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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만드는 창의성, 되찾을 수 있을까
손으로 만드는 창의성, 되찾을 수 있을까
  • 유만선
  • 승인 2023.05.03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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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선의 ‘공학자가 본 세상’ ⑳

누구나 창조하는 ‘무한상상실’ 그 시작과 끝
창작 즐길 여유 허용하지 않는 문화 바꿔야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 과학관이란 곳에 막 적응한 나는 신기한 프로젝트를 하나 맡게 됐다. 이름하여 ‘무한상상실 구축 및 운영사업’. ‘메이커 운동’이라는, 당시 한국에는 생소했던 개념의 문화를 널리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메이커 운동은 사람들이 소비에서 벗어나 저마다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상상하고 또 만들며 주변에 공유하는 활동으로 메이커는 이러한 창조 활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메이커 운동은 대량생산과 소비에 익숙해진 현대 시민들에게 잃어버린 창의성을 되찾아 주는 데 그 의미를 뒀다. 당시 새로 부임하신 단장님이 주신 크리스 앤더슨의 『메이커스』라는 책을 읽고 서울·대전 등에서 활동하던 메이커분들을 만나 자문을 구해가며 무한상상실의 공간과 시설, 운영 프로그램 등을 계획했다. 몇 달 뒤인 2013년 8월 1일 당시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님을 모시고 진행된 개소식과 함께 한국의 무한상상실은 첫발을 뗐고, 이후 전국 곳곳에 무한상상실이 생겨났다.

 

처음 운영된 무한상상실은 나에게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도 낯설었다. 창작활동에 큰 도움을 주는 ‘디지털 제조장비’가 강조되다 보니 부모님들이나 교사들에게 3D프린팅 수업을 주로 하는 교육공간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 아이디어가 있는 일부 청소년과 성인들에게는 발명품의 설계·제작을 무료로 대리해주는 가공서비스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공간을 운영하면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머리를 쓰는 ‘발상’과 관련된 창의교육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손을 사용해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보는 ‘창작’은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이 시기 독일의 교육전문가 한 분과 만나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독일은 발상 수업 이전에 풀이나 가위, 더 나아가 못이나 망치, 끌 등의 수공구 사용법을 먼저 아이들에게 가르친다고 했다. 이와 반대로 한국은 인문계 중심의 교육구조 때문인지 아니면 이웃한 제조공장, 중국에서 넘어오는 값싼 제조품의 ‘풍족함’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만들어 보는 문화가 자리 잡기에 좋은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다.

2014년 확장된 무한상상실에서는 발상을 위한 프로그램보다 창작을 위한 기술 학습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더 많이 제공했다. 3D프린터, 레이저 컷과 각종 설계프로그램 등의 활용에 필요한 안전 기본교육을 진행했고 각 교육을 이수하고, 장비들의 기본 활용 테스트를 통과한 시민들에게는 해당하는 장비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무한상상실을 기획하고 운영한 경험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한 여자아이는 CAD를 이용한 설계부터 3D프린터, 레이저 커팅 작업까지 손수 진행하며 기괴하고 신기한 놀잇감들을 마구 만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건축가로 활동하던 한 메이커는 생활하던 산속에 도로가 깔리면서 근처에 서식하던 맹꽁이들의 길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차량의 과속방지턱과 맹꽁이들의 생태통로를 결합한 시제품을 만들었다. 갓난아기를 키우던 한 엔지니어 부부는 주말마다 무한상상실을 방문해 아기의 걸음마 훈련 로봇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렇듯 기존 국내 창작자들에게 좋은 환경과 기회를 제공하며 무한상상실 사업은 일정 부분 성과를 냈지만, ‘창작활동’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확산시키는 것에는 한계를 보였다. 시민들에게 창작을 시작할 충분히 좋은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시민들이 기술을 즐기기에 충분한 ‘여유’가 없던 것이 사업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여유 시간의 기술’을 즐길 기회가 아직 우리 시민들에게는 허락되고 있지 않았다.

무한상상실 사업은 작년에 최종 중단됐고, 현재는 창업문화를 확산하기 위한 ‘메이커 스페이스’ 사업이 창업진흥원 등에 의해 실시되고 있다. 하지만 ‘창업 기반’이 아닌 ‘문화’로서도 우리나라 시민들의 ‘창작활동’은 계속해서 응원받아야 할 것이라 믿는다.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인간 고유의 것이라 여겼던 ‘창의성’을 위협하는 요즘, 손으로 직접 창작하며 얻게 되는 감각과 그로 인한 학습 경험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유만선
서울시립과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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