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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이 된 불멸의 시인 … 『朝鮮佛敎維新論』에 식민지 극복의 철학 담아
거인이 된 불멸의 시인 … 『朝鮮佛敎維新論』에 식민지 극복의 철학 담아
  • 교수신문
  • 승인 2010.06.0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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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_ <3> 한용운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그 세 번째 인물은 만해 한용운(1879.8.29~1944.6.29)이다. 이병창 동아대 교수(철학)는 한용운에 대해 “불교유신론을 통해 전통불교를 현대화하려고 시도한 민족지사다”고 평했다. 한용운은 대중적으로는 시 「님의 침묵」등을 통해 승려이자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연구 중 다수도 문학계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한용운은 3·1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요 『朝鮮佛敎維新論』(1931)을 통해 불교 개혁을 주도한 행동하는 사상가였다. 만해의 사유방식과 불교개혁사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전보삼 신구대학 교수(철학)와 김상현 동국대 교수(사학)가 나섰다. 각각 한용운의 식민지 극복 철학과 불교개혁 사상을 짚어봤다.

萬海 한용운은 1879년 충남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27세가 되던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 스승에게서 득도했고, 1908년 건봉사 이학암 스승에게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했다.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행했고, 다음 해 경전의 대중화를 위해 『불교대전』을 발행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으며 민족을 대표해 독립선언 연설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며, 1923년 이후에는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했다. 1926년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했고,. 66세가 되던 1944년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했다.
사진제공 만해 기념관

한용운의 『朝鮮佛敎維新論』은 그의 불교와 식민지 현실에 대한 개혁의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아직도 『朝鮮佛敎維新論』이 파리 소리가 아닌 민족사의 새벽을 울리는 닭 울음 소리로 들려야 하는 불교계의 현실이 안타깝다. 『朝鮮佛敎維新論』의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은 정신문화의 혁명에 있으며 불교든 아니든 인간은 누구나 정신의 유신을 해야 하며, 그 길만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강조했다. 그는 온 정열을 바쳐 중생구제를 위한 승려 교육, 포교, 경전의 해석 등 불교개혁 의지를 천명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 불교계의 풍토를 좀먹고 있는 비종교적, 비사회적, 비합리적, 토속적, 미신적인 요소와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해서 불교계도 시대적 변화에 부응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순수한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관을 확립해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다시 구현하고자 노력했고 역사적, 사회적인 요청에 부응할 대중 불교 실현의 사명감을 촉구했다. 이 논설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첫째, 문명의 진보론과 둘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 사상, 셋째, 불교를 현실과의 적극적 관계 속에서 해석하려는 점이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


3·1운동은 세계사적인 인류공영을 위해 국가와 국가가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있어야 하는지 문제를 던졌다. 임시 정부의 胎動을 통해 민족의 정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고, 민족의 자존을 세계에 알린 국권회복운동이기도 했다.

한용운이 옥중에서 집필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속에는 자유·평등·평화의 민족자존성과 세계 평화로 이어지는 대강령이 나타나 있다. 그의 철저한 신념에 의한 행동 철학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무시하는 特立獨行의 정신을 통해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사를 발견하게 된다. 한용운은 여기에서 자유의 정신을 통해 불보살의 이상을, 평등정신을 통해 진리의 큰 수레를, 평화의 정신을 구현해 화합의 한마당을 펼치는 독립정신을 강조했다.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위한 한용운의 생사를 초월한 정신은 화엄철학의 무진연기 사상이요, 보현행원의 실천운동이었다. 자신이 직접 추가한 공약삼장 그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굳세게 투쟁했다.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공약삼장은 光明, 正大, 和合이라는 다시 말해 불교의 佛, 法, 僧 三寶의 정신을 말한 것이었다.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한용운은 “육신이 다하면 정신만이라도 남아 영세토록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탁월한 식견과 정연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옥중에서 주장함과 동시에 일본 군국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더욱 놀랄만한 점은 1919년에 벌써 군국주의 일본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처럼 반드시 패망의 쓴 잔을 마실 날이 올 것이라고 확언한 사실이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에 입각한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선 독립은 시간문제 일 뿐,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자신에 찬 단언이었다. 한용운은 자유의 숭고함과 그 자유를 지키는 정신은 자연 법칙이자 숭고한 정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조선의 독립은 조선 민족의 절체절명의 과제인 동시에 아시아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요, 나아가 세계 평화에 대한 신성한 의무임을 역설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침략주의의 야욕을 폭로하고 경책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 인간 생활의 참다운 목적으로 인식하고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한계로 삼는 한용운의 독립정신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극복한 3·1 독립정신의 핵심이다.

이러한 한용운의 철학은 華嚴學的 관점에서 살펴 볼 때 事事无涯 법계의 정신이 밑바탕에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정신, 철학을 통해 한용운은 역사의 어둠을 밝혀 현세의 극락정토, 즉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길인가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또 그는 ‘힘의 배제’와 ‘자유의 연대를 통한 항구적 평화’를 주장했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일제에 비타협적이었던 생애와 비폭력 정신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인류를 향한 유효한 개념임이 분명하다.

3·1 독립운동 이후 한용운의 사회활동 중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활동을 실천과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물산장려운동을 통한 민족자본 형성의 문제를 통해 경제자립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1920년대 초부터 거족적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 물산장려운동이다. 3·1 독립운동 이후의 민족운동은 문화운동으로 그 형태가 전환됐다. 물산장려운동은 이 같은 문화운동의 한 축으로서 1922년에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번졌으며 이듬해에는 조선물산장려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회의 목적은 일제의 경제적 침략을 물리치고 우리의 생활을 국산품으로 충당해 자활의 길을 걷자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물산장려회가 발행한 물산장려회 전단의 내용을 보면 ‘내 살림은 내 것으로!’라는 슬로건을 볼 수 있다. 활동지침으로 첫째, 조선인의 산업 장려와 둘째, 조선인의 산업을 융성하게 하는 상품 애용 장려, 마지막으로 조선인의 생활 및 기타에 관한 경제적 지도 등을 목표로 정했다.

본회의 회지인 <실생활>지에 실린 한용운의 글, 「고난의 칼날에 서라」(제3권 11호)를 보면 “무슨 일이든지 성공이나 실패보다 옳고 그른 것을 먼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정의론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적 자아의 틀을 확립하고자 노력한 일이다.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이 시기에 대두된 또 하나의 거족적 민족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태반은 농촌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무지와 가난의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농촌을 부흥시키고 몽매한 민중을 계몽하는 것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도 농민운동에 관한 많은 논설을 남겼다. 그러나 일제는 이 같은 애국계몽운동의 발전으로 한국인의 수준이 향상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1930년 새해 아침에 ‘농민운동에 대한 신년 소감’에서 순수한 소작농민을 중심을 한 애국운동에는 소작인의 단결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외에도 문자 보급과 미신 타파에 대해 힘 쓸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민족적 자아 확립 노력과 신간회 활동


셋째, 新幹會 활동을 통해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의 가장 대규모의 합법적 결사체로 보였지만 항상 일제의 감시와 주목을 받았다. 신간회의 활동 강령은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고, 기회주의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 뒤 民興會 등과 통합을 추진해 한용운을 위시한 권동진 등 10명을 전형위원으로 뽑았다.

신간회에서는 민족자주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먼저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7월 10일에는 서울지회를 설치했는데 한용운이 지회장을 맡았다. 활발한 지회활동을 통해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자 일제는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후 신간회 해소론이 거론되자 한용운은 신간회 해소론에 반대하고 나섰다. ‘시간적 협동이란 것을 인식했다면 해소론은 옳지 않다.’ 신간회 해소문제에 대해 한용운의 단호한 입장이었다.

신간회 해소문제와 범민족적 표현단체 재건설 가부에 대해 한용운은 조선에 ‘조선운동’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지원하는 민립대학 기성회 주최의 기념강연회에서 “다 같이 조선 민족이 된 의무감으로 일치단결해 우리 2천만의 피와 정성을 모아 民立大學을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오늘보다 내일의 삶을 위해 철저한 교육으로 내일을 준비하자고 역설했던 것이다.

한용운은 민족의 갈망을 절실하게 노래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고, 가혹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의연함을 보여 지조를 꺾지 않은 대 철학자, 불굴의 투지로 겨레를 이끈 대사상가였다. 

전보삼 신구대학·철학

필자는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한용운의 민족주의 사상연구」, 저서로는 『한용운 사상연구』, 『만해 시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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