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洗踏足白과 학문
洗踏足白과 학문
  • 유흔우 동국대
  • 승인 2003.03.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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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전임으로 막 발령을 받았을 때였다. 당시 은퇴를 했던 어느 원로 선생님께서 교수 생활은 5년 정도까지가 힘들고, 특히 5년째 무렵이 가장 힘드니까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냥 지내면서 느껴보라고 그러셨는데, 아닌게 아니라 참으로 맞는 말임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5년을 갓 넘긴 교수 생활은 ‘곤혹스러움’ 그 자체다. 최근 들어 부쩍 많이 듣게 되는 ‘교수가 말이야’라는 소리에서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또 ‘교수는 학생을 위해’, ‘교수는 학교를 위해’로 시작하는 말들을 듣게 되면 더욱 그렇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말들이 과연 진정으로 누구를 아니면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면 곤혹스럽다는 말도 사치다. 이런 내가 과연 누구를, 그 무엇을 위할 수 있겠는가. 아니 ‘위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의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공포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중병에 걸려 있는 셈이다. 그러기에 교수로서의 자부심과 품위를 지키는 선배들을 보면 그저 머리가 숙여진다. 시간이 흐르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헤매고 있는 나를 ‘위해’ “나는 너를 이해한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밉다. 어떻게 ‘너를 이해한다’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지 부럽기도 하다. 물론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의 충정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남의 말대로 스스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데서 오는 자괴감과 불안을 탓해야지 누구를 그 무엇을 탓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수업 내용에 대해서, 또는 인생에 대해 물어오는 학생들의 진지한 눈초리를 대하는 일이다. 대답을 하면서도 어느새 내 목소리는 힘이 빠지고 말을 더듬게 된다. 애써 무마하기 위해 마른기침도 하면서 꽁무니 빼기에 급급해진다. 그 동안 내가 공부해 온 것이, 그래서 그만큼 내가 알고 있다고 자부해 온 것이 다 헛것인 것 같아 부끄럽고 우울해진다. 그러면서 다시 학생들 앞에 서서 마치 달통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해야만 하는 것이 두렵다.

의 빨래를 했더니 제 발이 희어졌다는 洗踏足白이란 말이 있다. 남을 위해 한 일이 자기에게도 이득이 있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또 무슨 일을 했는데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경우에도 이 말을 쓴다. 처음부터 자기 이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니 대가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도 않을 터인데, 하지만 뭔가 대가가 있어야 할 것만 같이 생각되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분명 내가 좋아서 공부했을 뿐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변질된 나를 보고 있는 우울함이란.

학자, 즉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은 무엇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 공부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성실(誠)하고 정성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비단 학자뿐이겠는가. 우리는 종종 ‘정의를 위해’, ‘민주를 위해’라고 말하지만 정의란 그저 실천해야 하는 것이고 민주는 그저 실현해야 할 것일 뿐, 내가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공부하고 그저 가르치는 것, 여기에 내 절박한 희망을 걸어볼까. 빨래를 해줬으면 그만이지 제 발이 희어지건 아니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자기 만족’에서 위안을 찾는 동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나 역시 그렇기도 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서도 자기만족으로 자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위한다’는 뜻을 생각해 보게 된다. 자기가 아닌 뭔가를 위해, 위한다는 의식 없이 그것을 하는데는 ‘사랑의 동기’가 있어야 될 것이다. 학생, 학교, 사회와 동정적 조화 관계를 이루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학생을 사랑하고, 학교를 사랑하고, 한국을,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앓고 있는 중병에 양약이 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유흔우(동국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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