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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철학’ 코앞인데 학문후속세대가 없다
‘K-철학’ 코앞인데 학문후속세대가 없다
  • 김재호
  • 승인 2022.12.26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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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정년퇴임 맞은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젊은 교수들의 연구역량은 성장했는데, 그 역량을 이어나갈 학문후속세대가 줄고 있다. 
교수는 연구·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열의가 있는 학생을 학자로 키워내는 역할도 해야 한다.

“젊은 교수들의 연구역량은 성장했는데, 그 역량을 이어나갈 학문후속세대가 줄고 있다.” 최근 서울시립대 철학과에서 25년간 재직 후 정년퇴임을 맞은 이성백 교수(65세·사진). 처음 부임했던 1996년과 현재 교수사회는 어떤 점에서 많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답변이었다. 지난 20일 이 교수를 만난 자리였다. 

 

이성백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회철학의 대부인 고 차인석 서울대 명예교수를 사사했다.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 「동일성의 긍정성과 부정성―데리다, 아도르노, 헤겔, 맑스의 동일성개념 비교」, 「헤겔 철학에서의 이성 개념」 등이 있다. 집필하고 옮긴 책으로는 『문화와 철학』, 『동서양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철학교과서』 등이 있다.

교수사회의 변화에 대해 이 교수는 학문적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점을 먼저 꼽았다. 인문사회학계의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교수들이 늘어났다. ‘K-철학’이 전 세계에서 조명을 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 이 교수는 “단지 강의 위주에 머물렀던 대학사회가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학으로 발돋움했다”라며 “대학사회가 명실상부한 학문 연구의 아카데미로 성장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문계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인문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지만 경제적 여건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교수는 “학문후속세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실질적인 방안이 강구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 실질적인 방안은 뭘까.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지원 사업을 적극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실제로 이 교수는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의 헤겔 비판과 반비판’(2003)이나 ‘글로벌폴리스의 인문적 비전’(2007∼2017) 등 사업으로 학문후속세대인 대학원생이나 박사급 연구원을 지원했다. 그는 “교수는 연구·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열의가 있는 학생을 학자로 키워내는 역할도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실적만 쌓는 게 아니라 학문후속세대가 학문의 토양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학문적 지도에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탈성장으로 존속하는 생태주의적 대안 경제

또 다른 교수사회의 변화는 바로 “진보적 학계가 그 위상을 점점 잃어왔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진보적 교수들은 큰 역할을 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진보적 사회운동과 학술단체들이 결성됐다. 하지만 현재는 몇몇 단체들만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 “이런 변화가 사회의 진보적 전망이 불투명해진 시대적 흐름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거스르기 힘든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사회진보운동은 과거 세대에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대 전환의 과정 속에서 그 소임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제부터 새로 다가오고 있는 세대적 전환을 앞서 전망하면서 진보의 새로운 전망을 준비하는 것이 현재 남아 있는 진보적 지식인이 해야 할 역할이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전망이란 제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정보기술과 디지털 대전환 등을 포함한다. 이 교수는 전국교수노조 정책기획실장, 진보평론 편집위원장,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연구·교육·실천에 매진해왔다. 

정년퇴임을 맞아 『코뮨의 미래: 현대 사회와 비판적 사회철학의 전망』(도서출판 b)이 출간됐다. 책에는 이 교수와 함께한 제자나 후배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박영균 건국대 대학원 교수(통일인문학과), 한상원 충북대 교수(철학과), 정병기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 윤수종 전남대 교수(사회학과), 서영표 제주대 교수(사회학과) 등이 있다. 

『코뮨의 미래』 서문에는 “지금 인류는 기후 위기, 코로나 팬데믹 위기, 식량 위기 등을 겪으며 거대한 자연 앞에서의 무기력을 드러내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코뮤니즘은 환경 위기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 교수는 “맑스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노동을 넘어 환경, 여성, 소수자와 기타 사회적 배제자들을 위한 해방사상으로 확장됐다”라고 답했다. “환경운동가들에게는 성장을 멈출수 없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틀내에서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성장을 멈추고 탈성장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장 없이도 존속할 수 있는 생태주의적인 대안 경제가 필요한 것이다.”

2002년에 쓴 「맑스주의와 생태론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이미 “ 지배관계의 철폐를 추구하는 해방의 사상인 이상 맑스주의는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와 착취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라며 “인간과 자연의 통일에 대한 언급들에 대한 엄밀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생태중심주의가 아니라 맑스의 인간중심주의를 확인하게 된다”라고 밝혔다. 생태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생태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코뮤니즘,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

『코뮨의 미래』에서 이 교수는 「중세 코뮨: 코뮤니즘의 역사적 기원」을 썼다. 이 논문은 유럽 중세 도시를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중세 도시에 대한 관심은 코뮌이라 불리웠던 중세 도시가 코뮤니즘의 역사적 기원이 아닌가하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칼 맑스가 코뮤니즘의 사회정치적 원리로 제시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중세 도시에서 최초로 구체화 됐다. 이러한 분석은 그동안 제기된 바 없는 신선한 내용이다. “중세 도시가 인간의 존재방식과 자유의 이념, 시민사회와 국가, 민주주의 등 서구 사회철학의 기본 이념들을 다시 고찰하게 만든다. 12세기에 출현한 중세 도시는 단지 코뮤니즘의 기원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기원이다.”

12세기에 이르러 지배적인 경제적 생산력에 있어서 농업으로부터 상업으로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이 상업혁명이 18세기의 산업혁명보다 앞선 1차 산업혁명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더 의의가 크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존재방식의 변화이다. 중세 도시 속에서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서구 현대의 최고 가치인 자유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바로 중세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극단적 개인화로 인한 단절이 문제다. 현대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부정적인 개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에 대해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개인주의 혹은 개인으로서 인간의 책임을 넘어 사회적 환경을 지적했다. 그는 ‘레미제라블의 역설’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발장이 빵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배고픔, 극도의 가난이 그를 빵을 훔치게 한 것이다. 개인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팽배하게 한 사회적 환경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산업자본주의 초기 단계의 구조적 문제인 대중의 경제적 빈곤화가 근본적인 사회적 원인이었다.”

 

 

디지털 기술혁명에 대한 사회철학 분석

퇴임 이후의 계획은 뭘까. 바로 책을 쓰는 일이다. 주제는 21세기 현대사회의 새로운 사회이론부터 서구 근현대의 주요 철학자들의 사상을 21세기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 등 다양하다. 특히 디지털 기술혁명은 인간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오기에 사회철학적 분석이 요청된다. 아울러, 『코뮨의 미래』에 게재되었던 중세 도시에 대한 사회철학적 해석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이 교수는 “중세 도시에 대한 연구는 개인의 존재론적 전환에서부터 현대 이전 사회로부터 현대사회로의 역사적 대전환의 철학적 의미를 규명하면서, 현대사회의 근원적 성격을 더 분명하게 밝혀내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한국 대학사회에서 25년 동안 교수로 지내면서 많은 변화를 보았을 것이다. 처음 부임했던 1996년과 현재 교수사회는 어떤 것들이 가장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는가.
  
교수사회의 변화의 첫 번째로 꼽고 싶은 것은 학문적 수준이 상당히 상승해 왔다는 점입니다. 젊은 후배교수들을 보면 우리 때에 비해서 연구 역량과 열정이 철학 연구자로서의 더 우수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문사회학계의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교수들이 늘어나 왔습니다. 단지 강의 위주에 머물렀던 대학사회가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학으로 발돋움하였고, 대학사회가 명실상부한 학문 연구의 아카데미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학 인문사회학계의 문제는 다른 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학문후속세대 양성의 문제입니다. 교수들의 연구역량은 성장하였는데, 이를 이어나갈 학문후속세대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취업의 문이 사회적으로 작아지는 것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을 것인데, 대학생들이 취업이 더 잘 되는 분야로 몰리면서, 인문계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대학 전반에 걸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지만, 경제적 문제 때문에 포기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학문후속세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실질적인 방안이 강구될 필요가 있습니다.  

교수사회의 변화에서 언급 안 할 수 없는 유감스러운 문제는 진보적 학계가 점점 더 그 위상을 잃어왔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진보적 교수들이 큰 역할을 하였고, 87년도 이후에 진보적 사회운동과 학술단체들이 결성되었습니다. 여러 사회운동 교수단체들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 위상은 예전만 못합니다. 인문사회학계의 각 분야에서 진보적 학술단체들이 결성되었는데, 이 학술단체들의 경우는 그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적지 않은 단체들이 실질적인 해체 상황에 처해 있고, 몇몇 단체들만이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변화가 사회의 진보적 전망이 불투명해진 시대적 흐름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거스르기 힘든 일입니다. 좀 막연한 얘기지만, 한국사회는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의 세대적 전환의 과정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까지의 사회진보운동은 과거 세대에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대의 전환의 과정 속에서 그 소임을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부터 새로 다가오고 있는 세대적 전환을 앞서 전망하면서 진보의 새로운 전망을 준비하는 것이 현재 남아 있는 진보적 지식인이 해야 할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코뮨의 미래』 서문에는 “지금 인류는 기후 위기, 코로나 팬데믹 위기, 식량 위기 등을 겪으며 거대한 자연 앞에서의 무기력을 드러내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코뮤니즘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맑스주의 내지 코뮤니즘은 근본적으로 노동해방사상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뮤니즘이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사상이 될 수 있는지는 당연히 제기되어왔던 물음입니다. 지난 세기 60년대에 서구에서 환경파괴의 심각성이 제기되었을 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써 맑스주의를 생태학적으로 확장하려는 이론적 노력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생태사회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서구에서는 이런 맑스주의의 생태화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맑스주의 내부에서 받아들여졌는데, 이에 비하면 한국에서는 아직 노동운동이 중심적이고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초기 국면에 있었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생태주의와 결합하는 데에도 관심이 별로 주어지지 못했습니다. 1980년대에 독일에 유학하면서 환경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귀국하고 내가 첫 번째로 쓴 논문이 맑스주의와 생태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중적으로는 맑스주의가 여전히 노동만의 해방사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맑스주의는 이미 오래전에 노동을 넘어 환경, 여성, 소수자와 기타 사회적 배제자들을 위한 해방사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한국의 맑스주의자들의 학술모임인 맑스코뮤날레도 녹․보․적(적색은 노동, 녹색은 생태, 보라색은 여성·인권을 의미한다.) 연대를 표방해오고 있습니다. 

1972년 6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엔 인간 환경 회의가 개최되고, 이후 리우, 교토, 파리를 거쳐 얼마 전 카이로에 이르기까지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전 세계적인 기후협약이 선언되고 있습니다. 그 해결의 기본방안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하여 협약 당사국들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감축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있고, 환경재앙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환경운동가들은 이미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해결책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틀 내에서 경제 성장하면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과 같은 친환경 기술의 확대를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인다는 것인데, 이런 기술주의적 해결책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경운동가들에게 성장을 멈출 수 없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틀 내에서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성장을 멈추고 탈성장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장없이도 존속할 수 있는 생태주의적인 대안 경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코뮤니즘이라고 책에서 강조했다. 그렇다면 결국 ‘자유’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자유는 사회적 신분의 해방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중세에서는 농노, 근대에서는 산업노동자, 현대에서는 금융·디지털노동자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자유는 과연 무엇인가.

우선 자유의 개념에 대해 답하기 전에 내 글에 대해 먼저 몇 마디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내 글은 유럽 중세 도시를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중세 도시에 대한 관심은 코뮌이라 불렸던 중세 도시가 코뮤니즘의 역사적 기원이 아닌가하는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칼 맑스가 코뮤니즘의 사회정치적 원리로 제시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중세도시에서 최초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세 코뮌이 코뮤니즘의 역사적 기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세 도시를 연구하면서 이보다 더 새롭고 근본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2세기에 출현한 중세도시는 단지 코뮤니즘의 기원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기원이었습니다. 중세 도시는 현대사회에 대한 서구의 사회철학 사상을 새로이 조명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존재방식과 자유의 이념, 시민사회와 국가, 민주주의 등 서구 사회철학의 기본 이념들을 다시 고찰하게 만듭니다. 

서양의 역사도 재고찰이 필요합니다. 중세도시는 이전 시대와 단절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4천 년간의 기나긴 노예의 역사를 뒤로하고,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역사적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또한 12세기에 이르러 지배적인 경제적 생산력에 있어서 농업으로부터 상업으로의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이 상업혁명이 18세기의 산업혁명보다 앞선 1차 산업혁명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더 의의가 큽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존재방식의 변화입니다. 중세도시 속에서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인간이 개인이라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인간이 개인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중세 도시에서부터입니다. 중세 도시의 사회철학적 연구는 현대사회를 많은 점에서 새롭게 보게 할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제 서구에서의 자유에 대한 문제에 대해 얘기하자면, 우선 자유는 서구인들의 일차적인 정신적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서구의 역사 속에서 특히 ‘현대’라는 시대의 서구사회가 추구한 최고의 가치입니다. 현대 사회의 역사적 발전은 자유의 이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로크에서 루소까지 현대 서구 사상은 자유를 기초로 하는 사회를 정립하려는 시도였으며, 그 현실적 성과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선언한 프랑스혁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서구의 최고의 정신적 가치가 자유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인류역사를 자유 의식의 진보라고 설파한 헤겔 철학에서 가장 극명하게 정식화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서구 현대의 최고 가치인 자유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바로 중세도시입니다. 봉건적 관계 속에서 농노는 영주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중세 도시에서의 시민적 관계는 자유였습니다. 그래서 이 자유를 찾아 농노는 도시로 도망 온 것입니다. 중세 도시에서 새로이 형성된 시민적 관계는 특히 모든 사람들이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는 자유의 보편성을 이념적 기초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만인의 보편적 자유가 바로 현대 사회에서의 자유의 이념의 시작점입니다. 질문에서처럼 신분적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 자유의 일차적인 의미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은 자유의 소극적인 측면일 뿐입니다. 농노가 도시로 도주해 온 적극적인 이유는 이제 자유인이 되어 자신이 성취하고 싶은 미래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기실현입니다. 자유의 적극적인 측면은 인간의 자기실현입니다. 농촌에서 도주해 온 농노는 처음에 맨손으로 시작했으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도시에서 큰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중세도시에서 자유의 적극적인 측면으로서 자기실현이 모든 시민이 인생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 인간의 자기실현의 이상이 꽃을 피운 것은 르네상스에 와서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자신의 능력의 전인적 계발이 이상적인 인간의 삶으로 자리 잡았고, 이런 전인적 이념에 따른 인간들의 노력이 문화의 꽃을 피우는 결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자유는 일차적으로는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더 중요한 적극적인 측면은 자유가 있어야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세에서 인간이 ‘개인화’한 점을 책에서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극단적 개인화로 인한 단절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현대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부정적인 개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개인의 존재에 대해서 앞의 질문에서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현대인은 기본적으로 개인입니다. 이 개인은 중세도시에서 처음 출현하였습니다. 인간이 개인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인간의 존재 방식에서의 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살게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의 역사 속에서 이 개인의 존재는 시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현상하였습니다. 인간의 ‘개인화’, ‘개인주의의 심화’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것은 1850년대 산업자본주의가 그 형성 과정에 있던 초기였습니다. 특히 이 개인주의를 처음 문제로 삼은 것은 콩트와 뒤르켐의 프랑스 사회학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유럽 전역은 사회적 혼란이 극심하였고, 콩트와 뒤르켐은 이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규명하려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회적 혼란이 다른 나라들보다도 자살이 심하게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프랑스는 세계에서 자살이 가장 많은 나라로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른 얘기를 하자면, 얼마 전부터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 이어 대한민국이 자살공화국이 된 것입니다. 뒤르켐은 자살의 원인을 개인주의의 심각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단절 속에서 소외된 개인의 좌절에서 찾았습니다. 뒤르켐은 개인주의에서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이후부터 개인주의는 긍정적이기보다는 사회적 폐해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논리로서 뒤르켐은 개인주의의 문제를 극복할 방안으로 사회에서 인간적 유대의 강화를 제시했습니다.

이 인간적 유대의 강화를 사회학적으로 적극적으로 이론화한 사회학자가 독일의 페르디난트 퇴니스입니다. 그는 사회를 이익사회와 공동체사회로 나누고,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이익사회가 인간들 간의 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에, 인간적 유대에 기초한 전통적인 공동체사회를 극복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에 의해 개인과 공동체는 대립된 것으로 설정되었고, 인간적 유대의 공동체를 위해서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개인은 그 존재론적인 지위가 박탈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회학은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개인주의, 개인으로서 인간의 책임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다른 접근법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주의의 심화, 개인과 개인의 단절이 사회적 혼란의 최종적인 원인인가, 아니면 개인주의가 심화된 데에 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서 제가 “레미제라블의 역설”이라고 부른 것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장발장이 빵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배고픔, 극도의 가난이 그를 빵을 훔치게 한 것입니다. 개인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를 팽배하게 한 사회적 환경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산업자본주의 초기 단계의 구조적 문제인 대중의 경제적 빈곤화가 근본적인 사회적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회학이 근본 원인을 개인주의에서 찾은 것은 문제의 근본적인 진단이 아니었습니다.
  
△퇴임 이후의 계획은 무엇인가.

퇴임 이후에는 이미 이전부터 계획했던 데로 교수 생활하면서 연구해오던 주제들을 정리하여 몇 권 정도의 책을 쓸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21세기 현대사회의 새로운 사회이론의 구성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무인자동차, 인공지능, 빅데이터, 메타버스 등 이전의 아날로그적 수준에 있던 산업 분야들의 디지털화가 전방향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를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르고 있지만 기술의 성격변화에 맞추어 더 정확히 표현하면 디지털기술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디지털기술혁명은 산업과 경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인간의 삶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고, 이를 사회철학적으로 연구할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서구 근현대의 주요 철학자들의 사상을 21세기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스피노자, 헤겔, 니체, 칼 맑스의 사상들이 주요 초점이 될 것입니다. 토마스 홉스가 인간의 생존을 출발점으로 하여 사회이론을 정립한 이후 서양 근현대 철학은 생존의 철학을 기조로 하여 철학적 사상이 구성되어 왔습니다. 이에 반하여 서양 근현대 철학을 생존을 넘어 자기실현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시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20세기 유럽의 사회철학 사상을 전반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20세기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한 사회철학 사상의 파노라마가 연출되었습니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20세기 유럽 사회철학의 새로운 길이 제시되었고, 이어 벤야민, 하버마스,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앙리 르페브르, 장 보들리야르 등 열거하기 어려운 많은 철학자들이 20세기 후반기 급변하는 서구사회를 개념화하는 다양한 사회 해석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철학사상들을 사회적 변화와 연결하여 해석하는 연구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주제는 이번 퇴임하면서 시론으로 쓴 중세도시에 대한 사회철학적 해석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연구가 될 것입니다. 중세도시에 대한 연구는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개인의 존재론적 전환에서부터 현대 이전 사회로부터 현대사회로의 역사적 대전환의 철학적 의미를 규명하면서, 현대사회의 근원적 성격을 더 분명하게 밝혀내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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