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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정확한 당대적 인식, 영원한 思考의 보습
냉정·정확한 당대적 인식, 영원한 思考의 보습
  •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 승인 2010.05.10 13: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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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사상의 현대적 의의

신채호의 투쟁사관은 강권주의 비판과 결합하면서 그의 사상에 새로운 경지를 열어놓는다. 자강에서 혁명으로, 국가에서 사회로, 민족에서 민중으로, 문제 틀의 일대 전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전세계적 강권주의 질서는 여하한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약소민족에게 자강의 기회를 결코 주지 않는다는 것이 신채호의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런 질서로 인해 나라를 잃고 ‘일본 강도정치’의 노예가 돼버린 民族我 생존의 출로는 강권주의 파괴로부터 찾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혁명’의 요구는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다. 

1923년의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가 파괴 대상으로 적시한 것은 다섯 가지. 이족통치, 특권계급, 경제약탈 제도, 사회적 불평균 현상, 노예적 문화가 그것이었다. 이민족과 계급과 신분 잔재를 포함한 온갖 불평등 및 수탈-억압 기제의 철저 파괴를 촉구한 것이었다. 파괴의 동력은 오직 폭력으로부터 나올 뿐이라 했는데, 당연한 논리연관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고유의 조선, 자유적 조선, 민중적 경제, 민중적 사회, 민중적 문화를 새롭게 세우자고 부르짖었다.

민중, 혁명적 파괴외 건설의 주역

그런데 이 선언문에는 ‘민족’이란 단어가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민중’이었다. 민중은 혁명적 파괴와 건설의 주역으로 설정됐다. 또한 혁명 후에 맞게 될 ‘이상적 조선’의 주인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고유의 조선’이 전망되고 있었다시피, 그의 사고반경에서 민족·국가 간 경계가 완전 불식된 것은 아니었다. 민중이되 ‘조선’ 민중이고, 민족이되 ‘민중적’ 민족이어야 했던 것이다. 다만, 억압적 국가장치를 전제하는 ‘정치’의 개념과 그것에 포획되는 ‘국민’이란 개념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이즈음 신채호의 사고에 미친 아나키즘의 영향은 이렇듯 강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신채호는 생의 마지막까지 순정 아나키스트가 되지는 못했다. 뼛속까지 ‘조선주의자’이던 신채호는 아나키즘으로의 직항로 속에서도 끝내 민족을 버리지 못했다. 그 스스로 아나키즘과 배치되는 논리와 표현을 종종 구사하게 됐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신채호에게 아나키즘은 敎義 그 자체로가 아니라 ‘조선의 아나키즘’으로 轉形되는 한에서만 의미있게 수용될 수 있었다. 그런 한에서만 그는 아나키스트였다.

그처럼 고집스런 태도는 그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사이에 묘한 긴장관계를 낳기도 했다. 우선은 공산주의운동의 국제주의가 虛名에 가깝고 결국은 수많은 운동자들을 몰주체적 사대주의의 늪 속으로 몰아넣었다고 신채호는 갈파했다. 그래서 그는 러시아혁명이 러시아식 혁명으로 성공했듯 조선혁명도 진정 조선식 혁명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1928년의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대회에서도 그는 ‘전세계 무산민중’이 아니라 ‘우리 동방 각 식민지 무산민중’을 호명하며, 그들만의 연대와 직접행동을 호소했다. 그것은 파농(F. Fanon)이 아프리카 대지의 헐벗은 자들(the wretched)을 호명하며 흰 것과 검은 것을 대칭시켰던 바를 연상시킨다.

혁명의 문법과 유토피아

하지만 조선혁명과 동방 식민지 민중혁명의 진로는 험난했고, 미래는 낙관적이지 못했다. 그럴수록 신채호의 문체와 어법은 날카롭고 매서워졌다. 역사 속 ‘실패거인’들의 이름이 자꾸 일컬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노예적 삶의 질서에 대한 도전과 반란의 시간들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계속 환기시켜 준 그들은 신채호가 봤던 ‘역사의 천사’라 할 만했다.

그런 방식의 ‘기억의 정치’를 동원하며 신채호는 정신혁명·도덕혁명·문화혁명의 길로, 종국에는 인간혁명의 길로 나아갔다. 그가 각종 명분주의와 도덕의 우상을 철저히 파괴하면서 신랄한 풍자와 반어법으로 구성해 낸 ‘利害의 사회학’ 논리도 결국은 강권주의도덕, 노예도덕을 대체할 혁명도덕, 주체도덕의 제시로 귀착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인간혁명은 모든 사회혁명·민족혁명·민중혁명의 제일 조건이요 기초로 삼아졌다.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그 과정을 거침에 의해 민중은 자기해방의 주체가 되고, 새 삶, 새 세상의 주인이게 된다. 민중적 아나키의 새로운 시·공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 국민국가―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체제의 지배구조와는 확연히 다른 그 무엇이었다. 이 지점에서 신채호만의 논리로 ‘또 다른 근대’가 희원, 표상됐던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을 일찍이 선취된 ‘탈근대’의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무튼 신채호의 혁명사상과 그 논리구조는 1970·80년대의 민족민주운동에 크나큰 영감을 주고, 민중운동 대오의 정신적 자양분도 됐다. 그러나 90년대 초의 세계정세 급변과 더불어 혹은 그 여파로, 그의 사상은 낡은 설화의 자리로 밀려났다. 혁명은 개혁으로, 민중은 시민으로, 투쟁은 협치로, 개념화와 어법들이 확 바뀌었다. ‘주체’는 불온 용어처럼 여겨져, 언급조차 기피됐다. 그리고는 다시 10년. 21세기로 접어들자 몇 가지 새로운 유행어가 다시 대두했고, 신채호도 그 맥락에 위치해 재조명될 수 있다.

그러나 신채호가 사회진화론이나 아나키즘을 취용했던 것은 사상 자체의 매력 때문이 아닌 냉정·정확한 당대적 현실인식으로부터 그것이 요구됐기 때문이었다. 그런 신채호의 정신을 되살린다면, 우리도 분단국가, 토건국가, 조폭국가의 손아귀에 갇힌 채 ‘자기계발’에만 전심전력하는 용렬소인-俗衆(snob)의 세계에 들어앉아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런 시도 속에서 신채호의 유토피아는 다시 의미를 갖게 될지 모른다. 그런 뜻에서 신채호의 사상은 우리들 사고의 영원한 보습이 될 것이다. 碧初가 그를 일컬어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라 했듯이.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저서로는 『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 『민족혁명당의 결성과 그 혁명운동노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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