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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과학의 人才 産室…長期 硏究 지원해 사회발전 기여
한국 사회과학의 人才 産室…長期 硏究 지원해 사회발전 기여
  •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 승인 2011.11.30 0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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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유산, 한국의 미래다 (2)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57년 설립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이하 아연)가 끼친 학문적 영향은 한 대학과 한 분과학문의 범위를 넘어선다. 1960~70년대 시기 동안에는 아연을 제외하고는 한국대학의 역사를, 나아가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역사를 서술할 수 없을 만큼 아연의 활동은 개척적이고 독보적이며 종합적이었다. 대학연구(소)활동의 거의 전 분야, 이를테면 연구, 자료수집, 출판과 같은 중심적인 학문활동 영역뿐만 아니라, 연구의제설정, 인재초빙과 구성, 국제협력, 학술회의, 모금, 학문후속세대양성, 사회적 영향 … 과 같은 연구조직의 존재이유 전 영역에 걸쳐 그러했다.

먼저, 근대화, 공산주의, 동아시아, 통일, 북한 문제를 포함해 아연이 당시에 설정한 연구의제들은 한국사회에 가장 적확한 것들이었고, 아연의 연구수준은 당대 한국 최고 수준이었다. 이들 주제는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주제들이었다는 점에서 대학연구소 활동의 한 전범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통일문제와 북한문제는 아연이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최초로 본격 연구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學緣아닌 학문적 우수성으로 전문가 구성

고 김준엽 총장(1920.8.26~2011.6.7)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디렉터다. 설립이후 제2대 소장을 역임하면서 연구소의 문호개방과 연구능력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중심적 연구의제를 고려대라는 단일 대학의 범위를 벗어나 해당 주제에 대한 연구역량, 잠재력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연구자들로 구성해 진행했다는 점이다. 이때 아연을 통해 해당 주제의 연구에 착수한 연구자들은 훗날 대부분 그 분야의 한국 최고 전문가로 성장했다. 학연을 넘어 공정하게 선정하되 무엇보다 학문적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이 선택기준이었다. 아연은, 학맥과 교내 권력관계에 매몰된 오늘의 방식과는 반대로, 학문세대를 어떻게 양성하는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고려대를 넘어 보편적으로 초빙된 연구자들은 마치 인재산실, 담론산실로 불릴 만큼 대성공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연은 세계와의 학술 교류의 창이었다. 아연이 교류한 해외학자들의 명단을 일별하면 그들은 대부분 해당 분야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아연의 학술회의는 단순한 한 대학 내 학술회의가 아니라 한국의 현실과 세계의 학문이 실질적으로 만나고 소통하는 접점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연은 언론의 보도를 통해서나 연구결과의 지속적인 출판, 자료집 편찬을 통해 끊임 없이 연구의제의 사회적 확산을 시도해 이 부분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연의 주요 학술회의는 거의 빠짐없이 상세히 보도가 되곤 했다. 아연이 편집하고 정리해 출판한 방대한 양의 자료들은, 자료 입수가 비교적 용이한 지금 시점에도 여전히 필수적일 만큼 긴요하고 유용하다. 물론 자체의 독자적 전문도서관을 갖추어 해당 주제의 연구자들로 하여금 꼭 들르게 만든 점 역시 중요했다.

어떻게 이런 활동과 역할이 가능했을까. 첫째는 학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었다. 당시 아연의 리더십은 한국사회에 필요한 의제가 무엇이고, 이를 위해 학문, 학자, 대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통찰하고 있었다. 특히 학과의 벽을 넘어 학제적으로 대학 연구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거듭 숙고한 뒤 비전과 방향을 설정했다. 따라서 학문과 사회의 관계 및 학제적 연구수행에 관한한 아연은 한국 대학연구소의 모범의 하나로 불려도 부족함이 없었다.

둘째는 최고성과 보편성의 추구였다. 연구비 배분, 연구진 및 필진 구성, 주제할당에 있어 아연은 항상 다른 학교 학자들에게도 상당 비율을 맡겼다. 대학교원들의 급료가 아주 낮고, 외부 연구비 지원제도 자체가 거의 없던 당시 시점에서, 인문사회과학분야에서 상당 수준의 연구비를 학내를 넘어 배정한다는 것은, ‘최고의 학문 수준’자체를 지향한다는 결단이 아니고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점을 하나 깨닫게 된다. 아연이 해외에서 수주한 막대한 연구비를 고려대 내부에서 나누어 독식했다면 아연의 성취는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저런 조직이기주의, 동종교배, 연줄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대학사회의 인사, 조직, 연구비 배분 풍토에서 아연의 경로는 거의 예외였고, 또 그러한 예외적 보편주의가 성공을 가져온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재정적 안정성과 성격 역시 중요했다. 아연의 모금 규모는 한 대학연구소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고, 한국의 경제발전단계를 고려할 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성취에 가까웠다. 거의 모든 연구기금은 해외재단으로부터의 모금이었으니 더욱 놀라웠다. 이 점은 연구의 자율성, 독자성, 장기구상으로 연결됐다. 당시에 아연이 독자적으로 연구주제를 설정하고 진행할 수 있었던, 다수의 탁월한 연구 성과를 계속 제출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바로 해외로부터의 막대한 자금지원으로 인해 국가와 기업에 상대적 자율성을 견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책임감 있는 리더십이 낳은‘아연’의 영예

끝으로는 리더십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연의 창립 및 성공의 주축은 장기간 아연의 책임을 맡았던 김준엽 소장이었다. 한 연구기관의 장기적 안정 및 발전과 관련해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리더십의 지속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서도 아연은 예외였다.

대학연구소들이 교내 권력관계에 따른 리더십의 빠른 교체로 인해, 일관된 구상에 바탕한 장기연구를 진행하지 못하는 대신 정부와 기업과 학교가 요구하는 단기적 연구결과의 대량생산 및 단기생산에 매달리고 있는 풍토에서 이는 귀감이 될 만한 사례였다.

아연이 설정하고 진행한 연구의제들은 한국의 학문과 사회에 크고도 장기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권력과 기업으로부터 독립적이면서도 사회가 필요로 하는 학문을 자율적으로 수행한 것이 아연의 성공요인이자 한국 학문에 대한 최고의 기여였다. 필자를 포함해 오늘의 학자들과 대학 연구기관들이 권력 및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면서도 인간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지혜의 水源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박명림 연세대·정치학
고려대에서 박사를 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하버드 옌칭연구소 합동연구학자를 역임했다.지은 책으로『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다음 국가를 말하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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