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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연구로 출범…세계적 수준의 동북아지역 연구 허브 지향
공산권 연구로 출범…세계적 수준의 동북아지역 연구 허브 지향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1.11.30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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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문제연구소의 어제와 오늘

1957년 한국 최초의 대학부설연구소로서 출발한 아세아문제연구소(이하 아연)는 1950~60년대 국내 최고의 공산권연구기관으로 명성을 쌓아왔다. 그 후 중국, 일본, 동남아, 그리고 한국 연구로 연구 영역을 확대하여,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아시아연구기관으로 자리잡았다. 1958년에 창간한 계간 학술지 <아세아연구>를 비롯, 많은 연구총서와 자료총서를 간행해왔고, 매년 국제학술회의 및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학술연구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이 사회에 필요한 엘리트 육성이라는 좁은 영역에 역할을 한정짓고 있을 때, 고려대는 대학이 먼저 장기적 지식 기반 구축에 나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아연을 설립했다. 아연의 활발한 활동에 자극을 받은 한국의 각 대학은 대학부설 연구소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연구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아연의 조직 체계와 운영방식은 이후 탄생한 대학부설 연구소의 원형이 됐다.

그렇다면, 이 아연이라는 거대한 연구공동체를 탄생시킨 주역은 누굴까. 지난 6월 타계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다. 일본 유학시절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한국근대사의 거목. 이범석 장군의 부관을 지내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그는 정계로 진출하지 않고 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내영 아연 소장(고려대·정치외교학과)은 “김준엽 총장은 해방된 조국에서 동북아를 연구함으로써 학문적 발전을 꾀하는 일이 한국사회에 기여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그 일을 당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신 셈이다”라고 말한다. 거목은 바람을 피할 수 없듯, 정치권으로부터의 입각 유혹이 끊이질 않았다. 총리직 제의만 4~5회 있었지만, 그때마다 유혹을 거절했다. “선비로 남겠다는 일관된 의지셨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적 수준의 학자들과 교류해야 하고, 한국사회에 학문을 통해 기여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셨다. 공산권 연구 학자들,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등과 교류하면서 북한·중국 공산주의 운동 연구의 가능성을 예견했다. 이걸 통해 아연을 세계적인 연구소 만들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구 공동체를 표방한 아연의 시기별 연구 경향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보폭을 맞춰왔다. 공산권 연구주력 시기(1957~1978년) → 한국사회 연구 주력 시기(1979~1993년) → 동아시아 사회 문화 연구 주력 시기(1994년~2008) → 동북아시아 지역연구 주력 시기(2008년~현재)로, 시대와 사회의 요구를 수렴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회적 의제를 발굴 제시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아연은 2008년 11월 인문한국(HK) 해외지역사업 연구소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전임연구인력의 확충을 통해 안정적인 연구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특히 세계 각국의 동북아 지역연구자들 간의 학술교류를 확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중국·일본의 주요 연구소·연구자들과 지역정보·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동북아 종합지역연구소로 도약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아연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설립 방향을 제시한 김준엽 총장이 실천했던 ‘문호 개방과 확대’를 꼽을 수 있다. 실제로 김준엽 총장이 소장으로 있던 1970년대 장안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은 고려대 아연을 거쳐갈 수 있었다. 이홍구, 김경동, 이상우, 홍원탁 등 학자들과 김재익 당시 경제기획원 국장도 정책 연구에 참여했다. 이내영 소장은 “아연이 고려대 안의 연구소에 머문다면, 세계적 시각을 담을 수 있는 연구소로 거듭날 수 없다. 연구소에 고려대 출신만 들어오고, 고대출신끼리 연구하는 걸 넘어서야 아연이 살 수 있다. 그걸 하지 못한다면, 무슨 동북아 연구를 주도하는 연구소가 될 수 있겠나”라고 반문한다. ARI 팰로우쉽을 비롯, 고려대와 면식이 없는 젊은 연구자들을 초빙했다.

그렇다면 아연은 이제 어디로 갈까. 동북아지역에 관한한 세계적 수준의 연구소를 지향하겠다는 내부 구성원들의 의지가 강하지만, 뒷받침돼야 할 게 있다. 이내영 소장은 외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연구하다보면, 연구 방향이 아연의 고유한 정체성과 분리될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지금 이 소장은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장기적 연구에 지속적으로 아연의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대학 연구소들이 재정적 문제로 부침하는 경우가 많은 우리 현실이기에, 그의 해법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김준엽 총장은 전두환 정권때 학생들과 제자들을 두둔하다 총장직에서 물러나셔야 했다. 한동안 아연에도 나오지 못하셨다. 그때 사회과학원을 설립, 중국내 한국학 연구소 10곳을 지원하는 일을 시작했다. 한중 수교 이전의 일이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 주요 대학에는 한국학 관련 연구소가 개설돼 있고, 한국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지난해 산동대와 함께 한국학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감회가 깊었다”라고 이내영 소장은 말한다.

17년전 박사학위를 갓 마치고 김준엽 총장을 가까이서 보필하면서 중국내 한국학연구소들에 영문편지를 썼던 일이, 마침내 결실이 돼 돌아온 것이다. “아연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두들 고민이 많다. 김준엽 총장께서 하시던 말이 있다. ‘나는 역사학자로 역사의 신을 믿는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자’라는 말이다.” 과연 아연은 어디로 갈까. 세계의 연구소로 나아가는 과제는 아연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욱 대학과 사회, 국가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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