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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 부정 부분은 재검토 필요 … 서구의 ‘사랑’ 도입해 근대화 길 제시
민족문화 부정 부분은 재검토 필요 … 서구의 ‘사랑’ 도입해 근대화 길 제시
  • 최정운 서울대·외교학
  • 승인 2010.06.21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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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학자가 본 이광수의 민족주의

자녀들과 오붓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이광수
사진제공: 노양환 춘원연구회 감사

이광수는 친일문학가, 민족반역자로 규정돼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 논의는 진전되지 못한 채 사회 각계, 특히 학계에서 논의가 금기시되고 있다. 이광수가 친일 행각을 하고 우리 청년들에게 일본의 전쟁터에 나가라고 권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글은 이광수의 친일을 옹호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글의 목적은 이광수를 우리가 어떻게 비판하든 그의 문학과 사상에 관한 연구는 우리가 우리 역사를 알고 현재의 깊은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필수적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친일 단체들의 운동 연구 필요


현재 학계에서 논의되지 않는 금기의 하나는 일진회, 진보회 등 친일 단체들의 운동이다. 구한말 친일 단체들의 운동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규모였고 이러한 주제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을 ‘친일’이라는 굴레로 매도하지 않으려는 깊은 배려에서일지 모른다. ‘친일’이라는 문제는 우리 근대사에서 엄청나게 큰 문제로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역사적 인물들에게 선별적으로 규정해온 것 또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친일은 여러 세대에 걸쳐 여러 가지 복합적 동기에서 대규모로 이뤄졌으며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광수는 친일파 중에서도 한 때는 노골적으로 친일을 주도했고 이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아무리 시대가 그랬다고 해도 그가 그토록 민족의 선생임을 자처하던 인물이라면 민족적 정체를 부정하지 말고 끝까지 자신이 공언했던 민족주의적 입장을 사수해야 했음은 부동의 윤리적 기준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수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는 단연 그는 당대에 적어도 그가 친일 입장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나아가서 만천하가 그가 친일주의자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는 당대 대표적인 ‘스타’ 민족주의자로서 사람들의 엄청난 추앙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배신당했음을 알았어도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표방했던 민족주의적 입장은 그의 「민족개조론」(1922)에 잘 드러난다.  그가 천명했듯이 그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따랐고 양자의 민족주의는 모두 우리를 철저하게 바꿔가야 한다는 ‘개화민족주의’였다. 사주팔자 타령이나 하고, 미신에 빠지는 무책임한 우리 민족 개개인이 욕망을 갖고 그 욕망을 끝까지 실현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의 글에 직설적으로 표현돼 있다. 그가 당시에 제기했던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결코 그의 개인적 특이한 입장이 아니다. <독립신문>부터 시작해 계속적이고 공통적으로 제기됐던 문제이며 그가 민족문화를 중상 모략했다는 지적은 재검토 할 부분이다. 이러한 ‘개화민족주의’적 입장은 물론 기존의 전통적 문화를 부정하고 정체성 위기를 자초할 개연성이 있지만 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주의의 중요한 흐름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은 단재 신채호 등이 제기했던 ‘저항민족주의’와 상충되는 입장이었다. ‘개화’와 ‘저항’의 두 갈래의 민족주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갈등을 계속해 왔지만 두 갈래의 민족주의는 교대로 또는 일부 상호를 수용해 가며 현대 한국사회를 형성해왔다. ‘근대화’는 바로 이광수의 개화민족주의의 근본 노선이며 이 노선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결코 부정하지 못하는 이념이기도 하다.

이광수는 계속 그의 소설에서 새로운 강한 한국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계획을 떠난 일이 없었다. 『단종애사』에서 성삼문이라는, 폭력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정절을 지킨 인물을 부각시키기도 했지만 이광수의 독창적 부분은 지속적으로 근대서구의 ‘사랑’을 도입해 새롭게 강한 한국인을 만들려 했다는 점이다. 『무정』에서 이광수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매개로 민족적 현실에 눈뜨는 새로운 세대의 민족주의자를 시도했고, 십여 년 후 『유정』에서는 사랑해서는 안 될 양딸, 남정임을 사랑하고 그녀에 대한 욕망을 끝까지 억제해 가는, 욕망과 이성의 갈등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켜나간 새로운 불굴의 낭만주의 전사를 창조했다.

강한 한국인상 추구와 엘리트주의 한계


심훈의 『상록수』는 이광수의 이러한 작업의 영향 하에서 씌어진 작품이었다. 나아가서 그는 『사랑』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잔인한 시련을 꿋꿋이 견뎌내는 초인적 여전사 석순옥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이광수는 자기 소설의 인물들을 잔인하게 다뤘던 작가로 알려져 있고 수많은 엽기적 장면들을 연출했지만 그의 이러한 사디스틱한 부분들은 모두 강한 한국인들을 만들어내려는 의도에서 구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강한 한국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중심적 기제는 증오심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또한 그의 이야기들 특히 민족운동에 대한 소설들에는 민족, 민중의 모습은 별로 드러나지 않고 지식인 지도자들에 초점을 맞춰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외부적 타율적 기제를 사용해 주체적 측면을 손상시킨 측면도 분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광수의 민족주의적 계획은 분명한 초점이 있었고 현실적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강한 인물에 대한 이광수의 집착은 이광수 자신이 독립운동가가 되지 못한 비겁한 조선인이라는 것에 대한 열등감과 자괴감의 반향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필자는 이광수가 친일 행각을 자행하며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을 표방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습에 대한 현실적, 경험적 이해가 뒷받침돼야 하며 특히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 역시 각별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최정운  서울대·외교학

필자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한국 외교에 있어서의 전통, 근대성, 탈근대성」, 저서로는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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