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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론 좌절 이후 ‘대중불교’ 배제돼 … 축소된 사회적 역할 복원해야
개혁론 좌절 이후 ‘대중불교’ 배제돼 … 축소된 사회적 역할 복원해야
  • 교수신문
  • 승인 2010.06.0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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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불교개혁론이 남긴 과제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가 1895년에 해제됐다.  1902년에는 도성에 원흥사가 낙성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寺社管理署를 설치하고 국내사찰현행세칙을 공포했다. 이로써 정부는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5백년의 억압과 수탈로부터의 해방을 법제적으로 보장해 줬다. 이를 계기로 불교도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게 됐다.

20세기 초 불교계의 화두는 유신이고 개혁이었다. 퇴경 권상노는 1912년 4월부터 『조선불교월보』에 「조선불교개혁론」을 12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는 유신과 개혁을 구별하면서 유신에 앞서 먼저 개혁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퇴경은 이 논설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뿐, 그 구체적인 방법이나 내용에 대한 서술은 간략했다. 이에 비해 만해 한용운이 1910년에 집필하고 1913년에 간행한 『조선불교유신론』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인 주장으로 인해 여러 논란을 야기했다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것이다.  

한용운은 『朝鮮佛敎維新論』을 통해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인데 “종교요 철학인 불교는 미래 문명의 원료품 구실을 할 수 있게 될 것임”과 “불교의 가르침이 평등주의와 구세주의에 입각해 있음”을 천명했다. 이어서 그는 승려교육, 참선, 염불당의 폐지, 포교의 강화, 사원의 위치, 塑繪의 폐지, 불교의식의 간소화, 승려의 권익을 찾는 길, 승려의 결혼 문제, 주지의 선거, 승려의 단합, 사원통할 등의 여러 문제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불교계 폐단 타파가 곧 維新의 첩경

만해는 불교계에 누적된 여러 폐단을 타파하는 것이 곧 유신의 첩경이라고 봤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불교계가 안고 있던 폐단을 주저 없이 지적했다. 그는 당시 불교계가 조선인 중에서도 가장 하등에 속하는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고 봤고, 가난에 시달리거나 미신에 혹한 무리들이 흔히 승려가 됐기에 게으르고 어리석고 나약해 불교의 진상에 어두운 형편이라고 했다. 또한 당시의 불교는 많은 미신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의식은 번잡 혼란하고 비열 잡박해 도깨비연극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만해에 따르면 당시 불교계는 오랜 세월 누적된 폐단이 극에 달해 있었다.

만해가 불교개혁을 주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미 크게 바뀐 세상에서 옛날의 낡은 옷은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의 세상에 살면서 옛적의 道로 돌아가면 재앙이 반드시 그 몸에 미친다”는 경전의 구절에 주목했으며, 변화를 강조해 “인간계의 일에 있어서는 변화보다 좋은 것이 없고 변화하지 않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고까지 했다.    

만해가 제시한 불교개혁의 여러 내용 중에서도 승려의 결혼과 관련된 주장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승려의 결혼 금지를 푸는 것도 불교 부흥의 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계율을 무시하고 승려 전체를 휘몰아 음계를 범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 자유에 일임하려 하는 것이라며 승려의 결혼은 개인의 자유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비록 승려의 결혼을 개인의 자유에 맡기자고 했지만, 이는 분명히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1926년 5월 백용성을 비롯한 127명의 비구승이 조선총독부에 건백서를 제출해 출가자가 帶妻肉하는 것을 시정토록 해달라고 탄원했다. 이는 만해의 주장과는 다른 목소리였다. 만해는 1931년 10월 『불교』에 기고한 「조선불교의 개혁안」에서도 ‘승려만의 불교’, ‘사찰만의 불교’를 부정하고 ‘대중을 위한 불교’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간에서 가두로’, ‘승려로부터 대중에게’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대중불교의 건설을 선창했던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새로 출발한 불교교단의 집행부는 ‘산간 사원의 불교를 도시 대중의 불교로’를 구호 삼아 불교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에는 이 현안에 대해 입장을 달리 하는 혁신단체도 있었다. 혁신파에서는 비구승 중심의 교단 건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총무원장 김법린은 “불교가 비구승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시대의 역행으로서 대승불교의 승단은 만해선생의 불교유신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해의 영향을 받은 교단 간부들은 만해가 제창한 대승불교 건설을 시대적 요구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려취처론의 본질

대중불교를 지향하는 총무원측과 비구 승단을 지향하는 혁신세력 간의 심한 갈등을 거쳐, 1950년대 이청담 등이 주도하는 정화운동이 전개됐다. 그런데 이 운동에서는 만해가 선창하고 김법린 등이 계승했던 불교의 근대적 변용, 즉 대중불교는 철저히 배제됐다. 그리고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한국불교는 승려 중심으로, 그리고 종교적 근본주의로 전개됐다. 그 결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은 축소됐고, 시대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재가불교 혹은 대중 불교의 건설이 다시금 절실해진 오늘의 불교계는 만해가 주창했던 불교유신의 의미를 아직도 새롭게 음해볼 볼 필요가 있다.

김상현 동국대·사학

필자는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백제 무왕대 불교계의 동향과 미륵사」, 저서로는 『고구려의 사상과 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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