장합니다. 이 둘째 공포는 팬데믹, 기후위기 등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체적 공포입니다. 만성화되는 재난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생명의 취약성에 대한 인식은 생명정치적 연대와 민주적인 집합적 역량을 통해 이러한 취약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를 요청하지만, 현실에서는 공포를 타자에게 전가하는 혐오의 확산이 출현한 바 있습니다. 그 사례는 전 지구적으로 나타난 팬데믹 시기의 코로나 인종주의였습니다. 이 두 가지 공포, 곧 신자유주의로 인한 고립과 단절, 경쟁으로 인한 공포와 팬데믹, 기후위기 등으로 인한 생명에 대한 공포는 서로 연결되어 우리 시대의 만성적인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서 혐오의 메커니즘을 언급하셨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와 더불어, 이 책이 혐오의 작동원리를 드러내는 것과 함께 2023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오늘날의 혐오는 방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 공포의 정념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떠한 커다란 공포에 입각한 개인들은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이 공포를 극복할 연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 때문에 고립된 개인이 그러한 공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과 다른 타자, 그것도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약자들에게 공포를 전가하는 것입니다. 이를 투사(projection)의 메커니즘으로 부릅니다. 자기보존을 최고의 원리로 삼는 근대적 주체는 이러한 자기보존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타자의 자기보존을 부정하는 방식을 택하곤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례를 수없이 찾을 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직접 경험했던 독일의 나치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공포의 원인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타자에게 분노의 에너지를 쏟아부음으로써 주체는 자신에게 공포를 주는 대상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안도감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는 이러한 타자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에너지를 선동하는 지도자와의 일체감 속에서, 사회적으로 상실된 연대감을 왜곡된 방식으로 되찾고자 합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지배가 실행되는 방식입니다.

공포와 혐오, 그리고 권위주의적 지도자라는 이 전체주의적 지배의 원리를 분석한 것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계몽의 변증법』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인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분석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 정치와 타자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는 새로운 극우주의의 대두를 분석하는 데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비판적인 사유의 중요성을 계몽의 합리성이 전도된 것으로부터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래서 비판적인 사유가 추구해야 할 것은 긍정적인 청사진을 수립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허위인지를 계속해서 반박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거에요. 그게 유대교 정신이라는 겁니다... 피억압 계급의 투쟁을 통해서 해방을 달성한다는 목표가 어느 순간 스탈린과 볼셰비키 정권의 일당 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듯이, 그리고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인간을 지배로부터,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고 했던 계몽의 합리성이 지배로 전도되었듯이 말입니다."(44쪽) 그런데 굳이 철학의 과제를 설정하지 않더라도, 실천(윤리)의 측면에서 고민이 많이 듭니다. 비판에만 초점을 맞추면, 소피스트와 같이 비판(반박)을 위한 비판(반박)이 되지 않을까요? 가치가 없는 분석적, 설명적 기술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본래의 비판성을 찾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기의 시대는 비판을 요청합니다. 위기와 비판을 뜻하는 영어단어 crisis와 critique, 독일어로 Krise와 Kritik은 은 모두 ‘선택하다, 나누다, 결정하다’는 의미의 고대 희랍어 단어 κρίνειν(krinein)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에 비추어보자면 위기는 어떠한 시대를 가르는 분기점인 것입니다. 그러한 분기점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 그러니까 위기가 파국과 재앙으로 귀결될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위기의 극복 이후 새로운 변화로 이어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비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위기와 비판은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의식이 바로 호르크하이머가 명명한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의 출발점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과 같이 비판을 위한 비판, 곧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실체화된 부정성’은 그러한 진정한 비판정신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도르노 역시 그의 『부정변증법』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비판이론에서의 비판은 그러한 허무주의적인 추상적 부정성을 겨냥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규정적 부정성(bestimmte Negation), 곧 부정을 통한 긍정성의 산출에 주목합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내재적 비판, 즉 주어진 시대와 사회가 제시하는 그 규범적 이상이 지닌 이중성과 자기모순을 고발하면서 현재의 사회가 약속한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 변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는 비판적 방법입니다. 저는 참된 비판은 언제나 내재적 비판으로 가능하다는 아도르노의 생각이 옳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날 구체적으로 이러한 내재적 비판의 이념이 적용되어야 할 하나의 지점은 민주주의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가 마주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자체를 민주화하기 위한 비판이론, 곧 급진민주주의적 비판 이론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아도르노가 강조하는 내재적 부정성이라는 변증법 철학의 요소가 급진민주주의 정치철학의 흐름과 결합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최근 저의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자기희생'이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구조가 현대인의 불안과 우울과도 겹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애초의 나의 삶의 의미, 나의 생동하는 삶, 나의 욕구와 욕망이라는 것이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삶에 내던져진 인류가 자신만의 욕구를 가질 수는 있는 것일까요? 공동체와 분리된 순수한 욕망이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울러, 자기보존을 위한 자기희생과 자기부정이 중용을 지킨다면, 어떤 측면에서는 필요하거나 좋을 수도 있지 않나요? 마치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외적 자연에 대한 지배를 위해 인간은 내적 자연을 부정하지만, 이러한 내적 자연에 대한 부정은 곧 애초의 목적이었던 외적 자연 지배를 통해 얻고자 했던 나의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부정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의 삶을 보세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나의 생동하는 삶이 희생되는 것이죠. 자아의 발생이란 이처럼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를 말합니다. 자기보존을 위해 자신을 지배하는 논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71쪽)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에게는 절제와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 학파가 강조했던 맥락에서 진정한 행복을 위한 중용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맥락이 조금 다르지만 저는 오늘날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탈성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탈성장을 위해서는 개인, 특히 기득권층의 무절제하고 탐욕적인 이윤추구를 위한 과잉생산과 과도한 에너지 소비를 공동선을 위해 규제할 수 있는 민주적인 정치적 역량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자기절제를 ‘자기부정’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자기역량으로서의 자기절제는 스피노자적인 의미의 코나투스(conatus)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주소는 이와 다릅니다. 현대인들의 자기부정은 (생존이라는 좁은 의미로 한정된) 자기보존을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타자를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출현합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강제된 자기부정, 곧 자기소외입니다. 

이러한 자기보존의 실패가 나타나는 논리가 바로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노력’에 의한 보상이 정당하다는 논리는 현실에서는 경쟁으로 인한 불평등을 ‘공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로 둔갑합니다. 그러한 논리 속에서는 개인의 자기실현과 같은 이상은 허황된 꿈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노오력’을 거듭하고 타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힙니다.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고, 오직 나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위로 올라가서 자기보존을 쟁취해야 한다는 이 냉혹한 논리는 결국 자기보존의 추구가 자기부정으로 귀결되는 오늘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계몽의 변증법>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총체적인 자본권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책을 집필한 것으로 읽힙니다. 특히 문화산업론의 측면에서 "자본의 무의식적 가치축적"을 지적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인문학의 역할로서 철학이 너무 '신자유주의 비판'에만 매몰된 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학술토론회 등을 가면, 여전히 '인문학=신자유주의 비판'으로 등치되는 인상을 받습니다. 제도적 개선과 정책 도입의 실천은 부족해 보입니다. 아울러, 자본은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옷을 입고 더욱 진화하는 듯합니다. 이에 대응하는 측면에서,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참고 기사: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08807

자본은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옷을 입고 더욱 진화한다는 표현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인문학이 인공지능 시대에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주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한 가지 여담을 말씀드리면, 이번 저의 책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는 필로버스에서 진행된 『계몽의 변증법』 강독 세미나 강좌의 녹취를 토대로 이뤄졌는데, 그 녹취 업무의 상당부분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줌(zoom) 사이트의 녹화기능을 통해 강의를 녹화한 뒤, 네이버의 ai 서비스 클로바(Clova)를 이용해 녹화된 파일의 녹취록을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기술로는 녹취록을 그대로 책으로 출간할만큼 ai가 뛰어나지는 않아서, 저는 녹취록을 토대로 거의 책을 새로 작성하다시피 했지요. 그러나 이전에 비해 사람이 직접 해야 할 수고가 훨씬 줄어들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민의 지점이 생깁니다. 사람의 수고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기술 발전에 의해 일자리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또 지나치게 빠른 기술 변화로 인해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계층이 생겨나는 현실 역시 우려스럽습니다. 택시도 앱으로 호출하고 KTX 열차도 앱으로 예매하는 상황에서 노년층은 밤늦은 시간 택시를 잡지도 못하고 사람이 붐비는 휴일에 기차를 예매하지 못하는데다, 키오스크 주문, 로봇 서빙 등에도 적응하지 못해 잡에만 갇혀 지내야 한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새로운 IT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슈퍼리치의 출현과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빈부격차의 출현을 낳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의 부유층과 자본은 단지 고용된 노동인구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아니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로운 기술에 대한, 나아가 디지털로 무장한 자본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가 가능할까요? 저는 인문학이 그러한 비판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신자유주의화된 시대에 새로운 기술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불평등에 대한 현실적인 고발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내용은 전체 맥락상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대중을 자칫 과소평가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일부 대중들은 수동적으로 문화산업을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많은 이들이 적어도 세이렌의 노래를 물리친 오디세이아처럼, 각자의 이성과 객관화를 어느 정도는 함유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아울러, 책에서도 언급하셨지만 <기생충> 등 좋은 대중예술도 공감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욕망을 부추기지만 그것의 해소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대중들은 이 사회가 그들의 욕구를 실현시키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욕구에 대한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즉 내면화하게 되고, 그러한 욕구의 실현을 지연시키는 사회에 더 이상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는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대중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문화산업은 이러한 방식으로도 지배에 기여합니다."(149쪽)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대중’이라는 표현이 대중을 과소평가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 이론가들(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프롬 등)이 언제나 직면했던 질문이기도 하지요. 실제로 이 문구를 ‘대중은 길들여질 뿐 주체적인 역량을 가질 수 없다’는 식의 반민주적 편견으로 이어간다면 우려하시는 해석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도르노를 비롯해 1세대 비판이론가들은 전체주의적 지배의 실상을 경험한 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위주의적인 주체화 과정이 어떻게 출현하는지를 분석하는 데 그들의 거의 대부분의 이론적 관심을 집중해왔습니다. 이로 인해 아도르노를 비롯한 이들 1세대 비판이론가들에게서 대안적인 정치적 주체화 과정이 어떻게 출현할지에 관한 이론이 거의 공백으로 남아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유일한 예외는 주변화된 집단들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체하는 새로운 주체로 규정한 마르쿠제 정도입니다). 제 박사논문 역시 그러한 공백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다만 제가 이들 초기 비판이론가들을 옹호해보자면, 그러한 권위주의적 주체화에 대한 분석이 없이는, 그러니까 대중이 자발적인 복종을 바라게 되는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그와의 이론적 대결 없이는, 대안적인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이론화 역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 주체화는 민주주의 정치의 필수적 조건입니다. 저는 민주주의를 제도적 절차의 논리로 환원하는 시도에 반대하며, 민주주의를 그 주체들의 역량 속에 이해하는 관점을 채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 민주주의적 관점 역시, 어째서 지금의 민주주의가 사회적 위기 앞에서 혐오와 권위주의화라는 방향을 택하는지에 대한 분석 없이 갑자기 ‘새로운 주체’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관점일 것입니다. 저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주체화의 위기라고 규정하고 싶고, 그러한 주체화의 위기에 대한 인식을 위해서 초기 비판이론의 이론가들이 분석했던 권위주의적 주체화라는 범주가 갖는 현재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가 창립 100주년을 맞았네요. 프랑크푸르트 학파(비판이론)는 현재 어떤 계보(하버마스 등)로 이어지고 있나요? 아울러, 어떤 연구가 이뤄지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가 창립 100주년을 맞아서 국내외로 여러 행사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저는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열린 사회연구소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여하고 발표도 진행하고 왔는데, 그 참관기를 <한겨레>에 기고한 바 있습니다. 기사 읽기 => 「‘오징어게임’의 역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묻다」 (그리고 이번 대회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 4세대가 중심이 되어 치러졌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프롬, 뢰벤탈, 노이만, 키르히하이머, 그로스만 등 쟁쟁한 독일어권 유태계 맑스주의자들로 이루어진 1세대가 있었죠. 여기에는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고 정식 연구소 멤버는 아니었지만 연구소의 지원을 받은 발터 벤야민과 알프레트 존-레텔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2세대를 이끌었던 것이 20세기 철학과 사회학의 최고 거장 위르겐 하버마스였고, 하버마스에 이어 악셀 호네트가 최근까지 3세대를 이끌었습니다. 현재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4세대는 주로 이 호네트의 제자들이기도 한 라헬 예기, 라이너 포르스트, 마틴 자르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호네트에 이어 새롭게 2021년 연구소장으로 취임한 사회학자 슈테판 레쎄니히도 이들과 비슷한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4세대의 특징은 이론적 다양성과 개방성입니다. 독일 비판이론의 전통인 헤겔주의적 배경으로 소외, 자본주의 비판 등의 전통적 비판이론 주제를 첨예화하는 예기, 하버마스를 계승해 정의론의 담론분석을 전개하는 포르스트는 큰 틀에서 전통적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이론의 흐름을 이어간다면, 마틴 자르는 니체와 스피노자 전문가이면서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권력이론을 연구하는 비판이론가입니다. 4세대 비판이론은 이 밖에도 영미권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신유물론 등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국내에서는 10월 14일 서울대에서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창립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국내 비판이론 연구자들이 총결집하는 행사인 만큼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네요.

△이 책과 관련하여, 대학/교수사회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아도르노의 이론을 토대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칸트, 헤겔, 맑스로 이어지는 고전적인 독일어권 비판이론을 주된 참조점으로 삼고 공부했지만, 최근 민주주의의 위기를 분석하는 가운데 저의 관심사는 많은 부분 프랑스의 급진민주주의 이론들이나 영미권의 정치이론들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의 복합적 위기를 분석하고 대안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여러 철학 전통들의 복합적인 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또 철학계 내부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정치학 전공자 선생님들과 진행한 공동연구 과제들이 저에게 여러 자극과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초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 정신은 ‘상호학문적 연구’라는 방법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비판이론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 헤겔의 변증법 철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대중문화 분석 등의 밀접한 상호교차 속에서 전개되어야만 ‘비판적 사회이론’으로서 ‘사회적 총체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오늘날 그러한 학문적 상호교차들이 어떻게 가능할지 고민이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횡단적 인문학의 흐름 속에서 제가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도 고민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를 조명하고 변화를 도출하기 위한 상호학문적 연구과제들이 더 많이 필요할텐데, 철학이 맡아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또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 등에 관해서 함께 고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후 어떤 저술이나 연구를 하실 계획이신가요?

일단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한 관심을 중점으로 하면서 여러 근현대 철학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논문들을 제출하는 데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의 개념들(자유, 평등, 주권 등)의 개념적 재구성이라는 문제 역시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민주주의의 위기와 급진화를 주제로 한 연구성과들을 중심으로 단행본들을 내려고 합니다. 또 아도르노의 강의록이나 저작들에 대한 번역도 계속 해나갈 생각입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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