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7:30 (토)
민주주의를 포퓰리즘에서 구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를 포퓰리즘에서 구할 수 있을까?
  • 이관후
  • 승인 2023.09.01 1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치학 비평_『책임 정당: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 프랜시스 매컬 로젠블루스·이언 샤피로 지음 | 노시내 옮김 | 후마니타스 | 364쪽

자유와 민주주의 간의 균형을 무너뜨린 인민주의
노무현 정부 이후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폐해

이 책의 부제는 도발적이다.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라는 주장은 언뜻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우선 앞의 민주주의와 뒤의 민주주의가 같은 것인지 불확실하다. 이 두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범주처럼 보이기도 하고, 개념 정의에서 협의와 광의로 이해될 수도 있다. 저자들은 이에 대해 책에서 명시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 책의 논지는 ‘시민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방침을 선호하는 주류 학계 및 일반적인 견해에 배치된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민의 직접참여를 강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몇 년 전 출간된 야스차 뭉크 미국 존스홉킨스대 폴 니츠 고등국제학대학 교수(정치학)의 『위험한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뭉크 책의 원제는 투박하게 번역하자면 ‘인민과 민주주의의 대결: 왜 우리의 자유는 위험에 처했고, 어떻게 그것을 구할 것인가’이다. 뭉크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비교적 명확하다. ‘인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으며, 그것이 위험에 처하게 한 것은 ‘자유’다. 뭉크는 현대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보고, ‘인민주의’가 자유와 민주주의 간의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자유가 위험에 처했다고 본다. 사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의 위협을 규정하는 여러 비판 지점 중 하나로, 포퓰리즘을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규정하는 관점이다. 

뭉크 이외에도 이 관점을 채택한 대표적 학자로 나디아 우르비나티 콜롬비아대 교수(정치이론)를 들 수 있다. 그녀는 『미 더 피플(Me the people)』에서 포퓰리즘을 합헌적 민주주의의 극단적 경계선에 선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의 형태로 보면서, 그 전형적인 사례로 보나파르티즘을 제시했다. 보나파르티즘은 선거와 국민주권을 인정하지만, 다원주의와 권력분립을 공공연히 부정했다. 

국내에서도 포퓰리즘을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보고 그 대안을 찾는 움직임이 있다. 신기욱 스탠퍼드대 교수(사회학),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위기에 처한 한국의 민주주의(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에서 노무현 정부 이후 약 20년 간의 정치적 갈등과 위기를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폐해로 보았다. 김 교수는 “비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빈곤을 뜻하고, 포퓰리즘은 반(反)다원주의를 강화했다. 경제와 정치 양극화는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낳았다”라고 한국 정치를 진단했다.

이러한 기존의 관점에 비해 오늘 소개하는 책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본다. 이때의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저자들의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다원주의’ 혹은 ‘정치’ 그 자체다. 다원주의와 정치의 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독재다. 이들이 독재를 보는 관점은 토크빌의 그것으로 돌아간다. 현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다수의 폭정’이며,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주체는 ‘정당’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포퓰리즘이 성횡하고 있다. 과연 어떻게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을까? 이미지=픽사베이

정당을 포퓰리즘이 위협하는 민주주의의 구원자로 보는 관점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에서 정치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이미 제시한 바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파수꾼인 정당이 기존의 정치를 유지시켜 온 예의와 협력, 관례를 저버리면서 민주주의가 독재의 위협에 처했다고 본다. 그리고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무지막지한 태도로 민주적 질서를 위반하는 상대에 대해 이런 전략이 효과적일지 의문을 품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책임정당』은 하나의 대안이 될지 모르겠다.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인 로젠블루스와 샤피로는 이 책에서 여전히 정당을 대안으로 보지만, 정당들의 태도보다는 정당의 조직 자체를 문제 삼는다. 그들의 대안은 ‘내부적으로 규율 있고 위계가 잡힌 정당’이다. 정책적 일관성이 높고, 정치적 책임을 지는 정당들이 존재할 때,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에서도 정치·정당개혁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다양한 의견들이 정치 현장에서 개진되지만 이에 대한 학술적 논쟁은 아직 불붙지 않은 상태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 볼 만하다.

 

 

 

이관후 
건국대 교수·정치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