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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소양이 아니라 ‘역량’이 답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아니라 ‘역량’이 답이다
  • 유성호
  • 승인 2021.11.04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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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오늘을 말하다 ③ 인문대학 비전

시대가 학문 분야 간 소통과 협업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고, 소통과 협업의 선결요건은 학문의 균형발전임에도 불구하고,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는 여전히 심각한 소외와 격차 속에 방치되고 있다. 학술정책 수립을 위한 연구기관이나 심의자문기구는 물론이요, 대학의 ‘학술연구’를 뒷받침할 전문법령조차 전무한 것이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의 실상이다.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가 스스로의 본령을 지키고 학술연구의 공공성과 사회적 기여도를 높일 기반 확립이 시급하다.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는 앞으로 11회에 걸친 기고를 통해 인문사회문화예술 분야 연구와 교육의 현황과 전망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정부와 국회의 가시적 조치를 촉구하고자 한다.   

문화 충돌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중요한 인문적 역량
진단·처방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데 기여

대학이라는 근대적 교육제도는 그 목표를 ‘교양인’과 ‘전문인’ 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에 맞춘 채 출발하였다. 그것이 교육 형식으로 반영된 것이 ‘교양’과 ‘전공’이라는 분법(分法)이었을 것이다. ‘교양’이 세상을 합리성에 의해 살아갈 수 있는 반듯한 시민을 길러내는 데 목표를 두는 개념이라면, ‘전공’은 특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인을 길러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와 첨단 과학기술 문명이 득세하고 있다. 동시에 인문학이 지향하는 인간 성숙의 지표들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대학교육이 이 두 가지 요구의 균형 속에서 발원하고 전개되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대학은 취업지상주의와 경제 논리의 우위에 따라 현저하게 교양 교육의 성격이 약화되었다. 최상의 수행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취업과 경제 논리는 대학을 삶의 현장이 아닌, 그 현장으로 나아가는 단계적이고 한시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연스럽게 교양교육의 핵심이었던 인문학은 그 지위와 영향력에서 약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전공교육으로서의 인문학도 덩달아 위기를 첨예화하기에 이르렀다.

인문학을 핵심으로 하는 교양이란, 19세기 독일에서 창안해낸 ‘빌둥(Bildung)’이라는 개념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인간다움을 닦고 형성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에서부터, 전문 기능인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직업교육 과정과 구별되는 보편적 시민교육의 일환이라는 뜻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런데 그러한 교육 시스템에 가장 중요한 근간을 이루어왔던 인문학은, 우리의 경우 ‘근대’를 둘러싸고 나타난 미완의 과제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되었다. 가령 식민과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봉건적 가치로부터의 탈피와 근대화 추진 등의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충돌에 대해 인문학은 그것들을 상상적으로 교정하면서 삶의 대안적 지표를 마련하는 데 크게 공헌해왔다. 

 

인문학은 삶의 대안적 지표 마련에 공헌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일상화 이후 세계는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급변하였으며, 인문학은 그러한 근대적 과제들에 대한 대체 질서 마련이라는 고유한 역할에서 한 걸음 비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인문학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대학에서 생산하고 수용되는 인문학 역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능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대학교육의 역할 변화가 확연한 시점에, 대학에서의 인문학이 처한 위상에 대해 성찰하면서 동시에 인문학이 새롭게 견지해야 할 지표들을 생각해볼 필요와 맞닥뜨리게 된다.

두루 알다시피 인문학은 생활에 직접적으로 소용이 되는 실용적인 지식을 지향하지 않고 그것들을 해석하고 판단하여 세계를 향해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목적을 취한다. 전통적 범주인 문사철로부터 인간의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다양한 파생 학문까지를 포괄한다. 그리고 여전히 인문학은 전문 분야를 횡단하는 통합적 지식 및 태도와 깊이 연관된다. 그만큼 인문학은 단순히 지식과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고, 또 기존의 사회 질서와 규범을 수동적으로 계승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개개 인간으로 하여금 성숙한 인격으로 형성해가게끔 하는 데 진력하게 된다. 사회 상황과 연결되는 지점에서 그 모순을 타개하기 위하여 과학적, 합리적, 기술적인 지식을 중시하면서도, 실제적 경험이나 지식 획득의 과정을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재귀적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기술 발달로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현저하게 극복됨에 따라 국가와 국가, 문화와 문화의 만남이 점점 더 넓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문화들 간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만남과 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의견의 차이에서 오는 마찰과 갈등은 더욱 증가해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서로 다른 국가나 문화 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도 기존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들 사이의 갈등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 지식, 연령, 이념 등을 달리하는 계층과 세대 사이에서 점점 더 세분화되어가고 있는데, 그룹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이해관계의 편차가 커질수록 사회 곳곳에서 마찰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군(群)에 대하여 인문학은 그 진단과 처방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의 도약하려는 지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인문학 다음에 와야 할 말은 ‘소양’이 아니라 ‘역량’이다. ‘인문학적 역량’이 중요한 것이다.

 

점점 세분화하는 계층·세대 사이 갈등

2세기 전 베를린대학의 창립자 훔볼트는 성숙한 지성과 인격을 갖춘 전인적 인간 양성을 위하여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바 있다. 물론 근대 초기 ‘인간을 위한 교육’을 지향했던 인문학의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점점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와 첨단 과학기술 문명이 득세함에 따라 인문학이 지향하는 인간 성숙의 지표들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부와 권력과 지식과 정보를 향한 무한 경쟁의 최고 피해자는 결국 인간 자신이다. 모든 것을 단일한 잣대로 재단하는 경제 논리에서나 스스로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지식의 전문화 과정에서나 인간 존엄은 철저히 무시되고 배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와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서 배려되지 않는 것들, 멀어지는 것들을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시 묶고 연결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문학이 담당해야 할 대안적 몫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은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발전해도 세상의 중심은 마땅히 인간이어야 하고, 따라서 모든 학문과 예술의 최고 목적 역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전공 교육이 더욱 굳건하게 세워질 것이다. 그 점에서 인문학적 지성은, 어느 분야에서건 자신의 전문성을 자신만의 스케일과 디테일로 살려가려는 인재들에게 필요한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 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까닭이다.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전국사립대학교인문대학장협의회장)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에서 한국 현대시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남대, 한국교원대 등에서 재직했으며 현재 한양대 인문대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서정의 건축술』, 『단정한 기억』,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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